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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의란 한결같은 성실의 다짐이다”

김경수 교수의 창의톡<10> 남화토건 최상옥 최상준 형제의 ‘성실’과 ‘아름다운 경영’

  • 입력 2016.03.04 16:21
  • 수정 2016.03.10 14:43
  • 기자명 김경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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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에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 도덕적 의무)’로 불리는 ‘기업인 형제’가 있다.

 

1946년 회사를 창업한 형은 현대건설의 고(故) 정주영회장과 함께 ‘대한민국의 위대한 건설인’에 선정된 한국근대 건설의 1세대 주역이다. 그는 건설업으로 지역 경제발전을 이끌면서 학교, 장학재단 설립 등 교육과 문화예술, 체육 분야까지 폭넓은 사회공헌을 실천하였다.

 

이러한 형을 도운 동생은 회사의 경영권을 물려받아 IMF 위기를 직원 구조조정 없이 극복하고, 업계 평균치의 두 배에 이르는 수익구조 개선과 부채비율 20%(건설업체 평균 150%)의 안정된 회사로 이끌면서, 지역 내 학교의 장학사업, 심장병·결식학생 후원, 도서관 기증 등을 펼쳐 지역사회에서 가장 존경받는 기업인으로 인정받고 있다.

 

이 형제가 일군 회사는 국내 15,000여 개의 건설사 중 ‘1군 업체’에 속하고, 이 중에서도 100위권 안에 드는 A+등급의 중견기업이다. 특히 이 회사는 항만공사와 주한미군 공사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며 2012년 지역 건설업계에는 유일하게 코스닥에 상장하고, ‘석탑’, ‘동탑’, ‘은탑’에 이어 2013년 ‘금탑’ 산업훈장(産業勳章)까지 석권하였다.

 

지역 건설업체 최초 유일의 금탑 · 은탑 · 동탑 · 석탑 산업훈장 수상

 

두 형제는 남화토건의 ‘유당(裕堂) 최상옥 회장’과 ‘석봉(碩峰) 최상준 대표이사 부회장’이다.

필자는 이들의 창의를 찾기 위해 먼저 창업주인 최상옥 회장의 자서전 ‘지성의 행로(至誠의 行路)’와 남화토건의 반세기 역사가 기록된 ‘남화오십오년사(南和五十五年史)’를 살펴보았다.

 

  
최상옥 회장의 자서전 ‘지성의 행로’와 남화토건의 ‘남화오십오년사’

 

 

이 책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단어는 ‘성실(誠實)’이다.

최상옥 회장은 “나는 회사를 운영하면서 ‘성실’을 유일한 경영철학으로 삼았다”, “성실한 삶은 그 어떤 것보다 중요하다”, “누구나 쉽게 생각할 수 있지만, 가장 어려운 실천이 성실이다”, “성실의 실천이 인생에서나 기업에서나 성공의 요건이다”, “거창한 구호나 드러내기 위한 겉치레보다는 생활 속에서의 진지함과 최선을 다하는 자세가 성실이다”며, 평생 동안 ‘성실’을 유일한 신념으로 삼아왔음을 자부했다.

과연 그가 말하는 ‘성실’이란 무엇일까?

 

유당(裕堂) 최상옥 회장은 1927년생으로 일제강점기 때 전남 화순군 화순읍 벽라리의 소농집에서 5남매(3남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릴 적 최상옥은 ‘도장장이’ ‘목수쟁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조각·공예 분야에서 뛰어난 손재주를 가지고 있었다. ‘도장 파는 일’은 이웃마을까지 소문이 나서 용돈을 버는 일이 되고 저축을 시작한 계기가 되었다. 당시 금융조합에서 유일하게 저금통장을 갖고 있던 소년은 어느덧 90세의 백발노인이 되었지만, 지금도 그때의 통장번호(32-252)를 또렷이 기억하고 있다.

