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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산제 지내는 날 밤, 밖에 나가면 안 되는 이유

아직도 전통 당제를 지내는 돌산 군내리

  • 입력 2015.06.15 09:36
  • 수정 2017.03.08 04:20
  • 기자명 오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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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황사 삼신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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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제(洞祭) 또는 동신제(洞神祭)'는 온 마을사람들이 질병과 재앙으로부터 풀려나고 농사가 잘되고 고기가 잘 잡히게 하여 달라고 비는 것으로 건강과 풍농·풍어로 집약할 수 있다 - 다음 백과사전

호남 지방에서는 이를 '당산제' 혹은 '당제'라고도 부른다. 산업이 발달하고 개화가 이뤄진 지금은 거의 모든 마을에서 당제가 사라졌다. 요즘 젊은이들은 들어본 적도 없겠지만 내 어릴적에는 매년 섣달 그믐날 밤에 당산제를 지냈다.

지난 주말(6일) 아직도 당제를 지내고 있다는 군내리 성황사를 방문했다. 전라남도 여수시 돌산읍 군내리 동내마을 뒷산 정상에 소재한 '성황사'는 옥녀를 위한 제당이다.

구불구불한 마을길을 새로 고치고 포장하면서 옛 모습은 많이 사라졌지만 아직도 방답진성의 일부는 옛 모습을 간직한 채 남아있다. '동내마을'이라는 지명이 잘못된 것 같아 이곳 풍습과 당제에 얽힌 사연을 알려준 여수지역사회 연구소 박종길씨에게 물었다. 

"동네마을이 아니라 동내마을이 맞습니다. 성을 쌓으면서 성안에 있는 마을은 동내라 불렀어요. 성 밖의 지명에는 동외, 서외, 남외 등의 지명이 있습니다."

왜구의 침략에 시달리던 조선의 중종은 남해안의 해상 방어를 강화하면서 방답진성을 축성하고 성내에는 세 군데의 우물과 네 군데의 다리인 삼정사교(三井四橋)를 만들었다.

세 개의 우물을 가리키는 삼정은 군내리의 지세가 옥녀탄금혈(玉女彈琴穴)이기 때문에 옥녀가 목욕할 수 있게 만든 우물이다. 성황사의 유래에 대하여 추대엽 할아버지가 설명했다.

"이 마을의 지형이 옥녀탄금 형상으로 예로부터 마을의 부녀자들이 화를 많이 입었어요. 방답진을 설치한 이후에 성황사를 세우고 옥녀탄금혈에 모녀 삼신(소대각시)을 모셔서 부녀자의 재화를 면케 하였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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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수시 돌산읍 군내리에 있는 성황사 모습. 돌담에는 인동초가 꽃을 피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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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황사 정문 위에는 '성황사(城隍祠)'라고 쓰인 현판이 걸려 있다. 정문을 지나 들어가면 통나무로 지어진 세 칸짜리 남향한 기와집이 있는데, 중앙 현판에 영위당(靈位堂)이라 쓰여 있다. 내가 방문한 시간이 해가 저물녘이어서 인지 약간 으스스한 기분이 들어 섬뜩했다. 

본당의 중앙 칸에는 세 여신상이 선명한 빛깔의 한복을 입고 있고, 각 여신상 앞에는 종이컵이 놓여 있는데 예전에는 제기 위에 잔이 있었다. 여신상 우측에는 한지로 덮인 단지가 하나 놓여 있는데 그 속에는 쌀이 들어 있다.

박종길씨가 '옥녀'에 대해 설명을 이어갔다. 

"옥녀란 음기가 가장 센 여자로 풍수지리상 자손이 번창하거나 다산을 상징합니다. 옥녀가 거문고를 타는 형상이니 굉장히 좋은 자리입니다. 하지만 옥녀가 반드시 좋은 것만 의미하는 건 아닙니다. 남자가 죽거나 화를 당하기도 하잖아요? 따라서 옥녀의 나쁜 기운을 눌러주기 위해 삼신을 모셔서 부녀자를 보호한 거죠."

성황사에서는 방답진이 있던 시절 순몰한 수군 장병 20여 위를 봉안하고 지주신에게 이 마을에 사는 사람의 무사안녕을 기원하는 의식을 해마다 갖게 되었다고 한다. 해방 전까지만 해도 인근 마을의 무당들이 모여 이 당에서 굿을 하곤 했다.

동내마을에서는 매년 음력섣달 그믐날 밤 해질녘에 당제를 모신다. 이주안 이장의 말에 의하면 "제주는 군내리 대동회 총무가 제주를 맡고 당제에는 대동회 회장 총무와 4개 마을 이장이 참석한다"고 한다. 

