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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세까지 바다 누비기로 했습니다"

[나가사키 여행기⑤] 한국 유일의 범선 코리아나호 선장 정채호

  • 입력 2015.05.11 08:51
  • 수정 2015.05.11 08:52
  • 기자명 오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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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가사키 범선축제에 참가한 대한민국 유일의 범선 코리아나호가 항구에서 돛을 올린채 정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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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년 전에 코리아나호를 끌고 나가사키를 처음 방문했을 때 교포들이 배에 올라와 감격해하며 울었어요. 당시 한국배가 왔다고 하면 무시하고 김치 냄새가 난다고 업신여기던 때였습니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일본에 김치붐이 일어났어요. 코리아나호에서 선상파티를 할 때 가장 인기있는 음식이 바로 김치입니다."

나가사키 범선축제에 17년째 여수에서 코리아나호를 끌고 축제에 참가하는 정채호 선장의 말이다. 정씨의 나이 67세. 이 나이 또래의 사람들은 대부분 은퇴했지만, 그는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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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코리아나호 선장 정채호씨와 부인 오정순씨가 배위에서 나가사키항을 배경으로 포즈를 취했다. 부인 오정순씨는 8박 9일간 배에 승선한 20명의 승선원들을 위해 뛰어난 음식솜씨를 제공했다. 한국인들을 위해 환영만찬을 해준 일본인들을 위해 답례로 코리아나호 선상에서 연 선상파티 중 김치가 금방 동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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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가사키 범선축제에 참가한 코리아나호를 취재하기 위해 나온 아나운서와 인터뷰하는 정채호선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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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같으면 '뒷방 늙은이' 대접을 받을 나이에 범선을 끌고 바다를 돌아다니는 정 선장. 남들은 바다를 장애물로 여기는 게 상례다. 오죽했으면 유행가 가사에 "바다가 육지라면…, 저 바다가 없었다면…"이라는 구절이 들어갔을까. 하지만 바다를 대하는 정 선장의 태도는 남다르다. 코리아나호에는 오키나와에서 인천까지의 국제 범선레이스에 참가해 2등을 했다는 상장이 걸려있다. 

"나이도 들었으니 좀 쉬시지, 바다가 그렇게도 좋습니까?"라고 묻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바다와 육지에 사는 동·식물을 비교해보면 바다가 2:8로 많아요. 면적도 훨씬 넓고. 무엇보다도 바다는 육지보다 훨씬 자유로움이 많아요. 행복이라는 건 자유로움이 얼마나 더 크냐에 달려있어요. 육지에는 건물과 장애물이 많은데 바다에는 없죠. 바다에서는 비가 오면 오는 대로 좋고, 바람이 불면 바람 부는 대로, 날씨가 좋으면 좋은 대로 좋아요."

낙천적 성격인 정채호 선장의 이력은 남다르다. "전생이 있다고 믿는다"라고 말한 그는 젊었을 적에 요트나 범선 앞에서 사진을 찍었다. 그가 요트에 재미를 느낀 건 미국 유학시절이다.  

그는 현재 한국범선협회 회장과 전라남도 요트협회 회장을 맡고 있다. 정선장이 요트와 범선에 인연을 맺은 것도 전생과 관련된 인연일까. 미국 유학을 마치고 귀국해 여수 전남대에서 4년간 무역실무와 회계사 강의 중이었다. 요트를 탈줄 알고 일본말을 할 줄 안다는 이유로 요트선수를 인솔하고 일본 사가현 가라쯔시에 가게 됐다. 당시 여수시와 가라쯔시는 자매결연을 맺었다. 

바람이 불면 바람이 부는 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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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가사키 범선축제에 시가 마련한 환영만찬에서 만난 러시아영사와 악수하고 있는 정채호선장. 여러나라에 친구가 많아 민간사절이라고 부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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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코리아나호가 나가사키항에 정박해 있는 동안 견학온 일본 유치원생들과 교사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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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돌아와 요트협회를 창단(1983년)하고 협회장으로 취임했다. 당시 옵티미스트급 5명중 3명이 그가 길러낸 선수들이다. 그해 브라질 상파울루에서 열린 세계 옵티미스트급 요트선수권 대회 인솔단장으로 참가했었던 정 선장. 그는 전라남도 요트선수를 이끌고 전국체전에서 16년간 우승을 하기도 했고 아시안게임 금메달리스트를 여러 명 배출시켰다. 그에게 국내 유일범선인 코리아나호를 인수하게 된 동기를 물었다. 

"1994년도에 부산 해양대학교 요트부 동아리 담당교수로부터 코리아나호를 인수해달라는 제안을 받았어요. 네덜란드에서 건조한 코리아나호는 당시 세계 일주를 마치고 부산으로 들어와 리빌드(재구축) 중이었어요. 수리비용 때문에 압류가 돼 나를 만난 겁니다."

구매 상담이 오가던 중 민선 초대 여천시장에 당선됐고 당선 이틀 후에 코리아나호를 인수했다. 정채호 선장은 바다 사나이다. 여수에서 코리아나호를 타고 악명 높은 현해탄을 건널올 때 배가 심하게 흔들려 처음 범선에 승선한 나와 일행은 높은 파도에 심하게 흔들리는 배 때문에 불안에 떨었지만 밤새워 키를 잡고 레이다와 나침반만 보며 항해를 하면서 우리를 안심시켰다.

