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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케티 <21세기의 자본>이 불러온 생각들

  • 입력 2014.12.17 16:00
  • 기자명 여수넷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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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케티가 <21세기의 자본>에서 얘기한, 심화되는 경제적 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해 세계적인 규모의 자본세 등을 도입하자는 대안에 대해서는 별로 언급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무엇보다 그 실현 가능성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피케티 본인조차 별로 큰 무게를 두지 않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내가 보기에 이 책은 매우 재미있는 그리고 가치있는 데이터를 많이 제시하고 있다(경제학의 문외한인 나는 그 데이터가 그 분야의 연구자들 사이에서 얼마나 희소성과 객관성을 인정받는지는 잘 모른다). 다만, 그 데이터를 해석하는 방향에서 나는 피케티와 의견이 좀 다르다.

피케티의 결론 가운데 가장 인상적이고 중요하다고 내가 느낀 것은, 경제성장에서 자본이 가져가는 몫이 원래부터 컸고 이것이 더 자연스러운 현상이며(피케티는 물론 이런 현상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 아니고 국가 또는 국가들이 나서서 해결해야 할 숙제라고 본다) 20세기에 노동의 몫이 커졌던 것은 역사 속에서 나타나는 일시적이고 예외적인 현상이라고 봐야 한다는 것.

21세기에 들어와 다시 자본의 몫이 커지는 것은 자본주의가 원래의 속성으로 되돌아가면서 나타나는 현상이기 때문에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경제적이라기보다 비경제적인 대책 즉 국가 또는 그보다 상위에 있는 어떤 의지가 개입해 이런 현상을 최소한 완화시키기라도 해야 한다는 것(피케티가 보기에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 문제에 대한 근본적인 해결은 불가능하기 때문에)이 그의 주장인 셈이다.

20세기 들어서 예외적으로 자본이 경제성장에서 가져가는 몫이 줄어든 이유로 피케티는 전쟁을 들고 있다. 엄청난 전비 지출과 인플레이션, 파괴 등으로 자본가들이 쌓아놓은 거대한 자본이 사라지면서 경제성장에서 자본의 몫이 줄어들고 노동의 몫이 커졌지만 시간의 경과 속에서 그러한 효과가 사라지면서 1980년대부터 자본의 몫이 계속 늘어나게 됐고 이것이야말로 자본주의의 원래 민낯이라는 것이다.

우선 내가 얘기하고 싶은 것은 피케티의 결론을 그냥 받아들이기에는 여전히 그 분석 기간과 대상 데이터가 제한적이지 않으냐 하는 것이다. 무려 3세기에 걸쳐 전세계적으로 축적된 다양한 데이터를 분석한 업적에 대고 무슨 망발이냐고 할지도 모르지만 단순히 양적인 측면을 떠나서 얘기하자면 <21세기의 자본>이 분석한 샘플은 딱 3개 뿐이다. 19세기 이전과 20세기 그리고 기껏해야 이제 10년 정도 경과한 것에 불과한 21세기의 현상이 그것이다.

어떤 현상 A가 발생했고, 그 A가 해소되는 모습을 보였다가 다시 A가 재연하는 모습이 나타났다. 이러한 단순 외형만을 두고 A가 그 영역의 영원불변한 핵심 원리라고 결론을 내릴 수 있을까? 나는 이건 아니라고 본다. 게다가 결정적으로 피케티는 어떤 현상 A가 처음 나타났을 때의 모습과 한번 잠복한 후 다시 나타났을 때의 차이에 대해서 그다지 세밀한 주의를 기울이고 있는 것 같지 않다.