 

소년 최상옥의 첫 직장 역시 ‘도장 가게’였다. 1941년 목포시내에 위치한 ‘무안 인장포’라는 점포에 취업한 15세 소년은 도장 조각 일은 물론 궂은 심부름까지 도맡아 처리하며 점포 사장과 선임들에게 각별한 신임을 받았다.

그로부터 8개월이 되던 어느 날, 최상옥은 고향으로부터 어머니가 병환으로 누워 계시다는 전달을 받고 급하게 짐을 꾸려 화순 집으로 돌아왔다. 다행히도 어머니는 위태로운 상황이 아니었지만, 그에게 고민이 생겼다. 아버지의 지인이었던 일본인 목수 가와무라로부터 목수 일자리를 제안 받은 것이다. 그는 ‘내가 잘하는 도장 파는 일을 계속 할 것인가?’ 아니면 ‘일본인 목수에게 새로운 기술을 배울 것인가?’ 이렇게 고심한 끝에 선택한 길이 최상옥의 인생을 바꾸어 놓았다.

 

최상옥 회장이 유일한 스승이라고 말하는 가와무라는 일본건축공과학교 출신으로 당시 화순 복암역사 신축 공사장을 총지휘하는 도편수(都邊首)였다. 최상옥은 가와무라의 집으로 들어가 목재가공 기술을 배우는 한편, 기능공들의 출퇴근 관리, 경리 일까지 담당하며 현장실무를 배웠다. 1945년 해방 전까지였다. 그 경험이 오늘날 남화토건을 세운 초석이 되었다.

 

1946년, 20세 청년 최상옥은 광주시 동명동에 작은 ‘남화토건사’를 창업했다. 하지만 1950년 6·25 전쟁으로 인해 생활은 더욱 궁핍해졌고, 그는 전쟁 중에도 일감을 찾아나서야 했다.

이중에 최상옥 회장은 1951년 겨울 화순능주북초등학교 신축공사에서 재시공으로 인해 큰 빚을 떠안게 되었을 때를 잊지 못하고 있다. 그의 큰댁 사촌형은 “마구간 황소라도 팔아서 남의 것을 갚고 보자”고 위로해 주었고, 동네에서 구두쇠로 소문난 부자영감은 서슴없이 궤짝 문을 열어 돈을 빌려준 일이다.

최 회장의 자서전에는 이 일을 평생 잊지 못할 고마움으로 기억하면서, 인간관계에서 ‘신뢰’의 중요성과 함께 ‘신뢰는 결국 성실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남북휴전 이후 최상옥은 학교 개보수, 정미소, 공장, 점포 등의 복구사업에 참여하면서 사업을 확장했고, 1958년 건설업법 개정과 함께 건설면허(제141호)를 부여받으면서 비로소 ‘남화토건(南和土建) 주식회사 법인’을 설립하였다.

1970년대는 국내 건설업계가 화려하게 피어나 한국이 중동 건설의 바람을 타고 미국에 이어 ‘세계 2위의 건설 수출국’이던 시절이다. 이때 한국을 세계에 알린 인물은 현대건설의 고(故) 정주영 회장. 그는 1997년 한국건설 50주년 기념식에서 남화토건 최상옥 회장과 함께 대한민국의 ‘위대한 건설인 상’을 수상하였다.

 



 위대한 건설인의 상 (1997) 고 정주영 회장과 함께

 

고 정주영 회장은 공사현장에서 ‘24시간 노동’으로 공사기간을 줄여 관계자들을 놀라게 하고, 모 대학 강연에서 취업을 부탁한 여대생에게 “평소에 ‘성실’한 생각을 가지고 사는 학생은 다 취직이 될 것이다”라는 TV광고를 통해 ‘성실’의 대명사가 되었다. 그 시절 변방의 코리아를 전 세계에 알린 것은 다름 아닌 ‘성실’이었다.

