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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의 증오를 내려놨다

날 교직에서 파면시키겠다던 교장의 명복을 빌다

  • 입력 2015.10.21 09:45
  • 기자명 오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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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병철 선생님은 나에게 변화를 권하며 꽃이 되면 나비가 되어 춤추겠노라는 편지를 보내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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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oo 별세. 광주 oo병원.'

퇴직 후 집에서 지내는 내게 메시지 한 통이 왔다. 지난 15일이었다. 후배가 보낸 메시지를 보자마자 욕을 했다. 분노의 욕을 뱉은 후 한 마디 덧붙였다.    

"천년만년 살 것 같더니, 말 한 마디 않고 가?"

상스런 욕을 했지만, 허탈했다. 망자가 죽기 전 한 마디 하고 갈 것 같은 생각에 행여나 하고 기다리던 중이었다. 옆에 있던 아내가 눈을 크게 뜨고 다가와 물었다. 

"왜 그래? 여보! 무슨 일 있어? 조용하던 사람이 웬일이야?"
"이 메시지 좀 봐. ooo이 죽었네. 천년만년 살 것 같이 기고만장하더니."

나를 투사로 만든 사람

가난했지만 형제들과 싸움 한 번 안 하고, 욕도 안 하고 살았던 내 입에 욕을 붙여준 사람. 내게 인간에 대한 증오를 심어준 사람. 분노로 치를 떨며 복수를 다짐했던 사건이 발생한 지 올해로 정확히 10년째다.

내가 근무했던 학교는 전라남도 여수시에 위치한 한 사립 중학교였다. 사립인지라 이사회의 제청으로 이사장이 교감 승진자를 결정한다. 사건이 일어나기 2년 전인 2003년, 그 때 부터 교사들은 혁신학교를 만들자며 그 방안 중 하나로 인사시스템 개정을 논의했다. 

인사위원회에서는 당시 청와대가 실시했던 인성다면평가를 도입했다. 전국 어떤 사립학교에서도 도입하지 않았던 방식으로, 120문항을 이용해 후보자를 평가하고 교장·교감을 비롯한 전 교사가 참여했다. 논의 과정 중에 관리자 평가 점수가 낮다는 지적에 교장·교감 점수(40점)과 나머지 교사 점수(60점)를 합해 평가했다. 

후보자들의 평가 결과가 비슷하면 교장·교감이 얼마든지 좌우할 수 있었다. 인성다면평가 결과 점수를 제외하면 나머지는 공립과 동일한 평정 점수를 부여했다. 2005년 연말의 일이다. 학교에서는 차기 교감 승진 자격연수대상자 선정을 위한 작업에 들어갔고, 이사장과 상임이사가 3명의 후보자를 면담했다. 

교장은 5일이 지나고, 10일이 지나도 결과를 밝히지 않았다. 교사들 사이에서 흉흉한 소문이 나돌기 시작했다. 평가 결과가 입소문으로 퍼져 나가고 의구심이 커져가던 보름 후, 교장이 결과를 발표했다. 그런데 1위가 아닌 2위를 교감 후보로 선정했다. 뻔히 다 아는 결과를 뒤집은 이사장과 교장의 처사에 분노한 교사들은 서명을 하고 이의신청서를 작성해 이사들을 찾아갔다. 

당시 충격에 싸인 교사들과 교장은 충돌했고 학교는 걷잡을 수 없는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이사장 명령에 불복한 교사는 파면하겠다고 엄포를 놓았지만, 분노한 교사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내 등을 떠밀었다.

"형님! 학교를 혁신하고 인사를 바로잡으려는 지난 2년 동안의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고, 우리를 비웃고 있는데 가만있을 수 없습니다. 교장실에 가서 결과를 확인하고 오세요."