설혹 A(원래 자본의 몫이 크다능^^)가 자본주의의 고유한 속성이라는 결론이 나온다고 해도 이 세상에서 똑같이 되풀이되는 현상은 없다. 상위 10% 자산가가 경제성장의 90%를 가져가던 19세기 이전의 모습과 21세기에 자본의 몫이 점증하는 현상은 거칠게 보면 똑같은 현상의 재현일지 몰라도 그 구체적인 양태에서는 무척 큰 차이를 보일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학자나 이 세계의 변화에 진정으로 관심을 갖는 사람들은 그 구체성의 문제에 착안하고 고민하는 사람들이다. 아닌 말로 그 구체성에 대한 접근이 없다면 이 세상은 항상 똑같은 곳이다. 태어나서 고생하다가 죽는 것. 태양 아래 새로운 것이 없다는 성경 말씀은 이 점을 지적한 것이다. 하지만 인간이란 몇백 몇천 아니 몇백만 몇십억년 단위를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다. 그 단위에서는 모든 차이가 사라지겠지만 인간은 단 몇 분 아니 몇 초 사이에 벌어지는 그 구체성 속에서 울고웃고 죽고살고 하는 존재다.

19세기 이전 자본의 몫이 컸던 시대와 21세기 접어들면서 다시 자본의 힘이 부활하는 시대의 차이점에 대해 피케티 본인도 책에서 이미 언급하고 있다. 단지 그 의미를 인정하지 않거나 엉뚱하게 해석하고 있을 뿐이다. 일반인의 상상을 초월하는 고액 연봉을 받는 수퍼매니저(최고급 전문경영인)의 존재가 그것이다.

수퍼매니저의 힘을 자본의 영역이라고 봐야 할까 아님 노동의 영역이라고 봐야 할까? 피케티는 노동의 영역이라고 보는 것 같다. 나도 그렇게 본다. 수퍼매니저의 고액 연봉이 실제로 기업의 경영실적과 연결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열심히 논증하는 것만 봐도 피케티의 의도를 읽을 수 있다. 여기에서 피케티가 따지고 드는 것이 고액연봉의 한계생산성이다. 비싼 연봉 줘봤자 그 수퍼매니저가 기업 실적 좋게 만드는 게 아니라는 얘기다.

내가 보기에 이 부분은 피케티의 인식이 좀 안이한 것 같다. 이 세상에서 정확하게 실적과 연동되는 급여는 없다. 원래부터 급여란 미래에 그 노동자가 산출할 것으로 기대되는 가치에 대한 평가액이지, 과거에 이미 만들어놓은 가치를 구매하는 금액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미 만들어진 가치를 가져오는 금액이라면 그것은 급여가 아니라 외부 업체와의 거래액이라고 봐야 한다.

비싼 연봉이 제 값을 못하고 기업 실적과 직결되지 않는 현상은 수퍼매니저의 역량에 대한 평가 그리고 그 평가를 기업의 경영 현실에 접목해 최적의 인재를 고르는 기술과 노하우의 문제이지, 수퍼매니저의 연봉 자체의 문제가 아니다. 분명한 것은 세계 최고 수준의 경제력을 자랑하는 나라(미국을 말한다)의 자본가들이 수퍼매니저들에게 그만한 금액을 베팅할만한 필요성을 느낀다는 것이고, 그것이 그냥 자선이나 과시성 소비에 그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수퍼매니저의 비싼 연봉은 유능한 CEO가 할 수 있는 역할, 경영 실적 향상과 기업가치 제고에 대한 주주 등 자본측 전반의 기대를 반영한다. 특정 CEO 개인에 대한 기대는 뻥튀겨졌을 수도 있고, 빗나간 화살일 수도 있지만 유능한 CEO의 역할에 대한 기대 자체가 불합리한 것이라고 볼 수는 없다. 현대의 기업 경영에서 CEO의 역할이 점점 커지고 중요해지는 추세인 것은 확실하다.

이런 점까지 인정한다면 피케티가 말하는, 경제성장에서 자본이 가져가는 몫이 커지고 노동의 몫이 줄어드는 것이 자본주의 자체에 내재한 속성이라는 결론은 받아들이기 어렵다. 1980년대 이후 자본의 몫이 커지는 현상은 그 원인을 피케티의 문제의식과는 좀더 다른 곳에서 찾아야 하지 않을까?