 

최상옥 회장의 남화토건도 이러한 성실을 바탕으로 정부와 공기업이 발주하는 토목공사, 채탄공사, 개보수공사, 확장공사 등에 주력하였다. 불황기가 있었지만 남화토건의 난이도가 높은 ‘국가 항만공사 기술’과 ‘주한미군 공사 수주’로 안정적인 성장을 하였다. 이중 남화토건이 주한미군 공사로 특화된 이유는 최 회장의 자서전에서 찾을 수 있다.

 

미국인들은 우리나라처럼 로비가 통하지 않는다. 그들은 입찰 방법에서도 최저가가 아니라 객관적이고 엄정한 심사를 통과한 업체에게 공사를 맡긴다. 아무 연고도 없는 우리 회사가 국내 굴지의 업체들을 제치고 미군부대 공사를 계속 수주할 수 있었던 것은 이 때문이다. 우리는 미국인들의 ‘합리주의’를 배워야 한다...

 

최 회장은 1965년 미8군 공사를 시작으로 1979년 지역 최초로 ‘주한미군 군납수출업체’로 등록하면서 본격적으로 미군공사에 참여하였다. 미군 FED(Far East District, 미극동공병단)로부터 ‘품질평가 최우수기업’으로 인정받고, CCK(Contract Command Korea, 주한미군사령부) 공사 등을 통해 신뢰를 쌓았다.

 

 
FED 안전관리 우수증서 KRO 안전 및 품질 우수증

 

남화토건에서 형제 CEO를 37년째 모시고 있는 조영환 전무는 “미군공사는 남화의 전체 매출 중 25%를 차지한다”며 “미군공사는 훗날 코스닥(KOSDAQ) 상장에 큰 도움이 되었다”고 말했다. 그 이유는 “코스닥 비상장사의 경우 미군공사 수주규모가 평균 100억~200억 원이지만, 상장사의 경우 시공능력을 인정받아 최대 500억 원까지 수주규모를 늘릴 수 있기 때문”이란다.

 

그렇다고 최상옥 회장이 성공의 길만 걸었던 것은 아니다.

그의 자서전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건설업은 노동자를 적절하게 잘 쓰느냐 못 쓰느냐에 따라 회사의 운명이 결정되는 수가 있다. 그런데 대부분의 ‘노동자들은 노가다판의 근성’에 젖어 있는 사람들이 많다. 그들은 이 공사판에서 저 공사판으로 떠돌아다니는 습성이 몸에 밴 사람들이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현장에 나타나지 않거나 금방 다른 공사판으로 떠나버린다. 그런 노동자들을 부리면서 난공사를 계속하고 있으려니 고통은 이만저만 아니었다.

사람을 쓰고 부린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나도 사람을 잘못 써서 큰 타격을 받은 경험이 있다. 특히 1983년 대구상고 신축공사 때에 현장소장이 하도급자와 단합하고 경리를 속여 7억여 원을 횡령해버린 사건은 회사로서 큰 타격이었다.

눈앞의 이익을 따라가다가 허방다리를 밟아버린 셈이었다. 우리 회사가 그 후 다시 그런 전철을 밟지 않게 된 것은 그 공사가 남긴 값진 교훈이다.

 

이를 요약해보면 사고는 결국 일보다 ‘사람’에서 비롯된다.

1970년 입주 23일 만에 붕괴된 ‘와우아파트 사건’, 1994년 ‘성수대교 붕괴’와 ‘삼풍백화점 참사’ 등은 모두 대한민국의 급성장 추구에 따른 일명 ‘빨리빨리 문화’가 낳은 모순들이다.

 

‘남화오십오년사’에서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우리는 빨리빨리 문화를 배척한다. 그것은 결국 예산낭비와 비민주성, 부실시공을 가져왔다.... 공사단축이 자랑거리가 아니다. 빨리빨리 문화가 자리잡은 일면에는 건설근로자의 장인정신이 부족하다는 것도 하나의 요인이다.... 우리는 장인정신 회복이 중요하다...

