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돛단배를 타고 울릉도까지 바다를 개척했던, 초도

[이재언의 섬, 섬, 섬] 초도 -1

  • 입력 2015.11.25 14:33
  • 수정 2015.11.25 14:36
  • 기자명 여수넷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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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동마을 고목

1992년 봄에 혼자서 등대호를 타고 거문도를 거쳐 초도를 답사한 적이 있었다. 91년도 겨울에 처음으로 진도 조도를 일주일 동안 답사하고 두 번째로 두 주간 계획을 세우고 돌아본 곳이 여수의 섬들이다. 초행길의 여수행 뱃길은 멀고도 험했다.

먼바다로 나가서 항해하니 1.5톤 등대호는 바다의 파도앞에 낙엽처럼 흔들리는 바람에 조금 힘들었고 얼굴이 노래지며, 배 멀미 직전까지 갔다.

이런 일은 지금까지 20년이 넘게 배를 타고 섬 순회와 답사 과정인데 수천 년부터 조상들이 겪어온 일부분이기 때문에 목표를 이루기 위한 과정으로 생각하고 별로 마음 쓰지 않는다.

성경 사도행전을 보면 바울은 돛단배를 타고 로마로 가다가 유라굴로 태풍을 만나 난파되어 한주일 동안 죽음의 고난을 넘어들며 극적으로 살아나는 장면이 나온다. 장보고, 컬럼버스, 마젤란, 홍어장사 문순득, 장한철, 하멜 등은 이를 잘 증명해 주고 있다.

여수지역사회연구소는 여수의 먼바다에 있는 삼산면 어부들을 소재로 ‘남녘 어부들이 개척한 뱃길’의 역사를 연구하여 발표하였다.

또 최근에 호남대학교에서 논문에 의하면 1880년대 울릉도 개척 당시 원주민 80%는 전라도 출신이었고 독도라는 섬 이름 역시 전라도 사람들이 부여한 지명인 것으로 드러났다.

▲ 초도 대동리

고종 때인 1882년 이규원 울릉도 검찰사가 고종에게 올리는 보고서에 울릉도 전체 인구 141명 가운데 전라도 사람이 115명, 강원도 14명, 경상도 11명, 경기도 1명으로 기록했다.

전라도 출신의 개척민 가운데 각 지역별로는 흥양(현재 전남 고흥) 3도(죽도, 손죽도, 거문도)출신이 61명으로 가장 많았고 흥해(여수) 초도 33명, 낙안(순천) 21명이었다.

논문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여기에 나오는 초도 사람들은 먼바다 한가운데 살았지만 험한 바다를 개척하는 개척자 정신을 엿볼 수 있다.

여수지방에는 노동요 술비소리가 전해온다. 이 소리는 여수의 거문도와 초도 어부들이 어구용 밧줄을 꼬는 작업을 하거나 배를 부릴 때 불러왔고 지금도 부르는 노래이다. 노랫말이 여간 힘차고 가락 또한 여간 역동적이지 않다. 그래서 부르는 사람도 그렇지만 듣는 사람도 흥에 취한다.

그런데 이 노랫가사를 살펴보면 의미심장한 데가 있다. 뭔고 하니 멀리 울릉도와 독도의 뱃길을 개척하고 고기를 잡았던 숨은 역사가 담겨 있는 것이다.

▲ 초도 우도풍물굿

'에헤야 술비야/ 어기영차 뱃길이야
울고간다 울릉도야/ 알고 간다 아랫녘아
(중략)
돛을 달고 노니다가/ 울릉도로 향해 가면
고향생각 간절하다.
울릉도를 가서보면/ 에헤야 술비야
좋은 나무 탐진 미역/ 구석구석 가득찼네'

이 노랫말처럼 초도와 거문도 사람들이 울릉도와 독도로 배를 타고나가 고기 잡고 좋은 목재도 가져온 것이다. 동력선도 없던 때에 어떻게 그 먼 곳까지 진출하여 어장을 개척했는지 불가사의하기만하다. 아마도 그때는 온전히 풍선배를 이용했다.

그렇다면 풍향을 이용할 줄 알았다는 말인데, 얼마나 지혜로웠는지를 알 수 있다. 그것을 유추해 볼 수 있는 단서가 있다. 초도와 거문도 사람들은 옛날부터 진취적인 기질을 가졌는데, 그것은 지리적으로 손죽도와 거문도 사이가 워낙 풍랑이 드세어 이겨내려다보니 독자적인 항해술도 익혔던 것이다.

울릉도 내왕 흔적은 초도마을에 아직도 남아있다. 1880대에 지어진 김충석(전 여수시장)가(家)가 그 증거인데, 그 집의 마루 벽이 여느 나무와는 달리 두터운 판목으로 짜여 져 있는 것이다. 목재가 없는 고장임을 생각할 때 어디서 가져왔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 초도 목섬

또 다른 증거로는 독도(獨島)라는 지명이다. 전라도에서는 노상 돌덩이를 보고 ‘독‘이라고 하는데 독도라는 이름이 붙은 것도 '돌섬'이라는 말에서 유래한 것이 아닐지.

아무튼 뱃길 개척의 역사는 흥미롭기만 하다. 그 먼 곳까지 가는데는 풍향을 이용하여, 겨울철은 샛바람이나 높새바람이 불어 배를 밀어내므로 그때는 피하고, 하뉘바람이나 마파람이 부는 봄철에 떠났으리라. 그리고 항해코스는 지금도 많이 이용하는 손죽도와 소리도를 거쳐, 경상도 욕지와 부산의 절영도를 통해서 올라갔을 것으로 추정된다.

울릉도와 독도는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도 고기와 해산물이 풍부했다. 특히 울릉도는 수목도 울창하여 질좋은 목재가 많이 생산됐다. 그래서 고기를 잡는 한편으로 집을 지을 목재도 켜서 실어왔던 것이다.

▲ 초도 운동회

전해오는 말로는 이때 향나무도 함께 베어왔는데 제수용품으로 귀한 대접을 받았다고 한다. 문헌에 보면 조선은 섬을 비워두는 공도(空島)정책을 폈다. 태종과 세종임금 때로 왜구의 침탈이 막기 위해서였다.

그 어간에 초도와 거문도 어부들이 어장을 개척한 것으로 보인다. 참으로 장하고 우리의 자존심을 살려주는 장보고와 이순신의 후예들이 아닌가 생각한다.

50-60년대 돛단배가 동력선에 의해 사라지고 70년대 여수항에서 초도 뱃길로 8시간 30분이나 걸리는 먼 곳이 지금은 쾌속선을 타고 1시간 40분을 가면 도착한 섬이 초도이다. 인구는 400여 명의 작은 섬으로 도보 여행은 4시간 자동차로는 30분을 돌다보면 다시 제자리에 오는 아담하고 멋있는 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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