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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판없는 즉결처분... 서로 응어리 풀어야 할 때

[제주 4·3사건 유적지 답사] 여순 사건 유족 증언

  • 입력 2015.01.04 12:40
  • 수정 2015.01.04 12:45
  • 기자명 오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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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3사건 추모승화광장 앞에선 여순사건 희생자 유족들

여수에도 제주와 같은 평화공원을 만들기 위해 제주를 방문한 여수현대사평화공원 추진단 일행 중에는 여순사건희생자 유족도 있다. 제주 4·3사건 유적지 답사가 끝나갈 무렵 3명의 유족을 만나 여순사건 당시 희생됐던 선친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여순사건 발단의 배경

여수 신월리에 주둔 중이던 국방경비대 14연대에 제주 4·3을 진압하기 위해 제주로 출동(1948년 10월 20일)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출동을 하루 앞둔 1948년 10월 19일, 14연대의 일부 군인들이 무장봉기를 일으켜 친일 전력 경찰과 우익을 자처하는 친일 경력 인사들을 살해했다.

반란군은 여수를 점령한 후 순천과 전남 동부지역을 장악했다. 이에 이승만 정부는 10월 21일 여수, 순천 지역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송호성 준장을 총사령관에 임명해 10개 대대 병력을 동원해 진압을 명령했다.

진압군이 대대적인 공격에 나서자 수세에 몰린 반란군은 광양 및 지리산 일대로 숨어들었다. 진압군과 반란군 간의 전투에 이은 한국전쟁의 발발로 1만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보도연맹사건

이승만 정부는 국가보안법에 저촉된 자 또는 전향자로 분류된 인사들을 보도연맹에 가입시켜 회유와 통제를 쉽게 하도록 했다. 그러나 6·25전쟁이 발발하자 위장전향자들과 북한에 동조할 가능성이 있는 세력을 뿌리 뽑는다는 정부 방침하에 의해 무차별 검속과 즉결처분이 이뤄졌다. 이른바 보도연맹 사건이다.

다음은 여수현대사평화공원 추진단으로 참여한 여순사건희생자 유족 3명이 전해 준 이야기다. 여순사건 발생 직후인 1948년 10월 하순경, 가을걷이를 끝낸 장두웅(73·당시 5세)씨 동네에 경찰이 들어왔다. 불온한 사상을 가진 사람들을 적발한다는 명분으로 마을을 수색하던 경찰이 사촌 형님을 잡았다. 경찰은 일본도로 사촌 형님의 눈 자위를 그어서 피가 흘러내렸다.

▲ 4.3희생자들의 위패가 적힌 위패봉안소의 방명록에 서명하는 여순사건희생자 유족들

마을을 수색하던 경찰이 좌익계통이라고 생각되는 다섯 집을 불태우자 위험을 느낀 장두웅씨의 아버지는 피난을 갔다. 일 주일여가 지나 여순사건이 진압되자, 초등학교 교사인 아버지와 사촌 형님은 집으로 돌아와 일주일에 한 번씩 경찰서에 신고하러 다녔다. 이른바 보도연맹원이 된 것이다.

6·25가 터진 후 어느 날 지서에 출두하라는 연락이 와 영문도 모른 채 지서에 간 아버지가 돌아오지 않았다. 오랜 시간이 지난 후 알려진 전말에 의하면 지서를 거쳐 경찰서로 인계된 아버지는 여수 앞바다에 있는 애기섬에 수장(1950년 7월 16일)됐다. 함께 끌려갔던 사촌 형은 다행히 아는 사람의 도움으로 석방됐다.

여순사건의 여파는 섬이라고 예외일 수 없었다. 여수를 떠나 뱃길로 두 시간쯤 거리에 아름다운 섬 연도가 있다. 진압군으로 여수에 온 부대 중에는 김종원이 소속된 5연대가 있었다. 김종원은 백두산 호랑이라고 불려 희생자들을 일본도로 죽인 군인이다.

김종원 부대는 추수를 마치거나 바닷일을 마치고 들어온 3개 부락 주민을 초등학교 운동장에 집합시켰다. 집합된 주민 속에는 김일웅씨의 형 김세환(당시 17세)씨도 포함되어 있었다. 불순분자를 가려내기 위해 당시 지서소사(심부름하던 아이)로 하여금 불순한 사람을 지목하라고 시켰다. 지서 소사의 손가락에 지목받은 7명은 끌려가 총살됐다. 이른바 손가락 총 사건이다. 김씨의 증언내용이다.

"당시 초등학생이어서 기억이 너무나 생생합니다. 아버지는 죽은 형님의 피를 손으로 긁어모으면서 통곡했어요. 밤중에 안 계시면 묘지에서 형님 묘를 끌어안고 통곡하셨어요. 아버지는 그후 화병으로 돌아가셨습니다."

여순사건 유족회장 황태홍(66)씨의 증언이다. 황씨는 여순사건을 본 적이 없다. 여순사건직 후 태어난 유복자이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죽은 3년 후 어머니까지 화병으로 돌아가시자 할머니 손으로 자랐다. 그 때문에 황씨가 아는 사실은 모두 황씨의 할머니가 전해준 이야기다. 황씨의 얘기다.

▲ 4.3평화공원의 위령탑. 영원한 평화를 기원하고 화해와 상생의 2인상은 서로 끌어 안은 모습으로 양분된 대립의 극복과 민족의 통일을 염원하고 있다.

"사건이 발발하기 전 여수시 충무동에 살았던 아버지가 한 여자를 알았는가 봐요. 그런데 그 여자가 빨갱이에 소속된 여자였던가 봐요. 그 여자가 아버지를 지목해 총살당했습니다. 할머니 말씀에 의하면 사람들이 '저 황바우 집 자식은 빨갱이 자식'이라고 손가락질을 했다고 합니다. 제일 가슴 아픈 건 아버님 돌아가시고 그나마 어머니까지 화병으로 돌아가셨는데 빨갱이 자식이라고 손가락질받을 때가 가장 가슴 아팠습니다."

여순사건이 끝난지 67년이 지난 지금도 희생자들의 응어리는 풀리지 않고 있다. 희생자뿐만 아니라 가해자도 피해자다. 서로의 가슴에 쌓인 응어리를 풀고 서로를 어루만져줄 방법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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