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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중일기>에 열 네번이나 등장한 섬 사량도

바다 구경과 낚시, 산행까지 동시에 할 수 있는 곳

  • 입력 2016.02.05 21:05
  • 수정 2016.02.05 21:08
  • 기자명 여수넷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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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량도(상도·하도)는 경남 통영의 남쪽 바다에 위치한 섬으로 동서로 나란히 누워있다.

통영시 소속인 사량도는 한려해상국립공원 한 가운데  위치한 섬으로 통영시와 고성군, 남해군 등 3개 시군에 둘러싸여 있다. 사량도는 이러한 사통오달 하는 지형적인 위치 때문인지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하여 고려시대부터 수군이 주둔하였다.

사량상도 면적 10.798㎢, 해안선 길이 17.5㎞, 최고 높이 불모산 400m이며, 인구는 546가구, 982명(2015)이다. 통영시에서 14㎞, 삼천포에서 남동쪽으로 16㎞ 해상에 있으며, 고성과는 불과 5.2km 떨어진 섬이다. 두 섬은 1.5㎞의 좁은 해협을 사이에 두고 상도와 하도가 마주하고 있다. 이 해엽은 아무리 태풍이 불어도 배들이 안전하게 정박 할 수 있는 천혜의 항구 역할을 하며 미역과 기타 양식장으로 사용된다. 

사량도의 이름은 어떻게 지어진 걸까

사량도의 옛 섬 이름은 박도였다. 두 개의 사량도 중에 서북쪽 위편에 위치해 있는 섬은 조선 초기 지명은 '상박도'였고 아랫 섬은 '하박도'였다. 고려시대에 박도구당소가 있어 봄. 가을로 관할 고성수령이 남해의 호국신에게 남쪽변방의 보전과 함께 국태민안을 기원하는 망제를 지냈다.

조선초기 박도에 인접한 구량량만호진의 수군 및 병선의 초계정박처가 되었으며, 섬에 영전을 일구어 병사들이 내왕하며 농사를 지었다. 그러다가 진영을 이곳 섬으로 옮겨 사량만호진이 설치되고 성종 21년(1490) 사량진성을 축성하여 비로소 진영의 위용을 갖추었다.

사량진은 임진왜란 때에 영남과 호남을 해역을 잇는 조선 수군의 중요 거점이었다. 그후 통제영이 설치된 이래 통영군창 둔전과 통영둔우의 방목처와 더불어 거북배 1척, 병선 1척, 사후선 2척에 장졸 합 216명 규모의 병력이 상주하며 이곳 해역을 지켰다. 그 후 진영이 더욱 중요해지자 점차 원래의 섬 이름인 '박도'보다는 '사량진' '사량' 등으로 일컬어지게 되었으며, 조선 후기에 이르러 결국 이러한 군영의 이름이 섬지명으로 전용되어 보편적으로 '사량섬' '사량도'라 칭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즉 '사량'은 원래 두 섬 사이를 흐르는 해협을 일컬었던 옛 이름명에서 유래했다. 종래의 지명유래설에 의하면 이곳 옥녀봉에 얽힌 비련의 설화에서 연유되어 '사랑'이 '사량'으로 변천되었다는 설과 섬에 뱀이 많이 서식했다는 설 그리고 섬의 형상이 뱀처럼 기다랗게 생긴 것에서 유래했다는 등의 민간어원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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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량면 사무소 앞 기념비 사량도는 역사와 문화가 깃든 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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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구 정벌의 전략적 요충지 사량도

사량도는 해안선 특수성 때문에 수군 전략 요충지로 유서 깊은 섬이다. 사량도는 고려 사대부터 왜구의 잦은 침범으로 이를 막기 위한 수군 전초기지로 이용되어 왔다. 특히 고려 말에는 왜구를 토벌하기 위해 진을 설치하고 성을 쌓았다고 전한다.  그 당시 최영 장군이 남해안의 왜구를 토벌하기 위해 이곳에 진을 치고 왜구를 격퇴했는데 그 공을 추모하기 위해 사당이 세워졌다.

조선시대 1544년(중종 39) 4월에 일어난 왜인들의 약탈사건을 '사량진왜변'이 일어난다. 이순신 장군은 임진년 6월 1일 저녁에 사량도 하도(양지리 앞바다)에서 군사들을 쉬게 하고 <난중일기>를 썼으며 6월 2일 지금의 당포 앞바다에서 왜구를 무찔러 당포대승첩을 했다.