교장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그들은 "네 까짓게 감히?"라는 식으로 비웃고 있었다. 피가 거꾸로 솟았다. 결과는 내가 1등이었고, 그것도 2등과 8점이나 차이가 났다. 교사들은 안다. 교사 평가는 소수점 3자리부터 시작한다는 걸. 8점이면 하늘과 땅 차이다.

울분을 터뜨리고 있던 내게 지인으로부터 제보가 들어왔다. 

"저것들 이틀 전에 이미 끝내버렸어요."

그날 밤 잠 한숨 못 잤던 나는 다음날부터 한복을 입고 수염을 기른 채 출근했다. 한복 차림으로 아무말도 안 하는 나를 본 교사들은 항명을 하며 집단 서명을 시작했고, 기자들이 학교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힘이 없어 당했지만, 결코 불의에 질 수는 없었다. 매일 아침 제일 먼저 출근해 교장실 앞에서 "밤새 안녕하셨지요?"라고 묻고는 교실로 돌아와 아무 말도 안 한 채 근무했다. 10여일 동안 교장실 앞에서 시위를 하자, 그는 출근도 못하고 교장실 주위를 빙빙 돌았었다. 그가 너무 미워 죽기를 바란 적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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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촛불은 자신을 태우며 주위를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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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삶이 짓밟혔다는 스트레스로 나는 역류성식도염에 걸리기도 했다. 기진맥진해 있던 나를 향해 아내가 원망스런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게 내가 교장 찾아간다고 했을 때 말리지 말지!"

아내가 처음부터 이런 말을 했던 건 아니다. 도리어 나를 파면하려한다는 소식에 아내가 울면서 말했다. "걱정 말고 나쁜 놈들하고 싸우라"고 응원하던 아내가 오죽했으면 저런 말을 할까? 교장이 정말 미웠다.  

원망스러웠다. 100여 일 동안 분에 떨던 나는 힘을 갖고 싶었다. 좋은 분들과 교류하고 연대해서 싸우고 싶었다. 이를 악문 나는 그때부터 시민단체에 합류하고 본격적으로 사회로 뛰어 나갔다. 가까이 지내던 <오마이뉴스> 시민기자가 "형님, 그 억울한 심정을 기사로 써보라"고 권유해 기사를 송고하는 방법을 배웠다.

나를 짓밟았던 이사장은 우리나라 굴지의 대기업 임원을 겸한 사람이었다. 나를 도와줬던 변호사가 "선생님 싸워봅시다, 정당성에서는 무조건 이깁니다"라고 권했지만, 또다른 은인인 제보자를 보호하기 위해 법정 싸움을 신청하지는 않았다. 

결심을 굳힌 나는 지난 2006년 8월 15일에 나를 짓밟았던 이사장에게 편지를 썼다.

"오늘이 광복절이네요. 나는 당신의 종속변수가 아닌 독립변수입니다. 당신이 나를 권력으로 누를 수는 있어도 내 영혼은 누를 수 없습니다."

명령에 불복했다는 이유로 나를 파면하겠다고 겁박했던 사람들의 베일이 하나하나 베껴지면서 소문이 나기 시작했다. <오마이뉴스>에 글을 쓰는 동안 내 앞에서 전전긍긍하던 그들의 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사이 내 건강도 악화됐다. 이제 막 건강이 돌아오기 시작했는데, 며칠 전 그가 세상을 떠났다.

'대한민국이 이 정도로 정의롭지 못한 나라였던가?'

이런 한탄을 하며 호주로 이민가려고 했지만 아내의 반대로 주저앉았던 나. 이제 서서히 건강이 돌아오자 그에게 전화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마주보고 차 한 잔 하며 마음의 짐을 내려놓고 싶었다. 그런데 내게 말 한 마디 없이 가버렸다. 그가 마음 편히 세상을 떠날 수 있는 기회를 놓친 거 같아 안쓰럽다. 용서를 빌면 용서해주겠다고 결심하고 기다리고 있었는데...  