 

이에 대해 최상옥 회장은 “안전은 책임강화가 핵심”이라면서 “남화는 하청공사 전 과정을 하도급 업체에게 주는 일이 거의 없다. 부분적으로는 맡길 수는 있지만, 전체 시공관리는 책임자가 책임질 수 있도록 남화 임직원이 직접 관리한다”고 설명했다.

조영환 전무는 “이러한 책임경영을 발판으로 남화토건은 법인 설립 이후 지금까지 한 번의 적자 없이 안정적인 건설회사로 성장하였다”며 “최상옥 회장님은 돌다리도 두드리고 건너는 스타일이다. 그것은 큰 리스크(risk)를 줄이기 위해서다. 그래서 남화는 대강 하는 일이 없다. 민간공사는 ‘제 값 받고 제대로 공사해주자’가 회장님의 경영방침”이라고 소개했다.

 

최상옥 회장의 기업관은 ‘정도경영(正道經營)’이다. 그는 ‘기업의 목적은 이윤추구에 있지만, 윤리와 도덕성의 범위 내에 존재해야 한다’는 원칙을 ‘남화오십오년사’에 기록하였다. 이에 대한 실천방안은 ‘3무(無) 경영’이었다.

첫째, 차입금이 없다. 큰돈을 벌기 위해 무리수를 두기보다 성실한 자세로 한걸음씩 탄탄하게 쌓아올리는 안전 성장을 추구하였다.

둘째, 최근에는 어음이 없다, 협력업체가 절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건설업의 특성상 어음을 쓰지 않는 기업은 거의 없지만, 최 회장은 하도급 업체의 공사대금을 어음으로 발행하지 않고 매달 공정에 따라 ‘전액 현금’으로 지급하였다. 이는 기업 간 상생의 실천을 의미한다.

셋째, 편법의 축재나 투기, 탈세를 하지 않았다. 최 회장은 부동산 투기로 일확천금을 버는 시절에도 실수요 외에는 한 건의 토지도 사고팔지 않았다. 또 일반 건설사들이 아파트 시장에 진출해서 호황을 누릴 때도 남화토건은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아파트 부지 선정과 매입 등이 정당한 방법으로 어렵다는 판단과 부동산 매입의 과정에서 불합리한 요소들과 모순된 타협을 멀리하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최상옥 회장의 원칙은 ‘성실’이라는 신념이 흔들림이 없이 지속되었기에 가능한 것이다. 최 회장은 이를 ‘최씨고집’으로 표현하였다. 그는 자서전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이 성과들은 나의 ‘최씨고집’이 이룩한 결과라는 자부심을 느낀다.

‘최 씨 고집’이라는 말을 긍정적인 의미로 해석하고 싶다. 일신상의 이익과 만족을 위해 내세우는 고집은 남을 피곤하게 하고 사회를 해롭게 하지만, 양심에 비추어 부끄럽지 않은 일에 자기주장을 고집하는 것은 떳떳하고 정의로운 일이다. 나는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 사회에 이바지하는 노력의 하나로, 평생 ‘최씨고집’을 집착하여 살아왔다고 자부한다.

 

이것이 남과 다른 ‘최상옥의 창의’이다.

 

 

최 회장의 동생 석봉(碩峰) 최상준 대표이사 부회장은 1938년생으로 형과는 11살 터울이다.

형이 20세에 남화토건을 창업했으니 동생은 어릴 때부터 건축 일을 보며 자랐을 터. 동생 최상준이 어깨너머로 배운 건축업을 자신의 숙명으로 받아들었음은 그의 고등학교(건축과)와 대학(건축공학과)의 전공, 그리고 대학원(경영대학원) 진학으로 알 수 있다.

 

1964년 최상준은 전남대 졸업과 동시에 남화토건에 입사했다. 27살에 입사하여 1993년에 대표이사, 2003년에 부회장에 취임하였으니 CEO(Chief executive officer; 최고경영자)에 오르기까지 30~40년이 걸렸다. 최근 ‘갑질’ 논란의 진원지인 대기업 가족들의 초고속 승진과 대조를 이루는 대목이다.