<난중일기>를 보면 계속 사량에서 진을 치고 머물렀으며, 사량 만호 이여염과의 접촉은 수차에 이루어졌다(<난중일기>에 사량이 나오는 횟수가 14회 이상이다). 사량도의 진촌 마을에 있는 객사터와, 서쪽에 있는 옥터가 있다. 상도의 동강 건너편 하도의 칠현봉 중 망봉에는 봉화터가 있다. 공수산이라 함은 현재의 덕동마을의 옛지명이 공수리이며, 이 일대의 산을 공수산이라고 했다.

사량도 관문 금평 마을

사량도가 유명해진 것은 지리산 때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이다. 산꾼들뿐만 아니라 일반 사람들도 사이에서 사량도 지리산 인기는 그야말로 대단하다.

날씨가 선선한 봄과 가을의 주말이 되면 줄을 서서 올라갈 만큼 수많은 사람이 찾는다. 사량도와 처음 인연을 맺은 것은 1994년도 봄에 여수에서 등대호를 타고 경상도 섬들을 답 사 중에 사량도 상도와 하도를 둘러보고 하도에서 일박을 하였다. 그 외에도 두 번을 더 왔지만 그때마다 명성은 들어서 잘 알고 있던 지리산은 시간 관계상 등반하지 못하고 돌아갔다.

사량도 면 소재지인 진촌 마을. 육지에서 여객선을 타고 오면 가장 먼저 만나게 되는 마을이다. 여객선이 닿는 곳은 금평 선착장. 양쪽으로 경사진 접안 시설이 두 개나 있다. 배에서 내리면 가장 만나게 되는 것이 '사량도여객선터미널'이다. 섬의 규모 아니 명성만큼이나 제법 크다. 터미널 앞에 '진촌마을'이라는 마을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그 옆으로 두 개의 장승이 세워져 있는데 환영인사와 작별인사를 하고 있다. 

선착장에는 통영항, 통영 가오치항, 삼천포항, 고성 용암포에서 수시로 드나든다. 사량도로 향하는 배는 다양하여 선택의 폭이 넓어서 좋다. 보통 섬들의 여객선 노선이 겨우 한 곳을 통하여 들어가지만 사량도는 당연히 한국의 섬에서 가장 아름다운 산인 지리산을 찾는 이들 때문이다. 사량도는 육지와 매우 가깝고 풍랑주의보와 상관없이 다닐 정도로 육지와 섬들이 가려서 바다가 잔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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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량상도와 사량대교 전경 추석에 임시 개통했고 10월 30일 정식 개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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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나의 명물, 상·하도를 잇는 사량대교

사량도 금평 선착장에는 다리 건설에 대한 안내판이 있다. 사량도 윗섬과 아랫섬을 연결하는 연도교는 2015년 10월 준공된다. 이번 추석에는 임시로 연결되어 주민들이 편리하게 이용하였다.

이 연도교는 왕복 2차로 총연장 1465m 중 교량 530m이다. 사량도 섬 섬주민들의 오랜 숙원사업이었던 이 연도교가 완공되면 두 섬 주민들의 삶의 질 향상될 것이다. 지리산과 함께 새로운 관광명소가 되면서 연간 60만명 정도가 사량도를 방문할 것으로 보여진다.

지금까지 상도에 관광객이 몰려오면서 소외 받던 하도가 연결되면 7개의 봉우리를 자랑하는 칠현산에도 등산객이 몰려들면서 두 섬이 동반 성장이 기대된다. 이제 연도교 완공으로 커다란 변화의 바람이 불어서 지금까지 지리산을 찿아 경유하던 사량섬이 이제는 1박 2일 코스로 육지 사람들에게 색다른 맛을 제공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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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억의 엔젤호 사량면 사무소 앞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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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젤호의 추억

사량면사무소 앞에 사량중학교가 있고 그 옆으로 배 한 척이 전시돼 있다. 1970년대 남해를 주름잡고 달리던 인기가 좋았던 '엔젤3호'다. 엔젤호는 (주)한려개발이 이탈리아에서 도입하여 1971년 4월 19일 취항 이후 1997년 9월 10일까지 약 26년 5개월간 통영을 기점으로 부산, 거제, 통영, 사량, 삼천포, 남해, 여수를 운행한 우리나라 최초의 쾌속여객선이었다.

엔젤호 선사는 경영난과 사고까지 겹치면서 운항을 중단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엔젤호는 1980년대에 연이어 두 번의 대형 사고를 겪었다. 1980년 6월 24일 거제 장목면 잠도 근해에서 통영에서 부산으로 향하던 엔젤1호와 부산에서 여수로 달리던 엔젤2호가 짙은 안개로 그만 충돌했다. 안갯속에서 무리한 운항으로 5명이 사망과 18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엔젤2호는 운항을 시작한지 2년만에 폐선 조치돼 우리 기억 속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정확히 1년 뒤에 다시 한 번 1981년 6월 16일 엔젤 5와 6호가 부산 가덕도 바다에서 충돌해 승객 64명중 8명이 중상, 29명이 경상을 입었다.

