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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본질적인 자아를 찾아서

[30인 칼럼] 김광호 교사

  • 입력 2015.03.09 20:19
  • 기자명 여수넷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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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다. 새봄이다. 아이들의 마음에도 새싹이 돋아나기 시작한다. 삼라만상의 새싹 또한 매 시각 앞을 다투어 드넓은 우주를 향해 한 움큼씩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무늬는 초록이지만 생김새부터 돋아나는 모습까지 그만의 색깔을 가지고 피어난다. 이것은 바로 삼라만상 자체가 혼돈(무질서)이라는 증거일 것이다.

문득 장자의 응제왕편에 나오는 ‘혼돈’이라는 이야기가 떠오른다. 남쪽 바다의 임금을 숙(儵)이라 하고, 북쪽 바다의 임금을 홀(忽)이라 하였으며 그 중앙의 임금을 혼돈(混沌)이라 하였다. 숙과 홀이 때때로 혼돈의 땅에서 만났는데, 혼돈은 그 때마다 그들을 극진히 대접하였다. 숙과 홀은 혼돈의 은덕을 갚을 길이 없을까 의논하였다.

"사람에겐 모두 일곱 구멍이 있어 보고, 듣고, 먹고, 숨 쉬는데 오직 혼돈에게만 이런 구멍이 없으니 구멍을 뚫어 줍시다" 하였다. 하루 한 구멍씩 뚫어 주었는데, 이레가 되자 혼돈은 마침내 죽고 말았다.

장자는 왜 <혼돈>이라는 이야기를 우리에게 던졌을까? 바로 인위와 문명의 치명적인 문제점을 지적하고자 한 것은 아닐까? 우린 일상에서 혼돈을 매우 부정적으로 해석한다.

일상 자체가 혼돈인데 언제부터인가 누군가에 의해 혼돈을 마치 야만과 미개로 치부하면서 반드시 고치고 없애야 할 것처럼 제도화하였다. 그러다보니 혼돈 자체는 설자리가 없으며 하나 둘씩 본연의 모습을 잃어가고 있다.

마치 개성 만점인 많은 아이들이 입시와 출세라는 질서의 정점에 서기 위해 밤낮 없이 서성이다가 본질적인 자아를 잃어버린 것처럼 말이다.

우리 아이들은 다양한 혼돈의 모습을 지니고 있다. 그런데 기성세대는 교육이라는 미명하에 하나 둘씩 숙과 홀이 되어서 아이들을 죽이고 있다. 숙과 홀이 무지하기 때문에 마치 모든 아이들은 7개의 구멍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7개의 구멍이 없으면 큰일이나 날 것처럼 기성세대는 아이들의 수많은 언행을 통제하고 있다. 그런 획일화된 삶이 아이들에게 인생에서 약이 될지 독이 될지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하나같이 아이들에게 7개의 구멍을 뚫어주면 출세한 삶을 살 수 있다고 확신한다.

삶은 호흡 그 자체이지 승리나 성공에 있는 것이 아니다. 이런 기본적인 명제를 전제해 놓고 삶과 교육을 재해석할 필요가 있다. 아이들을 삶 자체로 바라보았으면 좋겠다. 아이들을 성공을 향한 수단으로 취급했을 때 우린 아이들의 삶이 얼마나 황폐화되어가고 있는지를 도처에서 목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요즘 9시 등교가 수도권에서 전국으로 확산되고 있다. 8시 전에 등교하면 아이들의 삶이 풍요롭고 9시 전후에 등교하면 아이들의 미래가 불안하다는 논리는 잠시 잠재우자. 다양한 모습을 지닌 아이들에게도 중앙 임금 혼돈의 삶을 살 수 있도록 여유의 장을 마련해주자.

이름(학벌, 출세, 성공, 체면, 가문 등등)에 매이지 않고, 해맑은 눈동자로 푸른 하늘을 응시할 수 있는 일상이 되었을 때 아이들의 가슴에도 진정 새싹이 돋아날 것이다. 과연 혼돈(무질서, 개성, 다양성,자율)은 봄과 함께 아이들의 얼굴에서 새싹처럼 피어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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