나는 '가치를 만들어내는 것은 노동'이라는 고전경제학의 기본명제를 여전히 인정하고 존중하는 편이다. 생산설비와 토지 등 이른바 죽은 자본, 죽은 노동은 자신에 내재한 가치를 생산물로 이전할 뿐이지 새로운 가치를 창출해내지는 못한다고 본다.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내는 것은 노동자(그것이 생산라인의 저임금 노동자이건 아니면 자본가보다 더 많은 돈을 벌어들이는 수퍼매니저이건)가 생산에 실제로 투입하는 살아있는 노동이다.

결국 1980년대 이후 특히 21세기 들어 본격화하고 있는, 경제성장에서 자본의 몫이 커지고 있다는 데이터는 생산과정에서 노동이 기여하는 몫이 줄어들고 있다는 현상의 반영이라고 봐야 하지 않을까?

그것은 급격한 기계화/자동화의 결과일 수도 있고, 또는 정반대로 자본주의 생산방식이 요구하는 급격한 혁신을 법/제도를 포함한 국가나 사회 시스템 전반이 따라가지 못한 결과일 수도 있다. 정반대의 모습으로 보이는 두 가지 원인이 중복 결합한 현상일 수도 있다. 나는 두 가지 상반돼 보이는 현상의 결합이 그 진정한 원인일 것이라고 판단한다.

기계화/자동화는 생산과정에서 단순 저임금 노동의 기여와 몫을 줄이게 된다. 노동의 몫을 늘리려면 단순 저임금 노동이 아닌 고부가가치 고급 노동의 참여와 비중을 늘려야 한다. 글로벌 선두기업들이 유능한 CEO에 대해 일견 불합리해 보이는 천문학적인 급여와 갖가지 인센티브를 지급하는 것은 바로 이런 현상의 일단이다.

이 두 가지 현상이 적절하게 균형을 이뤄 자본주의 생산방식의 변화를 전개해간다면 현재 드러나고 있는, 경제생산에서 자본의 몫만 계속 커지는 현상은 적절히 통제되거나 또는 그 현상 자체가 별다른 사회적 이슈로 이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본다. 하지만 이 두 가지 변화 모두 법/제도를 포함하여 급격한 사회적 저항에 직면하고 있다. 이것이 생산력의 발전을 가로막는 요인이며 경제생산에서 자본의 몫만 계속 커지는 현상을 낳는 핵심 원인이라고 본다.

피케티도 <21세기의 자본>에서 결국 구조적 불평등을 낳는 핵심 요인으로 저성장의 문제를 지적하고 있다. 경제 성장률이 낮은 경제에서는 어떤 경우에도 자본의 몫이 커지는 것을 막을 수가 없다. 문제는 피케티가 이 낮은 경제 성장률이 현실화하는 이유와 해결방안에 대해서 별다른 진단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나는 자본주의의 형성--> 운영 및 유지--> 기존 시스템의 한계 노정--> 혁신--> 재구조화라는 일련의 프로세스에서 문제의 진단과 해결 방안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자본주의는 매우 거칠면서도 정교한 시장 시스템을 매개로 하여 움직이지만 그 시장 자체가 자본주의적 방식으로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다. 프랑스대혁명의 사례에서도 명백하게 볼 수 있지만, 시장 시스템 등 자본주의 생산방식은 가장 반시장적인 폭력 혁명과 기존 질서에 대한 부정을 통해 형성됐다.

그리고 자본주의는 주기적으로 시장을 포함한 기존 생산방식의 한계에 부딪히며 이 한계를 해결하고 극복하는 것은 시장에 내재한 자본주의적 질서가 아니라 시장의 질서마저도 포함하여 기존의 한계를 부정하고 깨트리는 변화의 힘이라고 봐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 힘을 피케티는 전쟁이라고 본 것이고 나는 그 일반적인 형태가 공황 등 경제위기로 드러나며 가장 극단적으로 드러나는 형태가 전쟁이라고 이해한다.

