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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많은 섬생활을 노래하는 두 모녀

주민소득사업을 위해 발벗고 나서다

  • 입력 2016.02.07 21:29
  • 수정 2016.02.12 13:01
  • 기자명 오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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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 돌산 신기항에서 여객선을 타고 30분쯤 가면 금오도 여천항에 도착한다. 금오도는 섬의 모양이 자라와 같이 생겼다 하여 자라 금(鰲)자를 써 금오도(金鰲島)라 하였다. 섬에는 설화와 전설, 민요와 민속놀이 등이 다양하게 전해져 오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왕실에서 민간인의 입주를 금지시키고 사슴을 수렵하기도 했던 곳이다.

 

몇 년 전부터 비렁길이 유명세를 타며 전국에서 50만명의 관광객이 찾는 섬이지만 옛날에는 '섬놈', '뱃놈' 이란 말을 들으며 천대 받고 살았던 섬이다. 금오도 초포마을에는 섬에서 태어나 80평생 한 많은 삶을 살며 자연스레 창을 터득한 어머니와 어머니 끼를 타고나 국악을 전수하는 모녀가 있다.

 

 

 

금오도 첫 마을이라는 의미인 초포(두포)라 불린 이유가 있다. 금오도에는 커다란 소나무가 많아 경복궁 건축과 왕족의 관을 짜기에 알맞은 소나무가 울창해 일반인들이 출입할 수 없도록 금족령을 내렸다. 이른바 '황장봉산'이다.

 


 


하지만 서기 1885년 (고종 22년)에 일반인의 출입을 허가하고 권농관이 중앙정부 관리를 초포에 파견해 현 초포리에 관사를 짓고 방파제를 수축하여 금오도에서는 최초의 개척 중심지가 됐다. 마을 중심에는 금오도 개척 100주년 기념비(1995년)가 세워져있고 금오도 내력이 기록되어 있다.

 

 

시집와 세 번의 죽음을 목격하고 한 많은 세월을 산 문영애 할머니

 

문영애(80세) 할머니는  금오도 함구미에서 태어나 18살 때 초포로 시집왔다. 시집올 때는 자동차 길도 없었고 비렁길을 가마타고 왔다. 시댁은 시부모, 시아주버니 7명에 딸2 도합 11명의 대가족이었다. 시댁에서는 논농사와 밭농사뿐만 아니라 고기잡이도 했다. 살기위해 안 해본 일이 없는 그녀는 현재 온몸이 아프다. 인터뷰 시작 전 "노래는 언제부터 누구한테 배웠느냐?"고 묻자 자신의 노래실력을  은근히 자랑했다 .

 

"몸이 아파 여수시내 노인전문병원에 한 달 동안 있을 때 환자들이 기저귀차고 옷에 대변을 보고 악 쓰는 걸 보니 갑갑해 병이 더 날 것 같았어요. 안 아파야 합니다. 병원에 있을 때 환자 생일상 차려놓고 노래 한 자리 부를 사람 있으면 부르라고 해서 불렀더니 원장님이 '영애씨는 무슨 한이 그렇게 많아 그렇게 구슬프게 소리를 잘 합니까?'하고 자꾸 불러달라고 청했어요"

 

그녀는 굿거리 장구를 치며 노래한다. 장구도 누구한테 배운 게 없어 부엌에서 양철물동이 엎어놓고 부지깽이로 두드리며 터득했다. 옆에 있던 딸 장미례씨가 어머니 말문을 막고 나섰다.

 

 

"어렸을 적에 엄마가 막걸리 마시고 장구치며 노래(창)하는 모습이 너무 싫어 울면서 장구 끈을 잡고 따라다니며 말렸어요"

 

그녀는 마을주민들이 동원돼 마을 인근에 저수지를 쌓을 때 노동요를 선창했다. 노동요란 옛사람들이 일의 지루함을 잊고 능률을 올리기 위해 부르는 노동가다. 학교 운동회가 열리면 학생과 학부모들 앞에서도 선창을 했다. 문씨가 노동요 한 소절을 들려줬다.


"어유아 방아요! 여그도 찧고 저그도 찧고 물 때움을 하자!"