제주는 당제 1주일 전부터 출타를 금하고 매일 목욕재계하면서 동제를 준비하는데, 금하고 지키는 규칙이 많았다. 먼저 자기 집 대문 밖에 대나무를 양쪽에 세우고 왼새끼 금줄을 치고 황토를 깔았다. 또 세 군데의 제장에도 금줄을 치고 황토를 깔아 잡인의 접근을 금하고 정화한다. 제장은 웃본산·백수·화약고 등 세 군데인데, 백수와 화약고에는 간소한 제물 몇 가지만 올린다.

매년 당제를 모실 때 단지 안의 쌀을 신곡으로 바꾸어 넣는다. 또 여신상의 좌측에는 자기로 만든 주전자가 놓여 있다. 중앙 좌측 칸에는 '성황지신(城隍之神)'이라 쓰인 위패가 놓여 있고, 그 앞에는 놋그릇에 밥·국·떡과 세 가지의 찬그릇이 있다.

중앙 우측 칸에는 15개의 위패가 나란히 서 있다. 여러 가지 원인으로 억울하게 죽은 사람을 신으로 섬기며 달래는 의미로 보인다. 저승문 앞에서 억울하지 않은 죽음이 없더라는 옛 이야기를 듣는 듯 그 내용이 재미있다. 한문이 약한 나에게 박종길씨가 위패에 적힌 내용을 해석한 글을 보내왔다.

억울한 죽음으로 귀신이 된 사람들을 달래기 위해 모신 성황사 삼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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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억울하게 죽은 위패. 죽음의 종류가 15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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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패에는 "싸우다 죽은 귀신, 물에 빠져 죽은 귀신, 절의를 지키다 죽은 귀신, 벼락 맞아 죽은 귀신, 형벌을 받아 죽은 귀신, 전쟁으로 죽은 귀신. 근심과 배고픔·추위 ·어리석음·염병 걸려 죽은 귀신, 추락해서 죽은 귀신, 난산으로 죽은 귀신, 처첩으로 인해서 죽은 귀신, 벌레에 쏘이고 짐승에 물려 죽은 귀신, 물과 불과 도적에 죽은 귀신, 압사당하거나 배가 불러 죽은 귀신(遭鬪歐而亡軀神 沒而無後神 危急節義神 震死神 陷刑辟而罪神 在戰陳而死國神 罹飢寒痴疫神 墜死神 産難死神 因妻妾而賴命神 遇蟲獸之螫齒神 以水火盜賊神 爲檣屋之頹壓漁饒而死神)"이라고 쓰여 있다."

행복한 삶을 살고 편안한 죽음을 겪은 사람은 좋은 귀신이 되지만, 그 반대의 경우는 인간에게 해를 끼치는 나쁜 귀신이 될 수 있다고 한다. 성황사 삼신은 억울하게 죽어 귀신이 된 사람들을 위로하기 위해 모셔졌다. 

제주 집에서 제물을 갖추어 준비하였다가 섣달 그믐날 밤 10시경에 제주 부부와 축관 등 세 사람은 제물을 가지고 본당으로 올라간다. 이때 마을 모든 가정에서는 근신하며 정숙한 분위기를 유지하여야 한다. 물론 거리에 통행하는 것도 삼가야 한다. 제물을 가지고 가는 길에 만약 사람을 만나면 그 길로 바로 다시 돌아와 목욕하여 정결히 한 후에 본당으로 올라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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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억울하게 죽어간 영령들을 위로한다는 영위당 현판 모습. 창호지 문을 열면 삼신이 모셔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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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어릴 적 동네 당산제를 지내는 날 밤에는 어른들이 "밖에 나가면 절대 안 된다. 제관 뒤를 호랑이가 따라 다닌다"고 해서 무서워 벌벌 떨었었다. 이처럼 금하고 지켜야 되는 규칙이 많지만 지금은 간소화하여 나름대로 몸가짐을 주의하면서 꼭 지킬 것만 지킨다고 한다. 

제사 음식은 본당에 먼저 진설을 한 후에 향불을 사르고 초헌을 하고 재배를 한다. 이때 토방 아래에 있는 돌에는 땅의 신에게 메를 올린다. 조금 있다가 독축을 하고 아헌과 종헌을 한 후에 제물을 땅에 묻으면 동제가 완료된다. 초헌(初獻)이란 제사를 지낼 때 처음으로 술잔을 올리는 것을 말한다.

대부분의 마을에서 당제가 사라지고 없지만 오랜 전통을 고수하고 있는 군내리 이장 이주안씨는 "민속 전통을 이어가는 당제를 위해 시에서 약간의 보조금이 나오지만 부족하니 더 많은 보조를 해주셨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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