 

1993년이 남화토건의 CEO가 바뀐 해이다. 당시 최상옥 회장의 나이 67세, 일반적인 기업의 CEO라면 한창 일할 나이에 모든 권한을 내려놓고 일선에서 물러났다. 그것도 아들이 아닌 동생에게 경영권을 물려준 일이 궁금하다. 이에 대해 최 회장의 장남 최재훈 대표이사(65세)는 “아버님은 본분을 잘 아시는 분”이라며, 그 이유는 “동생에 대한 믿음 때문”이라고 답변했다.

이러한 최상옥 회장의 결단은 결과적으로 IMF(International Monetary Fund; 국제 통화기금) 위기를 구한 선견지명(先見之明)이 되었다.

 

대표적인 최상준 CEO의 리더십은 ‘단 한 명의 구조조정도 없이 IMF를 극복한 일’이다. 당시 기업의 구조조정이나 정리해고는 ‘시대의 흐름’이었지만, 최상준 CEO는 이를 역행한 것이다. 혹시 경제적인 여유가 있었을까?

그는 “당시 회사는 최소 40%의 직원을 내보낼 수밖에 없는 형편이었다”고 회상했다. 그리고 그때의 각오를 “같이 살자!”는 말로 정리했다. 도대체 무슨 배짱으로 그런 도전을 했을까?

 

남화 사보 10호 ‘인생의 길’이란 칼럼에서 '그의 정신'을 엿볼 수 있다.

 

실패를 무서워하지 말자. 고통의 순간을 피하지 말자. 사소한 실패라도, 조그마한 고통이라도 의미가 있는 법이다. 사람은 고통의 참 의미를 깨우치고 그 뜻을 배우기 위해 태어난 존재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일감이 없는 직원들은 회사에서 무엇을 했을까?

최 부회장은 ‘임직원 교육’을 실시했다. IMF 초인 1998년 말부터 2000년 중반까지 노동부의 ‘고용유지교육’ 지원을 받아 6~9개월을 ‘건설기술 향상’과 ‘인문학 소양’ 등 오직 ‘교육’으로 버텼다.

 

이러한 교육이 회사에 어떤 도움이 되었을까? 최 부회장은 “돌이켜보면 이것이 ‘남화의 저력’이 됐다. 이를 바탕으로 남화토건이 다시 일어설 수 있었다”고 회고했다.

 

남화의 대표적인 저력은 ‘교육을 통한 남화의 공사경험 노하우’다. 이것은 남화직원들에게 교육의 필요성을 깨닫게 하고, 지속적인 교육프로그램으로 정착시켜 신기술과 시공노하우를 쌓은 것을 말한다.

남화의 신기술은 ‘쾌적한 보건환경을 위한 가로 환경디자인’과 ‘조립식 호안구조’ 특허, ‘물양장 구축용 중공블록’ 실용신안등록 등 건설 시 주변 환경과 소음, 진동, 제도, 미관에 관련한 40여 건의 건설공법이 있다.

 

회사에서 직원교육은 수입이 아닌 ‘지출’이지만, 최상준 CEO는 IMF라는 위기를 ‘교육을 통해’ 기술력과 경쟁력의 기회로 삼은 것이다.

 

그러나 기술만으로 회사가 성장할 수는 없는 일이다. 건설업체의 생산성이 악화되고 도산하는 주요원인은 기술보다 내부의 불협화음, 즉 ‘노사분규’에 있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남화의 교육은 ‘노사화합’에 크게 기여하였다. 최 부회장이 건설기술 교육에만 치중하지 않고, 예절교육, 건강교육, 금연교육 등의 ‘인문학 교육’도 중시하였기 때문이다.

