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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치잡이 낭장망업에 적합한 멸치 생산지

[이재언의 섬섬섬] 횡간도

  • 입력 2015.10.12 09:19
  • 수정 2015.10.12 09:24
  • 기자명 여수넷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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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횡간도 전경

돌산 군내항에서 해동스타호를 타면 마지막으로 도착하는 섬이다. 횡간도는 월호도와 화태도, 두라도, 나발도를 거치면 그제야 모습을 드러낸다.

횡간도는 군내항에서 남쪽으로 11㎞ 떨어져 있으며 면적은 0.34㎢, 해안선 길이는 4.8㎞이며 중앙의 요망산을 정점으로 완만한 편이고, 요망산 기슭은 후박나무 군락이 있다. 횡간도의 이름에 대한 유래는 두 가지가 있다.

마을에서 서북쪽으로 위치한 돌산의 산 복지에 ‘복병끝’이라는 지명이 있는데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이 섬을 빗긴다 하여 ‘빗간이’라고 불려오다가 한자명의 ‘횡간도’라 명명하였다고 한다.

또 다른 한 가지는 임진왜란 당시 왜병들이 바다에서 화살을 쏘아댈 때 이 섬이 중간을 막아 그 화살이 빗겨 나갔다는 뜻에서 연유했다는 설도 있다. 사람이 처음 섬에 들어온 시기는 1626년 돌산에서 김윤동 씨라고 전해지며, 이후 진주 강씨와 달성 서씨 등이 이주하여 집성촌을 이루어 왔다고 전해 온다.

▲ 멸치 그물

민속신앙 관왕묘

횡간도에서만 만나 보게 되는 민속 중 ‘관왕묘’는 여수 지방에 유일하게 전해 오는 특별한 민속 신앙이다. 어업을 위주로 하던 섬사람에게 신앙은, 자연을 극복하고 삶을 이어나가는 없어서는 안 될 풍속이었다.

횡간도 마을 뒷산 중턱에 위치한 관왕묘(關王廟)는 중국 삼국 시대 촉한의 장수 관우를 모시는 사당으로 1888년경 김덕천씨 부친께서 서울에 갔다가 친구의 소개로 초상화 한 점을 얻어와 사당을 세웠고 이에 마을 사람들이 제사를 지내오다 일제 시대 때 주재소에서 칼, 초상화, 서책 등을 빼앗아가 일시 중단되었다.

그후 1914년경 김석천 씨와 추희조 씨에게 두차례나 현몽(現夢)하므로 초상화를 다시 제작하여 오늘에 이르기까지 관왕묘를 모시게 되었다 한다.

현재의 관왕묘 건물은 해방 후에 중수한 것이다. 횡간도의 북쪽 해변에는 ‘놀이청’이라는 넓고 평평한 바위도 있다. 예로부터 주변의 아름다운 경관을 보고 즐기던 곳이어서 이름 지어진 곳으로 1698년 좌수영의 수군절도사였던 유성채 수사와 방답첨사, 순천부사 등이 이곳에 들렸다 간 흔적은 지금도 바위에 암각되어 전해 온다.

횡간도 마을 가운데에는 울창한 당집 숲이 있는데 바다와 함께 생활하던 사람들의 자연을 경외하며 토속신에게 제를 올리며 마을과 가정의 무사안녕을 기원하던 섬사람들의 민속을 느낄 수 있는 흔적들이다.

▲ 멸치잡이 촬영

여수 최고의 부촌 섬

2010년 현재 주민은 대횡간도 69가구 156명이며, 이들은 대대로 낭장망 어업을 주업으로 삼고 있다. 횡간도 어촌계 회원은 현재 68명으로 1980년대 초부터는 어류 양식을 시작하면서 잡는 어업과 기르는 어업을 조화롭게 유지하여 1990년대 초까지만 해도 여수지역 어촌계 가운데 부촌으로 꼽혔다.

지금은 어획량 감소와 기름 값 인상 등으로 다소 어려움을 겪고 있으나, 여전히 마을은 활기가 있다. 특히 비교적 조류가 빠른 횡간도와 화태도 사이, 돌산도와 횡간도 및 소횡간도 사이 해역에 낭망장 40여 틀을 설치해 두고 멸치잡이를 하고 있는데, 낭장망은 바다 표면과 해저 사이 중간쯤에 설치하는 어구로, 주 어종은 멸치이다.

어획량이 많은 시기는 봄부터 가을까지 멸치를 잡는다. 가장 많이 잡힐 대는 음력 보름과 그믐을 전후해 10여 일간이다. 이때 조류가 빨라지면서 떼 지어 다니는 고기들이 그물 안으로 몰리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잡은 멸치는 주민들의 오랜 경험을 바탕으로 상품화돼 고가에 팔려 나간다. 멸치를 적당히 소금을 넣어 끓인 물에 일정 기간 삶은 뒤 마을 앞 건조장에서 햇볕에 건조시킨다.