"불안해하지 말아요. 코리아나호 밑바닥에는 선저에 킬(keel)이라는 280톤짜리 납덩이가 있어서 배가 크게 기울어도 견딜 수 있을 만큼 복원력이 좋아요."

전장 41m에 총 톤수 135톤, 돛을 다는 마스트 높이가 30m인 코리아나호에는 폭이 100㎡에 달하는 돛이 11개나 된다. 맨 앞에 다는 제노아 돛을 포함해 모든 돛을 합치면 931㎡에 달해 3백 평짜리 논 한마지기의 넓이가 된다. 때문에 돛을 올리고 내리는 데 배에 승선한 모든 사람들이 함께 힘을 모아야 한다. 

"총 톤수가 135톤인데 납이 280톤이면 배가 가라앉지 않느냐?"는 물음에 "선저에 있는 납무게는 제외한다"라는 게 정 선장의 설명이다. 낙천적인 성격을 지닌 그는 항상 웃는다. 

"80세까지 코리아나 운영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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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가사키항에서 여수를 향해 현해탄을 밤새워 항해 중 망망대해에서 쉴 곳이 없는 바다새가 내 앞 1m 떨어진 레이다 상자 옆에 앉았다. 가뿐 숨을 쉬던 새는 '좀 쉬고 가게 봐달라'는 듯 나를 쳐다본 후 날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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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코리아나호가 나가사키항구를 떠나갈 때 일본인들이 환송하며 손을 흔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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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살면서 실제로 일어나지도 않을 미래에 대한 걱정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요즘 젊은이들한테 요트를 배우라고 권하면 '물에 빠지잖아요' 하면서 지레 겁만 먹어요. 도전하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초등학생 요트 동아리를 운영하는 회원의 말에 의하면 오후 5시가 넘었는데도 아이들이 집에 돌아오지 않으면 부모들이 득달같이 전화를 한대요. 혹시나 물에 빠지지나 않았을까 걱정해서요."

"여수시가 해양관광중심 도시라면서 요트마리나 계획도 없고 예산 배정도 하지 않는다"라면서 불만을 표시한 그는 "정부가 규제만 하려고 하지 말고 멀리 내다보는 정책을 펼쳤으면 좋겠다"라고 말했다. "나이가 있는데 언제까지 코리아나호를 운영할 계획인가?" 묻자 그는 이렇게 답했다. 

"미국 노인 헨리(88)씨가 혼자 요트를 타고 세계를 두 번이나 돌았고 지금도 항해 중입니다. 2만6500마일 이상을 돌아야 세계를 일주합니다. 현재도 바다에는 1만5000척 정도가 세계일주를 하고 있는 중이에요. 원래는 77세에 그만두려고 했는데 헨리를 만나고 나서 80세까지 코리아나를 운영하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나가사키항에 코리아나호가 정박해있는 동안 마사끼 야마구찌(67)라는 일본인이 코리아나호 모형을 만들어 정채호 선장한테 선물했다. 배모형 제작이 취미인 그는 코리아나호가 17년째 나가사키범선 축제에 참가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6개월에 걸쳐 제작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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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모형 제작이 취미인 마사끼 야마구찌(67세)씨가 17년간이나 꾸준히 범선축제에 참가하는 코리아나호를 기념하기 위해 6개월간 제작했다는 코리아나호 모형을 정채호선장에게 선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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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코리아나호에 달린 돛을 모두 합하면 3백평이나 된다. 돛을 올렸다 내리면 폭풍우에 견딜수 있도록 정성스럽게 정리해야 한다. 돛을 오르내릴 때는 몇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모든 승선원이 참가해야 한다. 사진은 정리작업을 지휘하는 정채호 선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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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사키시에서는 범선축제에 참가한 각국 대표단을 위해 환영만찬을 열어줬을 뿐만 아니라 50여 명의 민간인들도 10만 원씩을 부담해가며 코리아나호 승선자들을 위한 환영만찬을 열어줬다. 답례로 열린 코리아나호 선상파티에는 막걸리와 함께 구수한 불고기와 김치 및 과일을 제공했지만 가장 인기있는 음식은 김치였다. 

"어려운 길을 옆에서 묵묵히 도와준 아내한테 제일 미안하죠, 인생을 살면서 요트와 범선분야에서는 한국 최초라는 한 우물을 파 성공했다는 자부심이 있습니다"라고 말하는 정채호 선장의 삶이 아름다워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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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가사키에서 여수로 돌아오는 길에 만난 세찬 비바람속에서도 승선원들을 안심시키며 침착하게 코리아나호를 운전하는 정채호선장. 듬직한 모습에 감동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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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감동적인 대목은 나가사키에서 한국으로 돌아올 때 억수같이 쏟아지는 비와 바람을 맞으며 파도와 싸우는 모습이었다. 범선은 앞에 달려있는 돛을 보며 운항을 하기 때문에 뒤에 키가 있고 비바람을 맞으며 레이다와 나침반만 보고 운전을 한다. 

새벽 3시쯤 너무 졸려 다른 선원이 키를 잡고 운항 중일 때에도 그는 선실에 들어가지 못하고 흔들리는 뱃전에서 자고 있었다. 감동적인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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