어느 회사든 노사화합은 ‘장기근속자’를 보면 알 수 있다. 현재 남화토건은 총 직원 120명 중 15년 이상 근무한 직원만 40명이다. 이는 건설업의 베테랑 급 우수인력과 기술 노하우가 남화토건에 고스란히 축적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조영환 전무는 “회사에 적응하지 못한 사람들은 스스로 떠났고, 핵심인력만 남았다”며 “우리 회사는 기업혁신으로 자부심이 있기 때문에 회사를 떠나는 사람이 많지 않다”고 소개했다. 그리고 “남화의 노사화합은 전국 최고일 것”이라고 자부했다.

 

‘노사화합이 전국 최고’라는 말은 몇 가지 사례에서 허세가 아님을 알 수 있다.

‘전 직원의 금연 성공’ 사례가 대표적이다.

최 부회장의 저서 2권, ‘담배 한 개비 당 6분씩 수명 줄어’에서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우리 회사 전 직원이 금연하고 있다. 15년이란 오랜 기간 동안 엄청난 고통 뒤에 온 성과다. 신입사원은 금연을 전제로 하고 입사가 허용된다.

 

최상준 부회장은 “나는 하루에 두 갑 반을 피는 골초였는데, 1983년 1월에 담배를 끊었다. 담배를 끊는 직원에게 격려금도 주고 금연운동을 해봤지만, 돈으로는 해결되지 않아서 흡연자에게 호봉 승급을 안 해주었더니 금연에 성공했다”며 “호봉을 돈으로 환산하면 얼마 안 되지만, ‘동료 간의 경쟁심’을 자극한 결과”라고 말했다.

그리고 “담배를 끊는 것은 개인 건강에도 좋지만, 그 가족들이 더 좋아했고, 회사의 생산이나 안전 면에서도 큰 도움이 되었다”며 금연의 일석다조(一石多鳥) 효과를 강조했다.

전 사원의 금연은 15년 동안 금연교육을 포기하지 않는 성실한 CEO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 아니겠는가.

 

이러한 ‘노사화합의 리더십’은 ‘전 사원 헌혈’에서도 찾을 수 있다. 1997년 남화토건 직원 한 명(김경호 대리)이 백혈병으로 병상에 누웠을 때, 가장 먼저 헌혈증(20장)을 병원에 전달한 사람이 최상준 부회장이다. 이 일을 계기로 남화토건 전 사원의 헌혈 동참을 이끌어냈다. 그는 “헌혈은 내 건강에 좋다. 또 건강해야만 할 수 있는 게 헌혈”이라며 ‘헌혈예찬론’을 역설했다.

 

 
헌혈 98회 기념촬영과 ‘최고령 최다수’ 헌혈과, 헌혈 홍보를 위한 기념시구

 

최 부회장의 헌혈에는 ‘남다름’이 있다. 60세부터 시작해 6년 동안 총 98회 헌혈을 한 것이다. 이것은 매달 두 번씩 한 번도 거르지 않고 헌혈했을 때 가능한 횟수다.

최 부회장은 “두 번만 더 하면 백 번인데... 헌혈을 더 이상 못 하게 된 현실이 아쉽다”고 했다. 만 65세까지 헌혈이 가능하다는 규정 때문에 100회를 채우지 못하고 끝난 것이다. 하지만 그는 2013년 세계헌혈의 날에 대한적십자사로부터 ‘최고령 최다수 헌혈자’란 표창을 받았다.

 

이러한 최 부회장의 ‘성실한 나눔’은 사내에만 머무르지 않았다. 학교, 불우이웃, 시민단체, 종교단체 등 지역사회 곳곳으로 퍼져나갔다. 이중 최 부회장이 가장 오랫동안 나눔을 실천한 곳은 ‘학교’다.

 

특히 자신의 ‘모교’에 남다른 열정을 쏟았고, 그 흔적은 광주공업고등학교 내에 남아 있다.