선착장 포구에서는 횡간도의 명물 마른 멸치를 살 수 있다. 한상자(1Kg)에 15,000원이라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멸치가 그렇게 풍족하지 않다고 한다.

또한 어민들은 80년대 초부터 낭장망에서 잡힌 값 낮은 ‘잡어’를 먹이로 가두리 양식업을 시작했다. 마치 텃밭처럼 펼쳐진 마을 앞 가두리 양식장은 어류 1백여 만 마리를 기를 수 있다. 여기에는 주로 조피볼락(일명 우럭)을 넣어 기른다.

어민이 직접 잡은 생사료를 주 먹이로 하고 있어 다른 지역에 비해 양식 비용이 절반 수준이다. 배합 사료를 전혀 먹이지 않아 고기의 육질이 쫄깃쫄깃하고 매운탕을 끓일 경우 국물이 구수하다.

▲ 횡간도 분교장 학생

유명한 낚시터

돌산 대교가 없던 시절에는 여객선을 타고 한참 가야 했던 섬이지만 이제는 돌산 군내항에서 하루 다섯 번 왕복 운항하는 해동스타호를 타면 한 시간 반이면 갈 수 있는 섬이다.

돌산 금성리에서 사선을 타면 십 분거리밖에 되지 않는다. 주변 청정 해역에 다양한 어류가 서식하는데 『조선왕조실록』에는 횡간도에 잠수군을 두어 전복이나 해산물을 진상하게 했던 기록도 보인다.

특히 횡간도는 두 개의 섬 주변이 천혜의 갯바위 낚시터여서 전국에서 낚시꾼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횡간도 남동쪽은 낚시꾼들의 감성돔과 꽁치 갯바위 포인트로 매우 유명하다. 일부 어민들은 요즘 마을 앞 바다에서 갯장어(일명 아나고, 하모)도 잡고 있다. 주말과 공휴일엔 하루200여 명, 평일에도 100여 명씩 찾고 있다.

▲ 멸치말리는 광경

섬 둘러보기

해동스타호를 타고 횡간도에 가는 여정에 오른다. 한참을 가다 보니 오른쪽 무인 등대와 갯바위 섬을 끼고 안으로 들어가니 포구가 나온다. 바로 횡간도(橫干島)다. 바다 건너 북쪽으로 돌산 금성, 서쪽으로 화태도, 남서쪽으로 나발도와 소두라도가 있다.

배에서 바라보면 조그마한 산 정상에서 서북쪽으로 완만한 경사를 이루어 마을이 형성되어 있고, 동남쪽으로는 지세가 험하다.

횡간도는 화태도와 돌산의 신기리와 금성리의 파도를 막아 주는 파도막이 섬이다. 횡간도 너머는 멀리 거문도와 제주도로 이어지는 넓은 바다이다.

이 섬은 장구 모양의 작은 섬으로 바람이 불면 섬 안쪽에 옹기종기 모인 섬들을 대신하여 처음으로 거센 파도를 맞는 곳이다. 횡간도 선착장에는 대합실이 하나 있고 그 주위로 커다란 송전 철탑이 있다.

멸치 말리는 풍경이 보이고 공장에서는 희뿌연 연기가 모락모락 흘러나온다. 멸치를 삶는 모습이다. 마을에 들어서면서부터 널려 있는 어구들이 눈에 띈다.

그물 규모로 만 봐도 어장 규모는 상당히 큰 듯하다. 마을 주민들은 낭장망 어업을 예

로부터 해 왔는데 어장 관리법이 개정되어 현재는 어촌계가 곤란에 빠져 있단다. 둥근 물양장을 끼고 안으로 들어가면 왼쪽은 집들이 모여 있는 마을이고 오른쪽은 바닷가 포구 안이다. 이 길이 횡간 해안길이다.

이 길을 따라 안쪽으로 조금 더 가면 오른쪽으로 횡간리사무소가 있다. 붉은 벽돌의 2층으로 아담하게 지어진 사무소다. 이곳은 길이 좀 복잡하다. 마을이 오밀조밀하게 되어 있어 중앙길부터 정자길 등 몇 개의 길이 미로처럼 나 있다.

그러나 결국은 서로 만나게 되어 있을 정도로 좁은 동네이기도 하다. 횡간 해안길을 계속 걸어가면 오른쪽에 교회가 있다. 바로 횡간 교회다. 1981년에 세워졌다. 여기서부터는 집이 드물다.

해안을 계속 따라가면 마을 끝자락으로 역시 학교 건물이 보이는데, 이곳이 화태초등학교 여동분교이다. 섬의 쇠락에 따라 1990년에 다시 분교로 격하되었다. 교사와 부속 건물로 이루어진 이 학교 운동장은 곳곳에 잡초들이 무성해 마치 폐허처럼 보인다. 그만큼 운동장 사용이 뜸하다는 이야기이다.

5년 전에 방문 당시에 전교생은 여섯 명에 목사님 아들, 진료소 소장님 아들, 선생님 아들들이 다니고 있었다. 작년에 다시 와보니 수아라는 여학생 1명이 혼자서 외롭게 공부를 하고 있다. 학교 오른쪽으로 길이 있지만 이 길은 밭으로 가는 길이다. 더 이상 집은 없다.

