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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천초목의 바둑속으로3] 이여송은 선조에게 바둑 한판을 청하는데 -2

  • 입력 2014.08.19 08:53
  • 기자명 여수넷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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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언·서(身言書)까지 마친 이여송 판(判)은 바둑으로 검증할 요량인 듯한데 바둑을 썩 잘 둘지 모르는 선조가 당황해 하자 옆에 있던 좌의정 유성룡이 응하라는 눈짓을 보내므로 마지못해 응낙을 한다.

그리하여 행재소 앞 뜰에는 임시대국장이 마련되고 바둑판을 사이에 두 고 선조와 이여송의 대국이 벌어진다. 당시 바둑의 고수였던 유성룡이 일산에 구멍을 뚫어놓고 선조 옆에 앉아서 뚫린 구멍으로 햇볕이 스며드 는 것을 이용해 빙빙 돌려가며 바둑알 놓을 곳을 일러준다. 선조가 이를 눈치채고 햇볕이 쪼이는 곳에 착점함으로써 바둑 한판은 그럴싸하게 끝이났다

이로써 선조는 이여송 시험의 마지막 관문을 무사히 통과한 셈이다.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이여송이 신언서판(身言書判)의 잣대로 선조를 평가했다는 사실인데 그 중에서도 가장 비중있다는‘判'의 항목을 바둑 에서 구했다는 점이 사뭇 흥미롭다.

바둑의 형세판단과 상황 상황의 타개솜씨를 보고 선조의 사판(事判)과 이판(理判)의 능력을 시험한 것으로 사료되는데 이점 이여송의 색다른 식견을 엿볼수 있게 하는 대목이다.

아무튼 이를 계기로 유성룡과 이여송은 전란중에도 수시로 만나 바둑을 두었다는 기록이 善碁局에 남아있다. 유성룡은 당시 바둑이 국수급 실력 이였고 이여송 또한 만만찮은 바둑 실력이였음을 짐작케 한다

이렇게하여 선조임금에 대한 평가가 끝나자 이여송은 비로소 軍을 움직 여 평양성 공격에 들어가는데 별 어려움 없이 평양성 탈환에 성공한다. 그러나 승리에 도취한 나머지 여세를 몰아 한양도성까지 탈환하고자 맹 추격을 하다가 벽제관에서 그만 대기하고 있던 고니시의 복병에 크게 한방 얻어맞고는 그대로 주저앉아 더 이상의 진격은 아니하고 강화講和) 쪽으로 선회하고 만다.

위기10결 중 10번째 계율인 <세고취화(勢孤取和)>를 선택한 것이다.

세고취화는 상대는 강하고 아군이 약할때 취하는 전법인데 추격군이 이 병법을 택했으니 입장이 뒤바뀐 꼴이다.

이여송은 文의 방면에서는 탁월한 식견을 가진 것으로 볼수있겠으나 장 수로서는 젬병인 셈이다. 오히려‘적의 경계에 들어갈때는 신중히하라’ 는 위기10훈 2번째 계율인 <입계의완(入界宜緩)>의 교훈을 경솔이 여기 고 공명만을 탐하다가 일을 그르치고 말았으니 이는 전형적인 하수의 속성을 보여주고 있다 할 것이다.

하수의 속성으로 말할랴치면 선조임금 또한 그 범주를 벗어나기 어렵다. 지원군총수와의 바둑을 훈수바둑으로 마쳤다는 것은 큰 흠이 못된다. 왜냐하면 꾀는 신하들이 강구하는 것이고 공(功)은 군주의 몫이니까.

그러나 정여립 역모사건에서 보듯이 나라의 동량들을 대거 죽인다든지 (이때가 임진왜란을 불과 2년 앞둔 시점이다 ), 수많은 징후가 있었음 에도 불구하고 전란을 대비치 못한점은 그렇다 치더라도, 음해에 놀아나 전선의 총사령(이순신장군)을 불러들여 곤장을 치는짓 하며, 심지어는 전쟁중인 장군에게 종이를 구해서 보내라는 어명까지 내리는 것을 볼 때 선조의 하수근성은 여실하다.

전후 포상으로 내시에게는 1등을 주면서 정작 나라를 구하고 전사한 이 충무공에게 2등 무공훈장 밖에 추증치 않는다. 당시 왜가 조선에서 잡아 간 백성을 노예시장에 내다 파는데 그 숫자가 얼마나 많았던지 국제노예 시장의 노예값이 폭락했다는 기록도 있다. 이에 대해 아무런 대응도 못 하며 한다는 짓은 오직 어린왕자(영창대군)를 후계로 세우는데만 혈안 이었으니 그리하여 혼란정국을 야기하는 무분별을 볼 때 선조의 형세판 단, 수읽기 능력 다시말해 통찰력 판(判)은 우물안개구리 수준을 벗어 나지 못함이다.

선조는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도 서자출신이라는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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