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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인 칼럼/정영희] 억새여, 바람이여

정영희(여천초등학교장)

  • 입력 2014.10.08 13:27
  • 기자명 여수넷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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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론 중심이 아닌 바깥이어서 더 좋을 때가 있다. 중심이 갖는 팽팽한 긴장감이나 불가항적 구속에서 벗어나 흐트러진 주변의 자유로움을 누릴 수 있는 풍경을 보는 일이 그것이다. 그렇다고 나태하거나 함부로 나대는 것도 아니어서 변두리 나름대로 질서에서 오는 그런 여유로움이다.

여기에 가을바람이라도 살랑거리면 낯이 간지러워 억새에 볼이라도 비벼야 비로소 실눈을 뜰 수 있는 해창벌*, 그 벼이삭에서 증발된 누런 물기가 실개천을 만들어 간다.

황금들판이란 말은 적절한 표현이 아니다. 황금이 들판을 이룬다고 해야 맞는 말이다. 벼는 농부의 숨소리를 듣고 자란다고 하지만 이것도 맞는 말이 아니다. 너른 들판에 서보지 않은 서투른 사람들이 튕기는 거문고 줄 같아서 아무리 북을 쳐도 소고 소리를 내는 것과 같다.

황금더미를 누릴 권리는 햇볕의 질에 달려 있다는 걸 새벽 농부만이 안다. 누런 벼이삭은 빼곡히 박힌 석류알과 흡사해서 햇볕의 양보다 농부가 눙쳐내는 햇볕의 질감들이 토실토실 맛있게 박힌 것이다.

순천만을 끼고 돌아가는 변두리에 억새 군락이 점점이 떠있다. 뭉게구름이라면 너무 높거나 가볍고, 물안개라면 너무 무거워 땅바닥이 가깝다. 가깝다고 모두 이웃이 되는 시절이 아니기에 저만큼의 거리를 두고 끼리끼리 또래를 이루고 있는 건 아닌지 차에서 내려 물어봐야 했다.

저런 직선의 협궤에서 피워 올리는 야생성으로 보아 억새를 아무래도 부드러운 직선이라고 불러야겠다. 품새가 너무 억세기에 억새라고 불렸을지언정 탄력이라는 방식의 허리놀림으로 자줏빛 기품을 손수 지어낸 것이다. 그래서 순천만을 변주의 가락이 물 위에서 통통 튀는 빗방울 자국이라 부르는지 모르겠다.

억새가 억센 이유에도 사랑받는 이유가 부드러움에 있다. 유연한 손놀림을 구사하는 비밀은 은닉된 바람의 속살에 있다. 흔들리지 않는 억새는 억새가 아니다. 공생을 목적으로 서로 나눠야 할 지분을 엄격히 구분하여 즐기는 불륜이 있다.

바람을 잘게 쪼개 허공을 채워야 할 날렵한 손가락은 억새의 몫이요, 죽었어도 살아있는 척 깨워 흔들어야 할 몫은 바람이 저지를 일이다. 그러니 바람과 억새의 공생은 둘만의 밀회가 아니라 노동의 진통에서 출산한 인격체라는 걸 알아야한다.

억새바람에 한번쯤 날카롭게 부딪쳐야 비로소 가을을 보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가을의 또 다른 변주를 억새바람이라고 불러야겠다. 가을이라고 쓰고 억새바람이라 읽어도 가위질할 사람은 없다.

더구나 저물녘, 죽음을 불사하고 태양과 정면으로 대치하는 억새의 기개야말로 해창벌에서 볼 수 있는 카이로스, 즉 호기(好期)다. 억새의 산방꽃차례에서 뿜어 나오는 환한 햇살을 이 글을 곰곰이 씹는 분들께 한 움큼씩 나눠드려야겠다.

누대에 걸친 가을이라고 으레 을씨년스럽게 당신 혼자여선 안 된다. 정말 살아 있는 자의 고독이어야 한다면 해창벌 억새무덤에 기대어 누런 들판을 읽어보라. 당신의 얼굴에서 묻어나오는 지난여름의 짭짤한 각질들이 유쾌하게 양파처럼 벗겨질 것이다.

그러다가 흐르는 실개울에 얼굴을 담가보라. 연금 때문에 억울해하는 분께는 억새바람이 상쾌한 수건 노릇을 할 줄 모른다. 증세도 아니고 연금 개악도 아니며 오로지 민생 경제만을 위한다는 정치인들이 수두룩 벅적하다. 그들에게 억새 잔치 기념으로 바람 한 컵 건배사로 올리는 일도 괜찮겠다.

* 순천만을 끼고 도는 작은 실개울이 지절대는 들판, 가까운 곳에 순천 인안초 국도 임종윤 교장의 생가가 있다. 이때쯤에 억새와 흑두루미의 군무가 시작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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