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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희생자의 억울함은 누가 풀어줄 수 있을까

[30인 칼럼] 이현종

  • 입력 2015.02.11 09:11
  • 수정 2015.02.11 09:12
  • 기자명 여수넷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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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참사, 아직도 9명의 실종자를 찾지 못한 채 해가 바뀌었다. 진상조사위는 구성부터 지체되고 있다. 세월호 인양도 진정성이 없어 보인다. 언제까지 세월호타령이냐고 타박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래도 얘기는 계속해야 한다.

잊지 않겠다고 약속했으니까. 억울한 죽음의 원인을 밝혀주겠다고 약속했으니까. 더 중요한 것은 우리 살아 있는 사람들이 그런 억울함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잊으면 안 된다. 잊으면 반복되는 것이니까.

세월호를 인양하고, 실종자를 찾고, 침몰의 진상이 제대로 밝혀지고, 책임자가 처벌받고 안전한 세상이 될 때까지 얘기는 계속되어야 한다.

지난해 4월16일 세월호 참사는 온 국민의 가슴을 아픔에 젖게 했다. 304명의 목숨을 잃어버렸기 때문만은 아니다. 구할 수 있었는데도 못 구했기 때문에 더 마음 아팠던 것이다. 해경이 그들의 목숨을 안 구한 건지 못 구한 건지는 아직도 모르겠다. 분명한 것은 마음만 먹었으면 구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또한 사고가 왜 일어났는지도 의문투성이고, 선장이 왜 승객을 수장시켰는지도 의문투성이다. 분명한 것은 선장이 퇴선지시만 내렸으면 승객을 살릴 여유가 충분했는데도 승객에게는 퇴선지시 대신 ‘가만히 있으라’ 명령하고 도망치듯 승무원들과 함께 탈출해서 살아남았다. 그리고 해경의 비호를 받으며.

우리는 강력한 지도력을 필요로 하는 지도자상을 설명할 때 선장에 비유해서 설명하곤 한다. 그 때 선장의 모습은 넓은 바다에서 꿋꿋하게 사나운 파도를 헤치며 배를 지켜내고 선원들과 승객의 생명을 자신의 생명보다 더 귀중히 여기는 그런 지도자의 모습이다.

그런데, 세월호의 선장은 가라앉는 배 안에 승객들을 ‘가만히 있으라’하여 수장시켜버리고 자신만 탈출하였다. 그런 사람이 선장이라면 그 배를 누가 타고 싶으랴.

그런데 그보다 더한 불신이 또한 그 사건으로부터 이어서 발생했다. 대통령이 장본인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사고가 난지 한 달만인 5월16일 세월호 유족들을 청와대에서 만나 “언제든 유가족들을 다시 볼 것”이며, ‘진상을 밝힐 것’이라고 약속했다. 그리고 걸어나가던 희생된 이수빈(단원고 2학년)군의 어머니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위로했다.

그 사진은 곧 바로 언론에 뿌려지며 ‘참 인자한 대통령’이란 이미지를 심어주었다. 그러나 그것은 천연덕스러운 연기였던 것으로 밝혀졌다. 그 뒤로 진상규명을 위한 절차가 제대로 진행되지 못하자 유가족들이 대통령을 만나보려고 온갖 노력을 했지만 만나주지 않았고, 심지어는 국회에 가던 날 그 길목에서 유가족들이 불러도 불러도 끝내 고개조차 돌리지 않았으니까.

그때 대통령이 어깨를 감싸 안았던 고 이수빈군의 어머니는 “그럴 일 없겠지만, 만일 내가 박근혜 대통령을 다시 만날 수 있다면 꼭 이렇게 묻고 싶다”고 한다. “하필 왜 저를 붙들고 그렇게 천연덕스레 연기를 하셨나요? 당신 말을 곧이곧대로 믿었던 내가 부끄럽기만 합니다. 그때 도대체 왜 그러셨어요?”(한겨레신문, 2014년 12월 29일자 인용)

진상규명에 대해 의지를 안 보이는 것도 화나지만, 대통령에게 우롱당했다는 기분이 들어 더 억울하고 화가 난 모양이다.

신뢰를 주는 것은 지도자 덕목의 첫 번째이다. 만일 지도자에 대한 신뢰가 무너진다면 그 사회의 역동성은 기대하기 힘들다. 그쯤되면 국가에 기대할 것이 없으니 알아서 살 궁리를 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면 약자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이미 우리 사회는 약자를 인간대접해주는 사회는 아니니 변한 것은 없을지도 모른다. 그것을 깨우쳐주고 있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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