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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도(安島)’ 어업전진지기지인 한반도를 닮은 천혜의 피항지

[이재헌의 섬, 섬, 섬] 안도

  • 입력 2015.09.06 16:35
  • 수정 2015.09.06 16:43
  • 기자명 여수넷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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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의 안도는 가장 인상에 남는 천혜의 조건을 골고루 갖춘 섬 중에 섬이다. 전국 최고의 피항지를 가진 천혜의 항구와 자갈밭 해수욕장과 백사장 해수욕장, 풍부한 해산물, 아름다운 경치, 역사와 민속과 문화를 가진 전국 최고의 마을이다.

게다가 2010년도에는 안도주민들의 숙원사업이었던 안도대교가 금오도와 장지와 안도를 연결하면서 안도에는 많은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안도대교로 인하여 가장 혜택을 받은 이들은 역시 안도주민들이다. 연도교로 인해 차가 직접 들어 올 수 있는 접근성이 매우 좋아진 안도는 더욱 더 서남해안에서 곽광을 받는 섬으로 발돋움하게 되었다.

이웃섬 금오도 비렁길이 전국적으로 갑자기 유명해지면서 주말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오게 되는 바람에 덩달아 안도까지 관광객 유입에 있어서 좋은 영향을 받게 되었다. 여러 섬을 여행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금오도 한 섬만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이미 만들어진 안도 상산 둘레길에서 돌아보는 여유를 가질 수 있다.

▲ 안도포구 전경

이름의 유래

'안도'라고 부르는 까닭은 2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섬의 형태가 기러기가 날아가는 모양과 같다고 하여 ‘기러기 안(雁)’ 자를 써 안도(雁島)라는 것이고, 또 하나는 1910년 편안할 '안(安)'자를 써서 안도(安島)로 바뀐 것이다.

안도가 사람들에 안전과 편안한 섬이 된 것도 2가지 의미가 있다. 배들이 안전하게 피할 수 있는 곳이라고 하여 안도가 됐다.

지형적으로 푹 들어간 섬 가운데 자연적인 호수가 만들어져 배들이 풍랑을 피해 들어올 수 있게 되어 있다. 이곳은 입구가 매우 좁고, 들어갈수록 넓어지는 S자형으로 되어 있어서 사람들은 이곳을 둠벙안이라고 부른다.

▲ 안도대교

역사가 깊은 섬 안도

안도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신석기 시대로 추정된다. 이를 입증하는 유물이 출토되었기 때문이다. 안도는 1992년 연구 조사에서 선사시대 유적으로 3개의 개무지가 확인되었다.

유물로는 질그릇 편들과 돌도끼, 대패날, 숫돌, 돌톱 등이다. 이곳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1500년경으로 정씨 내외가 제일 먼저 정착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리고 그 증거로 위패를 모신 제당이 있다는데 확인을 못했다.

통일신라 때 일본 승려 엔닌이 중국 당나라 불교를 공부하기 위해 떠났다가 845년 귀국하였다. 마르코폴로가 중국에 오기 4세기나 앞서서 일본인 승려 엔닌은 새로운 불교의 신앙의 깨달음을 찾기 위하여 위험한 역경을 헤치며 일본에서 중국으로 건너갔다.

예닌은 9년 이상이나 당나라를 여행하면서 『입당구법순례행기』라고 알려진 책을 썼다. 이 책에는 해상왕 장보고와 안도가 등장하고 서남쪽으로 제주도가 보인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엔닌이 안도에 기착을 하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2007년 해양수산부에서 어촌체험 마을로 선정된 안도를 오는 방법은 두 가지이다. 먼저 여수항에서 하루 두 번 있는 여객선이 있고 또 하나는 돌산 신기항에서 차도선을 이용하여 금오도 여천항에 내려서 가면 된다.

자가용을 가진 사람들은 거리가 가깝고 두 개 섬을 돌아 볼 수 있기 때문에 차를 가지고 가는 것이 좋다. 안도까지 차를 가지고 들어와 가장 먼저 들리는 곳은 배가 닿은 안도리 선착장이다.

▲ 낚시체험

선착장에서 내리면 마을로 들어가는 입구의 양쪽에 오른쪽으로 ‘한반도를 품은 호수 마을’이라는 표지석과 함께 커다란 종대가 버티고 서 있다.

표지석 중 하나는 동도와 서도 사이에 형성된 안도리가 한반도를 닮았다는 것을 알리는 표지석이고, 다른 하나는 1918년 안도 어업 협동조합이 처음 세웠던 풍향대이다.

현재는 GS칼텍스에서 2006년 기증한 풍향대가 바람의 방향과 속도를 관측, 풍어를 꿈꾸며 바다로 나가 어로 활동을 하는 어민들을 돕고 있다.