"잘못했다"는 망자의 부인, 가슴이 뻥 뚫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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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에게 많은 가르침을 주신 이병철 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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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오와 스트레스로 아파하던 나를 바꿔준 분이 있다. 이병철 선생은 1949년 경남 고성에서 태어나 유년시절을 통영에서 보냈다. 부산대학교에 다니던 중 1974년 민청학련 사건으로 구속되었고, 감옥에서 나온 뒤 본격적으로 농민운동을 시작했다. 

가톨릭농민회 사무국장과 87년 민주쟁취국민운동 조직국장 등을 역임했으며, 우리밀살리기운동을 처음 시작했다. 우리농촌살리기운동, 생협운동 등에 힘써 오면서 녹색연합 공동대표, 녹색대학 상임이사로 일했다. 

요즘은 환경운동연합, 한살림, 생태산촌만들기, 생명의 숲 국민운동 등 생태와 환경을 위해 노력하는 모든 단체에 두루 도움을 주고 있다. 전국귀농운동본부 상임대표를 역임하고 현재 생태귀농학교 교장으로 지내며 생명평화결사운동을 이끌고 있다. 아래는 이병철 지리산생태영성학교 교장이 내게 해 준 말씀이다. 

"저는 40년 동안 저항과 투쟁, 분노의 인생을 살았습니다. 세상에 대해 분노하고 투쟁하는 것이 사랑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세상을 위한 분노는 다른 사람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라고 정당화시켰죠. 하지만 저항을 통해서는 마음의 평화가 오지 않았어요. 그런데 어느 날인가부터 혁명이 세상을 변화시키리라는 생각보다 기도가 효과가 크다는 믿음이 생겼습니다."

지금까지는 마음이 행복해야 미소를 짓는다고 생각했지만, 우리가 미소를 짓기 때문에 행복해 진다고 주장한 이병철 선생이 기도를 해야 하는 이유에 대해 설명을 이어갔다.

"가슴은 사랑을 만들어 갑니다. 가슴이 막히면 에너지가 흐르지 않습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가슴이 열리는 게 아니라 가슴이 열렸기 때문에 사랑이 일어나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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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법 스님과 함께 계시던 이병철 선생님이 보내주신 일몰 사진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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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철 선생님이 허탈해 하는 내게 직접 쓴 시 한 편을 보내왔다. 

<바다를 보네>

미룰 수 없는 것이라면 더 미련 둘 건 없지
부음 받고 빈소에 왔다가 바다를 보네
바다는 늘 하늘빛을 닮지
오늘은 바람 빛이 맑아 바다 물빛도 푸르네
어느새 사방 가을 빛 스며드는 데
지금 여기서 나는 누구를 기다리나 묻네
잘 가시게
가벼울수록 더 쉬이 나는 법 
이번 생이 무거웠으니 가는 길은 훨훨 가뿐하시게 
돌아보지는 말게 남은 것은 남은 자들의 몫
저 파도소리는 마음 빛을 닮는가
내 가슴에도 가을빛 짙어진 모양이네
아직도 누군가의 위로가 필요한가
안아달라며 보채네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기어이 조문을 갔다. 장례식장을 수백 번 방문했지만, 심사가 이렇게 복잡한 적은 없었다. 사진 속 망자는 웃고 있었다. "잘가시오!" 하고 절을 올렸다. 그리고 상주와 절을 하고 일어섰다. 망자의 부인이 눈물을 글썽이며 내 손을 잡았다.

"선생님 죄송해요. 죄송해요. 선생님이 여기 오실 줄은 꿈에도 몰랐어요. 잘못했어요. 정말 잘못했어요."
"예! 이제 좋은 곳으로 가라고 빌어 드렸습니다."

광주에서 여수로 돌아오니 밤 11시다. 밤하늘을 보았다. 가슴 속이 뻥 뚫리고 별이 총총이 빛나고 있었다. 10년 만에 느껴본 별난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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