이것이 위에서 제시한 자본주의 생산방식의 라이프사이클 및 프로세스가 현실화하는 모습이다. 문제는 자본주의 생산방식이 혁신하고 재구조화하는 과정에서 드러나는 공황과 전쟁 등의 부담을 현재의 국가 및 사회시스템에서는 감당하기 어려워졌다는 점이다. 노동권의 제도적 보호와 각종 사회보장 등 복지 장치를 마련한 것이 바로 그러한 부담과 위험을 회피하기 위해 자본주의 시스템이 불가피하게 지출하는 비용이다.

그러한 지출은 자본주의적 생산방식의 역동성을 저해하고 생산력의 발전을 가로막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경제성장률이 낮아지고, 결과적으로 노동의 몫이 줄어들며 자본의 몫이 커진다.

<21세기의 자본>이 제시하는 데이터를 쭉 따라가면서 그 의미를 내 나름대로(적어도 피케티와는 다른 관점에서) 해석하면 이런 결론이 나온다.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좌고우면하지 않고 그냥 막 지르는 식으로 얘기하자면 이렇다.

자본주의 고유의 역동성을 회복하는 방식으로 법적/제도적 측면을 포함한 사회적 변화에 착수해야 한다. 노동권 보호와 4대 보험 등 자본의 발목을 잡는 규제는 최소화하고 개별 및 전체 자본이 가장 효율성 높은 생산방식을 자신들이 선택할 수 있게 해야 한다. 할 수 있도록 정해놓은 사업 외에는 할 수 없는 포지티브 규제가 아니라, 하지 말라고 규정한 사업 외에는 모두 할 수 있도록 풀어주는 네거티브 규제 방식으로 바꾸어야 한다.

개인적으로 도둑 강도 사기 살인 등 전통적으로 범죄임이 명백하게 밝혀진 방식 외에는 모두 허용해야 한다고 본다. 다만 사기 등 정보의 비대칭성을 저해하는 행위에 대해서는 과거보다 훨씬 폭넓고 강력하게 규제해야 하는 시대적 당위가 생겼다고 본다. 쓸데없이 법을 많이 만들 것이 아니라, 반드시 필요한 법과 규제만 남겨놓되 그 법과 규제는 엄격하고 정확하게 적용해야 한다. 우버 택시를 예로 들자면 나는 전면 허용해야 한다고 본다.

즉, 자본이 실컷 부가가치를 많이 만들도록 해주고 그 벌어놓은 것을 갖가지 방식으로 많이 가져다 쓰자는 얘기이다. 생산의 입구가 아니라 출구를 관리하는 방식으로 가자는 얘기이다. 현대의 자본주의는 생산의 입구를 관리하는 규제가 너무 많고 우리나라는 그러한 문제가 특히 심한 경우이다.

피케티 개인에 대한 느낌이 있다. 좀 슬픈 결론이지만 '경제적 원칙을 포기한 경제학자'라는 것이 그것이다. 세계적인 규모의 자본세라는 발상은 사실 경제적인 원칙에만 의존해서는 경제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고백에 다름 아니다. 말해놓고 보니 나도 비슷한 얘기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문득 든다. 하지만 경우가 다르다.

나야 경제학자도 아니고 꿩 잡는 게 매라고, 현실 문제를 푸는 데에는 원칙의 전개과정 따위는 별로 이해하지 않아도 좋은 입장이라고 할 수 있다. 솔직히 말해서 문제를 풀기 위해서 필요하다면 어떤 얘기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 하지만 피케티는 경제학자인데,그리고 저렇게 유명한 학자인데 앞으로 경제학자로서 무슨 얘기를 풀어가야 할지 약간 막막할 것 같다는, 주제넘은 걱정을 좀 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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