 

동네 사람들은 문영애 할머니의 선창에 맞춰 후창을 했다. 일터까지 따라 나온 딸들이 창피하다고 말려도 소용없었다. 막걸리 한 잔 들이키고 노래를 시작하면 가슴속에 쌓인 한이 풀렸기 때문이다. 노래에 대한 댓가는 한 달에 밀가루 4포대가 전부였다.

 

그녀는 6녀 1남을 두었다. 남동생이 생기기 전까지는 키도 크고 힘이 센 넷째 딸 장미례씨가 아들 역할을 했다. 10리길을 걸어 다니며 학교 다니는 동안 엄마의 흥이나 한이 섞여 있는 노래를 혼자 흥얼거리며 다녔더니 지나가던 아주머니 한 분이 "덱끼! 그런 노래하면 팔자 사나워진다"며 혼내 노래하지 않았다.

 

"나도 모르게 그런 노래가 나왔지만 슬펐었나 봐요"

 

장미례씨가 자신이 살아온 이야기를 꺼냈다. 그녀는 초등학교 3학년부터 중학교 3년 동안 아침밥을 얻어먹은 적이 없었다.  식구도 많고 20명 일꾼들 밥을 했다. 새벽 4시에 일어나 보면 아빠 엄마는 일하러 나가고 없었다. 보리를 '확독'에 갈아서 커다란 솥에 밥을 했다. '확독'은 자연석을 우묵하게 파 곡식을 으깨는 기구다.

 


 

초포마을 앞 바다 모습. 하늘에서 초포를 바라보면 움푹 패인 곳에 자리 잡아 파도와 바람을 피하기 알맞은 지형이다. 밭농사뿐만 아니라 논농사도 가능해 처음으로 사람이 들어와 살 수 있는 금오도 개척의 근거지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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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례씨 아버지는 한창 때 씨름선수로 힘이 장사였고 부지런했다.  금오도에서 가장 높은 산은 대부산(381.9m)이다. 아버지가 대부산 정상부근에서 소를 키우고 밭농사를 지으며 새벽에 식구들과 함께 거름지고 올라갈 때 일을 이야기하자 장미례씨가 나섰다.

 

"어매 어매 뭣하러 날 낳아 갔고 못 허겄네 못 허겠네!' 그러면서 창을 하면  뒤따라가던 딸들이 '엄마 그러면 우리는? 우리는? 우리는 뭐여?'라고 따졌어요"

 

삶이 너무 힘든 문영애씨가 가출을 시도한 적이 있었다.  시집에서 도망가려고  잠 안자고 바느질만 하고 있으면 아버지가 "얼른 안 오냐고 할 때마다. 한 짝만 더 기우고 갈께요"하며 미적거렸다. 더 이상 애기를 낳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때마침 동네에는 남편이 바람피워 아들 하나를 낳았다는 소문이 돌고 있었다. 어느 날 남편이 일찍 잠든 사이 30만원을 보따리에 싸서 친정인 함구미를 향해 나섰다. 시댁에서 3㎞떨어진 함구미로 가는 길은 비렁길 밖에 없었다.

 

밤10시에 비렁길을 따라 함구미로 가는 도중에 파란 도깨비불이 사방에 떠돌아다녀 "어른이 가는데 웬 귀신이 나서 이래?" 하며 헛기침을 했지만 머리가 쭈뼛거리는 무서움에 떨며 팬티에 오줌을 쌌다. 두려움에 떨다 친정으로 가는 중간에 있는 외딴 오두막집에 들어갔다.  한밤중 인기척에 깜짝 놀란 아주머니는 "동서 어디가면 좋은데 있당가? 그냥 그렇게 사소"라고 말하며 달랬다. 당시 딸만 둘 낳았을 때였다. 할 수 없어 다음날 집으로 돌아왔다.

 

원망과 분함으로 힘든 하루하루를 살고 있던 그녀에게 희망이 생겼다. 그렇게도 기다리던 아들을 낳았다. 하지만 기쁨은 잠시였다. 아들이 태어난 지 보름 만에 병에 걸려 죽어가고 있었다. 그녀는 아들하나 낳았다는 소리를 듣고 싶어 어떻게든 살리기 위해  여수행 여객선을 탔지만 도중에 죽었다.

