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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워킹 할머니의 투정

정 숙<배울학원장>

  • 입력 2015.12.27 11:51
  • 기자명 여수넷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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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전라남도 가장 남단(여수)에 사는 조그마한 어린이집 원장입니다. 손자, 손녀, 며느리, 사위까지 둔 나이 많은 서민입니다. 최근 보육대란을 우려하는 방송을 보면 참으로 참담합니다. 어린이집 원장이기 전에 시어머니로서 더욱 그러합니다. 그래서 몇 글자 적어 투정을 부리려 합니다.

젊은 맞벌이 부부가 아이를 키울 때는 24시간이 부족하고 한 달 봉급은 바로 그 다음날 증발해 버립니다, 우리 때도 그러했고 지금도 그러합니다. 물론 아이가 초등학교에 가면 아이 키우기가 조금 덜 힘들어집니다만, 만5세까지의 육아는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경제적으로 모두 힘듭니다. 대가족 시절에는 그래도 할머니가 육아를 책임져주기도 했습니다만 요즘은 할머니에게 그런 기대를 하기는 힘듭니다.

그래서 아이를 낳지 않습니다. 육아비용 부담 때문에 그렇기도 하고 직장생활에 매달리다보면 아이를 돌볼 시간도 없기 때문입니다. 또한 자신이 노인이 되었을 때 힘들게 키운 아이가 아무런 보험이 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러는 동안 우리나라 출산율은 크게 내려가 버렸습니다. 앞으로도 바닥을 치고 올라갈 거라는 희망이 보이지 않습니다. 늘어나는 것은 노인요양병원입니다. 어느새 최고령사회가 되어 버렸기 때문이겠지요. 그래서 국민 혈세가 노인 쪽으로 더 많이 배정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해합니다. 하지만 계속 이렇게 가면 몇 십 년 후에는 세금 낼 중장년이 더 줄어듭니다. 세금을 많이 내야하는 사람들은 이 나라 떠날 궁리를 할지도 모릅니다.

작년엔 이런 공방이 있었습니다. 유치원엔 누리비가 지원되고 어린이집엔 지원되지 않을 수 있다는 공방. 헛웃음 나오는 일이었습니다. 이건 헌법재판소에서 위헌이라고 나무망치 땅땅 두드려야 할 문제라 생각했습니다. 같은 국민입니다.

유치원 가는 아이는 국가 돈을 받고 어린이집 가는 아이는 국가 돈을 못 받는다는 게 말이 됩니까? 이게 뉴스거리로 등장할 일입니까? 국가가 우리 어린이를 다 수용할 만큼 유치원을 짓기나 했습니까? 평등, 공평, 합리, 논리, 이 모든 게 맞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모두가 이를 모른 척, 정부냐 자치단체냐 하는 핑퐁게임에만 몰두했습니다. 결국 고래 싸움에 힘없는 어린이집 원장 등만 터지는 격이 되었습니다만.

이 누리예산 미봉책은 올해도 어김없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참으로 암담합니다. 그동안 유보통합을 하겠다고 행복카드를 통일시켰고, 누리과정이라는 교육과정도 만들었습니다. 위원회, 컨설팅, 연구비 등에 쏟아 부은 국민 혈세는 만약 이 일이 성공되지 않으면 누군가가 다 배상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 아들 딸 며느리 사위의 월급봉투에서 떼 낸 세금이니까요. 보육이 이렇게 발에 차이는 신세가 된 것은 우스갯소리로, 노인은 선거권이 있고 어린이는 선거권이 없어서, 라고들 합니다. 국가 명운이 걸린 이 보육을 더는 폄하해서는 안 됩니다. 보육은 대통령 공약이기 전에 국가의 미래입니다.

20년 전 제가 늦둥이를 하나 더 낳았는데, 그때는 둘만 낳아 잘 키우자는 슬로건이 들릴 때였으니 셋째인 늦둥이는 건강보험에 이름도 올리지 못했습니다. 불과 20년 전입니다. 이를 뒤집어 생각해보면 다시 출산율을 높이는 데 20년이면 충분하다는 뜻일 수도 있습니다. 물론 국가가 그런 의지를 가지고 있느냐에 달려 있겠지요. 월드컵 4강 신화를 쓸 때 우리 국민은 너 나 할 것 없이 모두가 붉은 악마였습니다.

우리에겐 한다면 해내는 뜨거운 저력이 있습니다. 이런 국민의 힘을 국가가 잘 뒷받침한다면 20년 후 우리 모습은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을 것입니다. 더 이상 보육대란이라는 단어가 들리지 않게 국가가 책임져야 합니다.

저는 지방에 살고 아이들은 서울서 삽니다. 아이들 육아부담을 덜어줄 수 없습니다. 물론 워킹 할머니이기에 그럴 시간도 없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이렇게 종이 위에 몇 글자 적으며 한숨 쉬는 일뿐입니다. 시골 할머니의 서툰 투정 들어주셔서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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