 

 
광주공업고등학교의 ‘최상준공적비’와 ‘동창회 최상준역사관’

 

광주공고 6회 졸업생인 최 부회장은 모교에 장학금 2억 원을 기부하고, 2000년에 ‘동창회장’이 되어 다시 2억 원을 기증하고 장학재단을 설립하였다. 그런데 그의 '기부 형태'도 남다르다. 일반적인 기부는 동창회장 임기 내에 머무르는 것에 반해, 최 부회장의 기부는 임기 후에도 계속된 것이다. 그는 2007년에 1억 원을 추가로 기부하여 교내의 결손가정과 신체 부자유 학생들에게 장학금이 지급되도록 하는가 하면, 2012년에 다시 1억5천만 원을 쾌척하여 ‘광주공고 역사관’ 건립에 도움을 주었다.

 

대학 모교인 ‘전남대’도 마찬가지다. 최 부회장은 어려운 후배들을 위한 장학금을 후원하고, 부족한 교육공간을 해결하기 위해 건물을 증축하고, 새 강의실을 제공하였다.

뿐만 아니라 1995년~1997년 ‘전남대 건축과 동창회장’을 시작으로 1996년~2007년까지 10년 간 전남대 총동창회 부회장, 1999년~2008년까지 9년 간 ‘전남대 공대 총동창회장’, 2007년~2009년 ‘전남대 총동창회 이사장’, 2009년~2013년 ‘전남대 총동창회장’의 연임(29대, 30대)까지 무려 ‘20여 년 간 모교에 봉사’하였다.

 

 


전남대학교 총동창회장 취임식(2009)

 

최 부회장의 모교 봉사는 ‘전남대 총동창회장’ 취임에서 꽃을 피웠다. 그는 취임사에서 “전국 및 세계 각지에 흩어져 있는 ‘동문 네트워크’를 구축해 세계적인 대학으로 성장하는 데 초석이 되겠다”는 공약을 걸고, 역대 동문회장 중 최초로 ‘동문 찾기 운동’을 벌여 10만여 명의 동문 등록을 완수했다.

 

이러한 노력은 2013년 ‘전남대 명예공학박사’ 수여, 그리고 전남대 공과대학에 ‘최상준홀’과 경영대학에 ‘최상준홀’로 명명되어 남아있다.

 

 

 
전남대학교 공과대학의 ‘최상준홀’과 경영대학의 ‘최상준홀’

 

60~70대의 나이에 20여 년 동안 개인의 재산과 열정을 모교(오성초, 화순중, 광주공고, 전남대)에 쏟아 부었다는 것은 ‘모교사랑’ 이외에 달리 해석할 길이 없다. 그리고 그의 저서 3권, ‘인재 육성이 가장 큰 투자다’에 또 다른 이유가 나온다.

 

우리는 흔히 투자라고 하면 눈에 띄는 자본만을 생각한다. 그러나 인재육성 투자가 결과적으로 가장 많은 이윤을 가져다주는 투자다. 그런데도 기업들은 사람들에게의 투자를 무척 꺼린다. 단시간 내에 나타나는 효과가 없을 뿐 아니라, 괜한 투자를 했다는 잘못된 인식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부터라도 인재육성의 투자에 인색하지 말자. 그에 따른 이윤은 크게 나타날 것이다. 그리고 튼튼한 회사의 버팀목이 될 것이다.

 

최 부회장은 ‘인재육성이 가장 큰 투자’라는 신념 아래 이를 ‘성실하게 실천’한 것으로 풀이된다. 그리고 그는 2015년에 ‘자신의 꿈을 이루었다’고 소개했다. 모교인 광주공고 정문입구에 ‘석봉도서관’을 건립하여 광주시교육청에 기부채납한 일이다.

 


광주중앙도서관 분관 ‘석봉도서관’ 개관 (2015)

 

최 부회장은 "도서관 기증이 오랜 꿈이었다. 주민과 학생들이 도서관에서 책을 많이 읽어 삶에 보탬이 된다면 제 꿈을 이룬 것”이라고 감격해 했다. 그래서 그동안 모은 장서 8,000여 권, 미술품 80여 점, 각국의 공예품 300여 점과 2016년 1개 층 추가 증축까지 아낌없이 지원하고 있다. 그는 왜 이토록 ‘도서관’을 열망했을까?