 

죽은 아들을 남들이 빼앗을까봐 하루 종일 안고 다니다 돌산에서 일하는 아버지를 만나 송고로 돌아와 남편 팬티를 벗어 애기를 대부산에 묻었다. 그때부터 그녀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자식은 죽었고 후처자식은 살아있으니…

 


 


산 입에 풀칠할 수는 없었다. 부지런한 문씨의 남편은 소 4마리를 백만원씩에 사서 4년을 키웠다. 재수에 옴 붙었을까? 소파동이 일며 한 마리당  60~70만원 받고 팔았다. 소를 키우며 산에 가서 풀을 베며 애썼지만 무엇보다 환장할 일은 사료 값 때문에 큰 빚을 진 것이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바다도 오염돼 어장이 안 됐다. 소 값과 고기잡이를 위해 빚진 돈이 2천만원이나 됐다. 남편은 서울로 올라와 아파트 공사장에서 7개월 동안 일하며 빚을 갚아나갔다.

 

남편이 없는 동안 며느리를 지극히 사랑해주시던 시아버지가 시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서부터 치매에 걸리고 성격이 180도 바뀌었다. 술 마시면 욕하며 시집살이를 시켰다. 어느 날 산에 나무하러 갔던 시아버지가 절벽에서 떨어져 돌아가셨다. 불행은 혼자오지 않는다더니 뒤늦게 낳은 아들이 테니스선수가 되어 청량리에서 테니스장을 임대했지만 사기를 당해 금오도 살림을 팔아서 갚아줬다.

 

문씨와 남편은 돈 벌기 위해 전국으로 돌아다녔다. 서울 경기, 대구, 구미를 10년 정도 돌아다녔다. 그동안 그녀가 해본 일은 일당 농사, 떡볶이 장사, 포장마차, 학교경비, 청소, 학생식당에서 밥도했다. 부부가 열심히 일해 모은 돈 4천만원으로 둔덕동에 아파트를 구입해 이사 가기 직전에 몸에 이상을 느낀 남편의 병원진찰 결과는 식도암말기였다. 포기했지만 한번만 병원에 가보자해서 세브란스 병원에서 1년간 항암치료를 받았다.

 

더 이상 가망 없다는 의사 소견을 듣고 여수로 내려와 해 장례준비까지 했는데 호전되어 초포로 돌아왔지만 집이 없었다. 살집이 없으니 집 하나 짓자고 해서 지은 게 장미례씨 부부가 살며 운영하는 펜션이다. "집지어 편안히 살다 죽을테니 내 몸에 손 하나 대지 말라"고 유언하던 문영애씨의 남편이 죽었다.

 

 

장미례씨가 말을 넘겨받았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어도 아버지 주검 앞에서 창을 한다기에 말렸어요. 그녀가 남편 장례행렬 앞에서 부르고 싶었다는 소리를 들려주며 울고 있었다.

 

"북망산천이 멀다해도 어놈 어놈 어하리 넘자 어화여"


어머니가 막걸리 마시고 소리하는 모습이 창피해서 말리던 넷째 딸 장미례 여사도 소리를 하며 후학을 양성하고 있다. 어머니의 소질을 이어받은 장미례씨는 7년간 본격적으로 소리를 배웠다. 그녀의 거실에는 그녀가 탄 상장과 트로피가 가득했다. 합북대상(단체상) 중머리(고법) 최우수상, 판소리 최우수상장이 걸려있다. 그녀가 아버지를 모시기 위해 지은 집을 펜션으로 개조했다.  관광객들을 위해 서비스업에 종사하면서도 오후가 돼 학생들의 방과후 수업시간이 되면 국악강의에 바쁘다.

 



장미례씨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편히 살고 싶어 지은 집 앞에서 금오열도발전연구회원들이 파이팅을 외치며 발전을 다짐하고 있다. 지금은 장미례씨 부부가 운영하는 펜션으로 사용한다.


그것뿐만 아니다. 어머니의 한이 서린 금오도를 발전시키기 위해 남편인 강길원씨와 함께 금오열도발전연구회를 조직해 주민 소득사업 창출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금오도에서 재배하는 방풍을 가공해 방풍차, 방풍티백, 방풍비누 가공업을 하는 강길원씨는 금오열도발전연구회 회장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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