엔젤호는 남해고속도로의 개통과 함께 육로의 발달로 사양길로 접어들 무렵에 연속으로 같은 회사 배들끼리 사고를 당하여 문을 닫고 말았다. 이런 아픈 사연을 안고 있는 '엔젤3호'를 2005년에 새로 단장하여 해상이 아닌 육상인 이곳 사량도의 진촌 물량장에 전시, 관광상품화됐다.

부산항을 기점으로 거제·통영·여수 등 남해안 뱃길을 27년 동안 운항해 남해 고속도로가 없던 시절 해상 교통 문화에 큰 변화를 몰고온 최초의 쾌속선 엔젤호였다. 옛 추억을 되살려 이제는 바다가 아닌 육상에서 관광자원으로 다시 태어났다. 사고와 경영부실로 인하여 지난 1998년 3월 폐선된 엔젤3호로 전 시의원을 지낸 김채원(사량면)씨가 960만 원에 낙찰을 받아 보관해 오다 2004년 7월 통영시에 기부채납으로 국내 최초의 쾌속선이 관광 목적으로 옛날의 영광을 육지에서 다시 재현하게 됐다.

추억의 엔젤호는 이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지만 분명히 사량도 지역경제 활성화에도 큰 도움이 될것이라고 생각해 본다.

산·바다·기암괴석이 어우러진 지리망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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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리산 정상에서 한국의 명산 사량도 지리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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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량도의 지리망산은 국내 100대 명산 중 하나이며 모험과 낭만을 체험할 수 있는 아름다운 섬이다. 우리나라 100대 명산 중 지리망산은 25위를 차지했다.

사량도를 방문하는 사람은 10명 중에 8명은 산행을 하는 사람들이다. 섬과 바다와 기암괴석이 한데 어우러진 지리망산은 국내 어디에서도 쉽게 찾아보기 어려운 명산이다. 사량도를 찾는 관광객은 한 해에 40만 명에 이른다.

사량도 산행의 절정은 3월 중순부터 4월까지다. 이 무렵에는 주말에 보통 7000명 정도가 이 섬을 찾고 있다. 이렇게 사량도가 유명한 섬이 된 것은 상도에 국내 100대 명산인 지리망산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들어오는 코스도 다양하다. 통영항, 통영가오치, 고성 용암포, 사천 삼천포항 등 네 군데 항에서 출항한다. 육지와 매우 가깝고 풍랑주의보에 걸리지 않는 천혜의 섬이다.  평소에는 이곳 주민들 대부분은 어업과 밭농사 종사하는 평범한 섬이지만, 봄과 가을 산행 철에는 전국에서 몰려드는 산꾼들 때문에 사람들로 북적인다.

돈지마을에서 사량도 지리망산의 종주 코스가 시작된다. 가장 인기있는 산행은 상도의 4개 산봉우리를 모두 통과하는 7.6㎞ 종주 코스이다. 돈지항~지리망산(398m) ~볼모산(390m)~가마봉(301m) ~옥녀봉(303m)~금평항으로 이어지는 총 7.6㎞, 걸어서 4시간 반 정도 소요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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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량도 지리산 산행 중에 만난 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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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지마을에서 산 능선을 따라 오르면 평풍처럼 돈지마을을 에워싸고 있는 촛대봉에 도착한다. 한시간 정도 가파른 촛대 바위산에 오르면 지리망산(398m)에 당도한다. 산행하면서 처음부터 황홀경에 빠져서 탄성을 자아내게 한다.

이곳 섬 산행은 낭떨어지기 절벽과 급경사의 등산 코스로 유명하다. 전문적으로 산을 타는 산악인들도 깎아진 산 능선에 혀를 내두를 정도로 아찔한 곳이다. 사량도의 최고로 높은 봉우리인 볼모산(399m) 까지 가는 도중에 가파른 암반과 해송 숲과 나무들이 경쟁하듯 등장한다. 해발 400 미터 정도의 봉우리들을 연결한 출렁다리와 90도 경사에 가까운 수직 철계단 코스까지 '악산'(?)으로 이름난 지리망산은 작지만 매서운 곳이다.

지리망산의 산행의 하이라이트는 가마봉과 옥녀봉 구간이다. 2013년 3월에 완공된 이 출렁다리가 만들어지기 전에는 밧줄과 수직계단을 이용하여 가마봉에서 내려와 다시 바위를 타고 옥녀봉에 오르는 것이 힘든 코스였다. 공룡의 등뼈같은 암릉의 능선을 따라서 철제계단과 로프, 줄사다리 등을 타고 옥녀봉으로 향하는 재미가 솔솔했다. 마치 군대에서 유격 훈련장을 방불케 하였다.