주민들은 이를 종대라고 부른다. 그 사이를 지나면 숨어 있는 마을과 배들의 대피항지가 나타난다. 이 수로를 타고 안으로 들어가면 하늘에서 바라보면 한반도를 닮았다 해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는 곳, 80여 가구가 거주하고 있는 안도리 모습이 제 모습을 드러낸다.

선착장 앞 해안에는 가두리 양식장과 양어장이 있다. 양어장과 이어지는 부교는 상당히 길다. 여기서 낚시를 하는데 다른 곳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풍경이다.

부드러운 S형 코스의 해변은 반원형 잔돌(몽돌)이 깔려 있어 걷기에 편하다. 오른쪽으로 꺾어진 길을 따라 가다 보면 관광객들을 위한 마을 입구에 당산으로 올라가는 길이 있다. 1992년도에 TV에 방영될 정도로 여러 가지 행사가 다양하게 치러졌다.

당산에서 제사를 끝내면 바닷가로 나와서 용왕제를 올리는데 그때 주민들도 함께 소원을 빌며 농악대를 따라 꽹과리를 치면서 주민의 안녕과 풍어를 기원한다.

선착장을 따라 오른쪽으로 조금 더 들어가면 왼쪽에 ‘안호정’이라는 정자가 있고 그 앞에 장방형의 자연석 비석이 한 기 서 있다. 해상 순찰 기념비인데 왼쪽부터 ‘八域要衝 趙東勳 南湖悍衛’이란 11자의 글귀가 새겨져 있다.

▲ 전복양식 그물 씻기
▲ 전복양식 그물 씻기

크기는 높이가 90㎝, 폭이 40㎝으로 훼손된 부분은 시멘트로 메워져 있다. 그 옆에는 설명을 알리는 표지석이 있다.

1896년 돌산군 초대 군수 조동훈이 안도에 들러 섬의 S자형 지세의 중요성에 감탄하고 호남을 방어하기 위해서는 조선팔도 중 안도가 요충지 중의 요충지라 하여 해안 경비를 다짐하는 뜻으로 세운 경구비란다.

원래 마을 입구 부둣가에 있던 것을 여러 차례 매립에 의해 이곳에 옮겨왔다는 내용도 적혀있다. 비석 옆에는 마을길이 있다.

이 해안을 따라 마을 안으로 계속 들어가면 배들이 제법 많이 정박해 있어 천혜의 대피항지임을 실감하게 된다. 안도는 남면 내에서 금오도, 연도에 이어 세 번째 큰 섬이며 다도해해상국립공원으로 지정되어 있다.

섬 내부는 가장 큰 산인 상산(207m)을기점으로 동·서·북으로 준령이 뻗어 내려 있다. 동도와 서도 사이 폭200m의 수로가 있는 이야포는 바닷물이 흐르는데, 1959년 사라호 태풍피해를 입자 방조제를 쌓았으며, 몽돌로 구성된 이야포 해수욕장이 형성되어 있다.

▲ 안도포구 전경

아름다운 해수욕장이 2개

또 다른 마을 동고지는 안도 마을과 가까운 거리에 있는데 동고지 마을로 가기 전에 물이 맑고 깨끗한 안도 해수욕장이 자리 잡고 있다.

구불구불 길을 따라 고개를 넘어 백금포 마을 해안에 가 닿으면 탁 트인 바다가 펼쳐진다. 여름철만 되면 모래가 어김없이 몰려와 넓은 백사장을 이루며 바닥이 평평해 해수욕하기에 적합한 곳이다.

하지만 해수욕장이라기보다 오히려 ‘고요한 침묵의 땅’처럼 느껴진다. 해수욕장은 길이가 300m에 폭이 약 20m 정도인데 하얀 모래가 너무 좋아서 일명 백금포 해수욕장이라 불리기도 한다. 해수욕장 옆에 동고지마을은 동쪽에 있다고 해서 동고지라고 부른다.

이것은 한때 멸치, 갈치, 문어가 잘 잡혀서 한 때 58가구 정도 살았으나 지금은 11가구만 살고 있다. 이곳 역시 해돋이 명소다.

안도는 안도 마을을 중심으로 서쪽 곶에는 60여 가구가 모여 있는 서고지 마을이 있으며, 동쪽 곶에는 동고지 마을, 마을 모습이 까마귀를 닮았다는 오지암 등 모두 150여 가구가 거주하고 있다.

안도 마을을 뒤로 하고 서고지로 향한다. 길은 가파르고 좁은 오솔길이다. 같은 섬 안의 안도 마을과 서고지는 3㎞ 정도 밖에 떨어져 있지 않음에도 ‘한 섬에 살아도 인근 섬보다 더 먼 이웃’으로 살아가고 있다고 한가파른 오솔길밖에 달리 길이 없기 때문에 통학 버스가 있을 리 없다.