시멘트 길을 따라 올라가면 산 능선이 나온다. 안부 지점으로 오른쪽은 산이다. 산 아래는 온통 밭이다. 그리고 바닷가 아래로 내려가면 자갈밭이 나타난다. 반대편 바다가 보이고 저 너머 소횡간도가 보인다.

▲ 멸치잡이 체험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후박나무 군락

해변 오른쪽에 보면 제법 넓은 공간의 시멘트로 단이 보인다. 마을 뒷산에는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약 6천 평 정도의 후박나무 군락이 있다.이 나무들은 높이 20m, 둘레 2.5m 정도의 거목으로 모두 20여 주가 나란히 임립하여 섬의 풍치를 돋보이게 하고 있는 것이다.

분교 왼쪽으로는 방파제 가는 길이다. 가는 길 오른쪽에 보면 단층짜리 현대식 건물이 보이는데 제당이라고 한다. 근처의 건물들은 거의 낡은 건물들로 창고로 사용되는 것들이다. 벽면에는 아직도 ‘멸공’이라는구호가 새겨져 있다.

정자 길로 해서 골목길로 들어간다. 미로처럼 이어진 길이지만 새로 만든 도로 표시판이 잘 되어 있어 찾기는 쉽다. 이 길을 따라 들어가면 길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데 왼쪽으로는 산으로 올라가는 길이고 직진은 밭으로 가는 길이다.

마을 끝자락 밭이 시작되는 지점에 커다란 나무 한 그루를 볼 수 있다. 수령이 수백 년은 되는 나무다. 이 나무의 북쪽 가지가 무성하면 위쪽 시절이 좋고 남쪽가지가 무성하면 아래쪽 시절이 좋다고 하는 보호수로 수령은 약 500여 년, 수고 35m, 흉고 4.5m이라고 한다. 옆에는 우물터가 있다.

밭에 올라서면 마을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뒤로는 온통 밭이고 밭 이곳은 포구가 상당히 넓다. 물론 영역은 세 부분으로 나뉜다. 선착장이 있는 포구가 중심이고 좌우로 포구가 있다. 그리고 중심 포구 역시 형태는 특이하다. 사반원형의 형태를 하고 있다. 즉 원형의 4분지 1의 모습이다. 그 안에 방파제만도 네 개나 들어 있다.

이곳에 주로 배들이 정박 해 있다. 선착장에서 왼쪽을 바라보면 철탑 아래로 길게 이어진 자갈밭이 있다. 그리고 그 끝자락에 등대가 있다. 자갈밭. 걷는 게 보통 힘든 게 아니다.

주변은 물기가 촉촉한 자갈들이 널려 있어 미끄럽기까지 하다. 그 주위로 갈매기들이 모여 있다. 군락을 이루고 있는 갈매기 떼들이 눈을 즐겁게 한다. 물이 많이 빠질 때에는 노란 등대까지 이어진단다. 등대 주위로 몇 개의 갯바위가 있는데 그 주위에도 갈매기 세상이다. 아주 평화로운 모습이다.

끝까지 가 보지만 낚시꾼 몇 명이서 낚시만 할 뿐 역시 등대까지는 연결이 되지 않아 가보지도 못하고 발길을 돌린다.

 

횡간도 개요

●횡간도는 전라남도 여수시 남면에 딸치하며, 돌산읍에서 남쪽으로 1.5㎞ 떨어진 곳에 있다. 면적 0.34㎢, 인구는 69가구 156명(2010년)이다.

●지명 유래 대횡간도의 이름에 관련된 유래는 두 가지가 전해 오고 있다. 돌산 신복리에 ‘복병끝’이라는 지명이 있는데 풍수지리설에 따라 이 지역을 빗긴다 하여 ‘빗간이’라고 불러 오다 빗길횡간(橫干)이라 하였다고 한다.

또 하나는 임진왜란때 왜병들이 바다에서 화살을 쏘면 이 섬이 막고 있어 빗겨 나갔다 하여 횡간이라하였다고 전해 온다.

●횡간도 가는 길 여수시 돌산읍 군내항에서 차도선 해동스타호 1일 5회 왕복 운항(소요 시간 50분)

●관광 명소

관왕묘(關王廟) 남면 대횡간도 마을 뒷산 중턱에 위치한 관왕묘는 대횡간도에서만 만나 보게 되는 여수지방에 유일하게 전해 오는 특별한 민속 신앙으로 삼국지의 영웅인 관운장을 주신으로 모시고 있다. 조선 말엽부터 마을 사람들이 사당을 건립하여 제사를 지내오고 있다.

일제 시대 때 주재소에서 칼, 초상화, 서책 등을 빼앗아 가버려 일시 중단되었다가 1914년경 김석천 씨와 추희조 씨에게 두 차례나 현몽하므로 초상화를 다시 제작하여 오늘에 이르기까지 관왕묘를 모시게 되었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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