지금은 산행객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고려하여 설치한 출렁다리 때문에 짜릿한 묘미를 느낌은 사라져 아쉬움이 남는다. 400m 높이인 두 봉우리를 잇는 출렁 다리를 보면 고공공포증이 있는 사람은 겁이 나는 코스이기도 하다. 출렁다리를 타고 옥녀봉으로 조심스럽게 걸으면서 보는 이 일대의 경관은 그야말로 장관을 이룬다.

15년 전만 해도 이곳 산행 중에 천 길 낭떨어지기를 보고 무서워 우는 여자들이 많았고, 남자들도 마찬가지로 오금이 저려 당황하는 사람도 많았다. 옛날에는 정말 그런 시절이 있었다. 지금은 우회 산길을 만들고, 난간과  손잡이도 있고 나무 계단을 만들고 출렁다리까지 생겼으니 예전만큼 스릴을 느끼지 못하지만 험함 산세는 여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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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옥녀봉 슬프디 슬픈 옥녀봉의 전설이 깃든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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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량도의 슬프디 슬픈 옥녀봉 전설

통영팔경의 하나인 사량도 옥녀봉에는 애절한 전설이 하나 전해 온다. 아주 먼 옛날  사량도 옥녀봉 아래에 작은 마을이 하나 있었다. 이 마을에 가난한 부부가 살고 있었는데 어느날 옥녀라는 예쁜 여자 아기가 태어났다. 그러나 가난 때문에 제대로 먹지도 못한 어머니는 옥녀를 낳은 뒤 병으로 세상을 등지고 말았다. 아버지마저 슬픔에 잠겨 몸져 눕고 말았다. 그로부터 얼마 후 아버지도 세상을 하직하였다. 기구한 운명의 옥녀는 태어나자마자 고아가 되어버렸다.

그때 이웃에 홀로 살던 어떤 홀아비가 옥녀를 불쌍히 여겨 자기 집으로 데려가 키웠다. 그는 옥녀를 업고 이집 저집 다니면서 동냥젖을 얻어 먹이며 잘 보살폈다. 옥녀는 이 사람을 친아버지로 알고 성장하였다. 세월은 흘러 옥녀의 나이가 열여섯이 되자 옥녀는 어여쁜 여성이 됐다. 미모가 아주 뛰어나 주변에 소문이 자자하였다.

이즈음 옥녀를 길렀던 의붓아버지는 마음이 동하여 옥녀를 딸로 보지 않고 이상한 행동을 할 낌새를 보엿다. 그때 까지만 해도 옥녀는 그를 친아버지로 알고 있었다. 슬픔에 잠긴 옥녀는 이러한 위기를 벗어날 묘책을 생각했다. 그러고는 의붓아버지에게 말했다.

"아버지! 제가 간절한 부탁이 하나 있습니다. 지금부터 제가 하라는 대로 행하시면 아버지의 요구를 들어드리겠습니다. 내일 새벽 날이 밝기 전에 상복을 입고 멍석을 뒤집어 쓴 채, 풀을 뜯는 시늉을 하면서 송아지 울음소리를 내며 저 옥녀봉으로 네발로 기어서 올라오십시오. 그러면 아버지의 요구를 들어 드리겠습니다."

그런데 미련한 의붓아버지는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했다. 답답한 마음에 눈물로 밤을 새운 옥녀는 다음날 새벽에 옥녀봉으로 올라갔다. 인적이 없는 새벽녘에 옥녀봉에 앉아 있는데, 상복을 입고 짐승의 모습을 한 의붓아버지가 벼랑을 기어 올라오는 것이 보였다.

순간 옥녀는 치마폭으로 얼굴을 가리고 천 길 낭떠러지 아래로 떨어졌다. 열여섯 피지 못한 꽃봉오리 하나가 산산히 부서졌다. 사량도 옥녀봉 전설은 근친상간 금지와 타락한 동물적 본능을 엄중히 경고하는 교훈으로서 오늘날까지 구전으로 전해오고 있다.

옥녀봉 밑에는 사철 붉은 이끼가 끼어있는데 사람들은 이것을 옥녀의 피라고 믿고 있다. 지금도 결혼식 때면 옥녀봉이 보이는 곳에서는 신랑 신부가 맞절을 하지 않는 풍습이 있으며, 신부가 결혼해 가마를 타고 가다가도 옥녀봉 아래를 지날 때는 걸어서 가는 풍습이 있다. 하기사 이 산하에는 옥녀처럼 살다가 사라져 간 여성이 한둘은 아닐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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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량도 지리산에서 출렁다리 광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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