그래서 학생들이 학교에 갈 때도 배를 타고 바닷길로 돌아가는 경우도 허다하다고 한다. 지금도 오후 한 차례 도선이 서고지에서 여수 나가는 손님을 싣고 안도항으로 달려 나간다.

서고지에는 아름다운 포구와 등대가 있다. 서고지의 어항은 국가에서 관리하는 3종 어항으로 육지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도서 벽지에 위치하여 어장의 개발이나 어선의 대피를 위해 만든 것이다. 여기에 가두리,정치망, 고기잡이배 등 비록 작은 동네이지만 바다와 섬이 갖추어야 할 것을 두루 갖추고 있다.

 

일본사람들이 탐 낸 안도 어장

천혜의 자연 경관과 대피항지의 완전한 모습을 갖춘 안도는 조선 시대부터 일제 시대, 해방 이후 그리고 근현대에 이르기까지 역사적인 시련과 자연재해의 피해 등을 셀 수 없이 겪어 냈다.

지관(地官)의 말을 빌리자면, 기러기 섬인 안도가 호랑이 섬인 금오도 앞에 있어 늘 근심과 걱정이 사라지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일본인들은 안도를 호시탐탐 노렸다. 안도의 이야포와 백금포는 멸치·갈치·도미 등이 많이 나는 지역으로 여수 바다의 황금 어장이었다.

조선 시대부터 왜구가 자주 드나들었던 길목으로 그들이 휴식하기도 했던 어장을 일제 식민지 시절 가만둘 리 없었다. 일본은 안도를 이주 어촌으로 선정하였다.

당시 이주 어촌의 가장 중요한 요소가 바로 어장 근처에 적당한 항만 시설이 있고 어획물을 판매할 수 있는 시장이 있어야 한다는 점이었다. 그렇기에 안도는 이주 어촌에서 빠질 수 없는 섬이었다.

결국 1919년 일본인이 다녔던 심상소학교가 지어졌으며, 서고지에는 어판장이 세워졌다. 이보다 앞서 안도에는 어업조합(마을 회관 옆자리)이 결성되었다.

우리 어업사에 ‘어업조합’의 등장은 큰 의미를 갖는다. 한국에 진출한 일본 어민들에게 어업권을 가지고 어업 활동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기회를 주었기 때문이다.

역사적인 아픔뿐만이 아니다. 1959년 사라호 태풍으로 안도리 구릉 중턱에 있던 집들까지 잠기는 피해를 입기도 했다. 1995년 7월 태풍 페이로 원유를 싣고 가던 14만 톤급 대형 유조선 시프린스호가 높은 파도와 태풍에 떠밀려 소리도 등대 서쪽 1.5㎞ 해상에서 무인도인 작도와 충돌하여 좌초되면서 많은 양의 기름이 바다로 유출되었다.

그로 인해 그동안 풍부한 수산자원과 다양한 농산물을 생산해 나름대로 넉넉한 생활을 했던 안도주민들은 삶의 모든 것을 순식간에 잃었다. 세월이 흐르면 생태계가 다시 복원되겠지만 그 피해는 고스란히 섬주민들에게 돌아와 상처가 너무 크다.

안도를 떠나는 배 안에서 역사를 곱씹으며 뱃길을 하염없이 바라본다. 갑자기 바람이 거세지면서 파도가 높아진다.

일제 강점기 풍부한 어족자원을 탐했던 무리들이 오갔을 이 뱃길. 좌우익의 갈등 속에서 피비린내나는 아픔을 바다에 묻고 사는 섬사람들. 이 바다를 터전 삼아 사는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할까.

●안도는 전라남도 여수시 남면에 딸린 여수 남쪽 34㎞ 해상에 있으며, 북쪽에 금오도, 남쪽에 연도가 있다. 면적 3.96㎢, 해안선길이 29㎞, 인구는 257가구 460명(2014년)이다.

●지명 유래 섬 모양이 기러기 같다 하여 안도(雁島)라 하였다고도 하고, 만 안쪽으로 선박이 안전하게 피항 할 수 있어 안도(安島)라 했다고도 한다.

●안도 가는 길

1. 여수항 여객선터미널에서 금오고속페리호 1일 2회 운항(소요 시간 1시간 40분)

-출항 시간 06:20, 14:30

2. 돌산 신기항에서 금오도 여천동을 통해서 오갈 수 있다. 1일 7회 왕복

●관광 명소

안도 해수욕장 해수욕장의 길이는 약 1㎞의 특징은 가는 모래로 입자가 아주 작고 반짝거리고, 바다는 매우 맑아 수심 약4m까지 보이는 청정 해역이다. 해수욕장은 아주 한적한 편이며, 해수욕장 뒤편으로해송이 우거져 있고, 그 뒤 약 약 2㎞ 정도 떨어져 마을이 자리 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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