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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문도 토박이 사람들의 섬, 동도(東島)

[이재언의 섬섬섬] 거문도 동도-1

  • 입력 2015.10.29 09:07
  • 수정 2015.10.29 09:10
  • 기자명 여수넷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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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근 개통한 거문도 서도와 동도를 연결하는 거문대교

‘남해안의 비경’이라 일컫는 거문도는 여수와 제주를 잇는 항로의 중간 해역에 있다. 서남쪽으로 동지나해를 바라보고 동쪽으로는 일본 구주의 오도열도를 마주본다. 그리고 여수항에서 남쪽으로 114.7㎞ 가량 떨어진 외딴섬으로 2시간 이상이 걸린 기나긴 거리다.

그러나 사면이 큰 바다에 둘러싸여 있지만 섬 세 개가 원을 그리듯 모여 있어 동쪽의 동도와 서쪽에 위치한 서도 및 고도가 둘러싼 내해는 파도가 잔잔하고 수심이 깊어 섬 안으로는 파도 없는 천연의 양항이다.

동도는 바다를 가운데 놓고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는 거문도를 이루는 3개의 섬 가운데 하나로, 규모가 면적 3.42㎢, 해안선 길이 12.5㎞이다. 동쪽에 있는 섬이라 하여 붙여진 ‘동도(東島)’. 세 개의 섬 중에 두 번째로 큰 섬이지만 거문 군도 중 가장 낙후된 섬으로 사람들이 그렇게 많이 찾지도 않는 그런 섬이다.

고급 어족이 풍성한 황금 어장터이나 세 섬 중에서는 가장 인구가 적다. 하루 두 차례 있는 쾌속선 역시 아침 배만 기항한다.

섬의 오른쪽으로 삼도 중 가장 높은 망향산(246m)이 있다. 왜 하필 망향산이라 했을까? 사극에는 당파 싸움의 희생양은 절해고도에 귀향을 보내는 장면들이 더러 나온다. 절해고도(絶海孤島)란 육지에서 아주 멀리 떨어진 외딴섬을 의미한다. 혹 고향을 등진 사람들이 와서 고향을 보기 위해 올랐던 산이라서 망향산이라 하지는 않았을까.

‘망향산(望向山)’은 산세가 굴곡이 없어 곱게 생기면서도 산꼭대기의 모양이 칼날같이 우뚝 서있어 사방 어디서나 그 바라보는 위용이 당당하며, 어디서나 바라볼 수 있는 산이다.망향산에 올라서니 고도와 서도, 백도, 초도가 한눈에 들어온다.

동도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360여 년 전으로 충주 추씨, 경주 김씨, 밀양 박씨들이 들어와 마을을 이루고 정착했다고 한다. 또 임진왜란 때는 왜구의 노략질을 막기 위해 별장 1인과 농로군(노를 젓는 수군)460여 명을 이곳에 두어 방비하기도 했다.

 

동도의 특징은 외지에서 들어와 사는 사람이 없고 모두 본토박이들이라는 점이다. 그만큼 사람들이 순박하고, 포근한 인정을 느끼게 한다. 주민들은 농업과 어업을 겸하고 있으며, 돌미역이 특산물이다.

여객선에서 내려 부잔교를 건너 선착장에 들어서면 왼쪽에 대합실이 있다. 그리 길지 않은 선착장. 방파제에서 길은 양쪽으로 갈린다. ‘동도길’로 양쪽 거리가 서로 비슷하다. 오른쪽은 죽촌마을이고 왼쪽이 유촌마을이다.

동도는 마을이 서쪽 해안에 입지한 유촌마을과 죽촌마을에 집중되어있다. 외지에서 들어와 사는 이가 없고 본토박이들만이 생활하고 있어 가장 순박하고 포근한 마을이기도 하다.

‘죽촌(竹村)마을’은 옛부터 마을 주위에 대나무(竹)가 무성하여 죽림(竹林)이라고도 하고 대추라고도 불렀으며 ‘유촌(抽村)마을’은 황금같은 유자 색깔이 삼호(현 거문도 내항올 일컬음)의 물가에 아롱거릴 정도로 유자나무가 많은 것에 유래한다.

유촌마을로 가는 시멘트포장 해안도로를 타고 얼마를 걸어가면 도로보수 공사가 진행 중이다. 다리공사의 연장이다. 마을 입구 오른쪽으로 골목길이 있다. 초등학교 가는 길로 ‘유촌1길’이다. 골목을 돌아서면 계단이 나타나고 그 계단을 타고 오르면 양쪽 기둥이 있다.

 

이곳이 거문초등학교 ‘동도분교장’이다. 동도분교는 1925년 동명학원으로 시작되었다고 한다. 1930년 4월 사립 보통학교의 인가를 받아 설립·유지되다가 1941년 6월 공립학교로 승격되었다. 그리고 1945년 11월에 거문국민학교로 문을 열었지만 1988년 3월에 동도분교장으로 거문초등학교에 편입되었다. 현재 2학급에 2명의 학생이 다니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왼쪽 기둥에는 ‘동도길 99’이라는 도로명주소표지판이 부착되어 있다. 이 기둥 뒤로 하얀 석고로 된 편안한 자세의 책을 읽는 모습을 하는 ‘책 읽는 소녀상’ 조형물이 있다. 운동장은 제법 넓은데 교사는 한 단계 높은 지대에 위치해 있다. 높이도 3미터는 족히 될 상당히 높은 편이다.

가운데에 교실이 있고 오른쪽으로 부속건물이 나란히 배치되어 있다. 그 외 부속건물들은 교실 뒤편으로 몰아두었다. 그러나 학생들이 없는지 학교 분위기가 너무 조용하다. 이미 시간은 10시를 바라보고 있는 시각인데. 그러고 보니 토요일이다. 요즘 5일제수업이라고 하지 않던가.

운동장에서 담장 밖을 보면 서도가 한 눈에 들어온다. 고도를 중심으로 서로 나란히 바라보고 있는 두 섬이다. 학교 뒤에 있는 산이 망양산. ‘망양산(望洋山)’은 옛날 주민들의 생활이 궁하여 울릉도에 미역을 채취하러 다닐 때 몇 달만에 돌아올 남편을 기다리며 바라보았다고 하는 산이다.

스탠드 사이로 3개의 계단이 있으며 가운데는 운동장 단상이 있는 곳으로 그 뒤로 교실로 가는 중심계단이고 좌우로 좁은 계단이 있는데 왼쪽에 있는 계단 옆으로 이순신 장군 동상이 있다. 낮은 동산 위에 조성된 동상인데 거북선과 함께 장군의 활약상을 그린 기록화인 전투도가 새겨져 있다. 충무공의 시선은 서도를 향하고 있었다.

학교 옆으로 유촌교회가 자리하고 있다. ‘유촌교회’는 1959년 4월 한 가정집에서 창립된 교회로 역사가 상당히 길다. 분교 후문으로 나가면 옆으로 길이 있는데 돌담으로 둘러싸인 경내가 나타난다. 돌담 위에 기와를 두른 것으로 보아 사당인 듯싶다. 아니나 다를까 바로 ‘귤은사당’이다. 이곳 출신으로 근세 유학자로 활약한 김유 선생 유적이다.

주위로는 낮은 담장이 둘러져 있다. 영역은 두 개로 나누어져 있다. 입구에 외문인 ‘필무문(必武門)’이 있고 이 문을 들어서면 왼쪽에 비석이 세워져 있다. ‘거유귤은김유선생행장비’다. 내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가면 바로 사당. 부지 면적 약 330㎡, 건축 면적 13.2㎡이다. 앞면 3칸, 옆면 1칸 규모의 기와집 형태이다. 가운데에 ‘거문사’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그러나 전통적인 그런 사당이 아니다. 세 곳에 유리문이 있으며 가운데는 쌍미닫이 문이, 양쪽에는 외미닫이 문이 있다. 이 사당도 새로 건립을 추진 중이라고 한다. 오른쪽의 문을 열고 안을 들여다보니 일반 가정집 같은 바닥에 장판을 깔았다.

한 가운데에 제단이 있는데 작은 병풍에 김유가 쓴 글이 있다. 오른쪽은 탁자가 있고 제기가 놓였다. 3면의 벽면에는 글을 새긴 현판들이 있고 오른쪽에 기정진의 후손인 기우몽(寄宇蒙)이 썼다는 ‘귤은당(橘隱堂)’이라는 현판이 눈에 들어온다.

안내문에 의하면 김유 선생(1814-1884)의 호는 귤은(橘隱)이고 자는 사양으로 1814년 이곳 유촌리에서 태어나 어려서 전남 장성에 나아가 조선조 6대 성리학자로 손꼽던 노사(蘆沙) 기정진에게서 학문을 익혔다.

그리고 당시 50세에 600여 호가 사는 고향 마을에 돌아와 후학을 양성하였는데, 선배인 만해(晩海) 김양록과 함께 낙영제를 중심으로 영재교육에 힘쓰니 멀리 영암, 장성, 완도 등지에서 선생의 학덕을 흠모하던 제자들이 구름같이 모여들어 한때 거문도는 북학의 발생지인 양 대성황을 이루었다고 한다. 귤은 사당은 그의 제자 박규석 등이 1904년에 후학들을 위해 그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세운 사당이다.

서양세력이 조선 근해에 자주 출몰할 무렵인 1854년 4월에 러시아의 푸자친(Putiatin) 제독이 이끄는 ‘러시아 함대의 거문도 기항사건’을 직접 목격, 이후의 사건들을 <해상기문>에 자세히 기록했다. 한편 김유는 이곳 거제도의 지명 유래와 관련된 인물이다.

청나라 수군제독 정여창이 거문도에 왔을 때 그의 제자들과 필담한 후 이 섬의 학문에 놀라 삼도를 거문도라 했다 그래서 지금도 그를 추모하는 ‘귤은제’를 지낸다.

자세한 내력은 다음과 같다. 구한 말 청의 북양대신 이홍장 휘하에서 북양수사제독을 지내던 정여창이란 이가 있었다. ‘거문도 사건’이 일어나자 정여창은 사건의 내용을 조사하러 거문도에 도착했다.

주민 중에 중국말을 할 줄 아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필담으로 뜻을 주고받아야 했다. 그런데 정여창이 ‘菊花發’의 세 글자를 내밀자 아는 이가 없었다. 이때 한 주민이 이 글을 김유에게 보이자 그는 곶감 한 상자를 중국 배에 보내도록 하였다.

이에 정여창이 놀라 ‘이런 작은 섬에 거유(巨儒)가 있는 것을 미처 몰랐다’며 섬의 이름을 ‘거마도’라고 부르기보다는 큰 학자가 있는 곳이라는 뜻의 ‘거문도(巨文島)’로 바꿔 부르자고 주장하였다. 그때부터 조정에서 거문도로 하였다는 말이 전한다.

 

또한 1854년 4월 4일, 푸차친(Putiatin) 제독이 이끄는 러시아 함대 팔라다호가 거문도에 입항하여 러시아인 최초로 조선 땅에 기항한 사건을 직접 목격하였고 그 이후의 사건들을 해상 기문에 저술하여 당시 상황을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기록인 『해상 기문(海上奇聞)』 남겼다.

이때 함께 러시아 함대에 탑승한 『오블로모프』, 『단애(斷崖)』의 저자로 19세기 세계적인 러시아 작가인 이반 알렉산드로비치 곤차로프(IvanAleksandrovich Goncharov) 역시 푸차친을 수행하여 거문도에서 조선의 여러 가지 정황을 항해 일지 형태의 수기를 남겨 당시의 상황을 엿볼수 있다.

이들은 4월 19일까지 모두 11일 동안 체류했다. 이들은 섬에 상륙하여 주민과 필담으로 대화를 하였으며 섬사람들도 팔라다호에 승선하여 대접을 받기도 했다.

이후 거문도 사람들은 구한말부터 하멜이나 영국군에게서 선진 문물을 빠르게 흡수하였고 내륙 지방보다 먼저 개화되었다.

또한 갑신정변이 실패로 돌아간 후 김옥균과 박영효가 숨어들어 온 곳이 절해고도 거문도였으며, 거문도에 살고 있는 김씨 일가가 그들을 일본으로 밀항시켜 주며 자식들을 함께 보낸 탓에 일본에서 신식 고등 교육을 받은 사람이 많았다.

일제 시대에도 동도 주민 중 30명이 넘게 일본 동경의 유명 대학으로 유학했다 하니 인구에 반비례해 개화에는 일찍 눈을 떴던가 싶다. 이처럼 신식 고등 교육을 받은 사람들 중에는 당시 급속하게 전파된 사회주의에 심취한 이들이 많았고 이후 이들은 거문도뿐만 아니라 삼산면 전체에서 적극적인 좌익 활동을 하게 되었다.

여순 반란 사건(1948)이 섬에도 전해지자 해방 이후 모임을 갖는 등 활동을 해 왔던 좌익 세력이 중심이 되어 경찰과 우익 세력을 잡아 지서에 가두기도 했으나 그 이상의 피해는 없었다.

이후 진압군이 들어오면서 경찰과 우익들이 풀려났고 이들 중 김덕운이라는 의용 경찰이 중심이 되어 좌익 및 가담자 색출을 시작해, 이들에 대한 즉결 처형과 여수로의 이송이 시작되었다. 이 사건으로 인한 삼산면 희생자는 총 115명이었으며, 이들의 대부분은 거문도사람이었다.

이후에도 거문도에서 간첩 사건이 일어나는 등 사회주의 사상이 짙게 깔려 있었으나 여순 반란 사건 이후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어 주민들은인물이 없음을 한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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