 

최상준의 저서 곳곳에 그 이유가 나온다.

 

읽는 책의 가치는 헤아릴 수 없는 보물이다. 자기를 일깨워주고 유익한 정보를 주고 우리가 사는 목표를 세워 걸어가야 할 길을 가르쳐준다. 이러한 보물을 우리는 왜 이용하지 못하는가. 좋은 책을 많이 읽자.... 책 읽는 습관을 갖자. <6권>

 

독서는 그 어떤 행동보다 가치가 있다. 좋은 책을 읽으면 몇 년 동안에 걸쳐 얻을 수 있는 정보를 단 몇 시간에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4권>

 

그리고 ‘책 읽는 방법 5가지’를 제시하였다.

 

① 좋은 책을 가려 읽자 ② 희망을 주는 책을 읽자 ③ 고전을 읽자 ④한 권의 책이라도 뜨겁게 사랑하자 ⑤ 독후감을 쓰자 <1권>

 

좋은 책으로는 ‘위인전’을 추천했다. “위인들의 삶 속에서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생길뿐만 아니라 어려움을 어떻게 극복하고 성공할 수 있었는지를 배울 수 있기 때문”이란다. 그는 “사람이 책을 만들지만, 책이 사람을 만든다”며 독서의 중요성을 재차 강조하였다.

 

그리고 최상준 자신도 책을 펴냈다.

2004년 ‘남화가족이 살아가는 길’부터 2014년 ‘남화가족이 더불어 사는 길’에 이르기까지 10여 년 동안 총 8권에 달한다. 이 책들은 최 부회장이 지난 수십 년간 독서나 강의 도중 ‘좋은 부분’이나 ‘삶의 지혜’를 메모해서 엮은 책이다. 그런데 이 책들은 일반 책과 비교해서 ‘다른 점들’이 많다.

 

- 출판 경험이 전무한 이공계 출신이 자신의 전공과 무관한 ‘문학’을 다루었다는 점

- 모든 제목에 ‘남화가족’이 빠지지 않고, 발행이 일반 출판사가 아닌 ‘남화토건’이라는 점

- 한 꼭지의 글이 평균 3~4페이지로 짧고, 일반 책보다 폰트(font)가 2 포인트 정도 커서 읽기 편하다는 점

- 모든 책의 마지막 부분은 늘 ‘유머(humor)’로 끝난다는 점

- 70대의 저자가 10년 동안 ‘연달아 8권’의 책을 출판했다는 점, 시쳇말로 ‘늦바람이 무섭다.’

 


최상준의 수필 총 8권 (남화가족이 살아가는 길, 남화가족이 잘 사는 길 등)

 

최 부회장은 ‘늦바람’이 난 이유를 ‘책 머리말’에 소개하였다.

 

나는 책을 쓸 줄 모른다. 그렇지만 읽기는 아주 좋아한다. 나에게는 한 가지 버릇이 있다. 위대한 위인들의 전기나 삶의 지혜를 주는 글들을 읽고 감동을 받으면 그것을 스크랩하거나 메모하여 보관하는 습관이 있다. 지금도 그 내용들이 상자에 가득 쌓여 있다. 그 상자는 삶을 명작으로 만드는데 필요한 날카로운 직관이나 실제적인 아이디어로 보존되어 있다. 이런 모음이 이 책을 탄생시키게 되었다.

 

책 출판 경험이 전무했던 그가 연달아 8권의 책을 쓴 비결은 바로 ‘메모 습관’이었다. 그의 저서 4권, ‘메모는 기억보다 강하다’에 다음과 같은 글이 나온다.

 

하루에도 수십 건의 메모를 하고, 다시 그 메모를 버리고 지우는 일상을 반복하고 있는 나로서는 ‘왜 메모를 활용하지 못할까?’하는 아쉬움이 있었다.

많은 책을 읽으면서 기억해 둘만한 내용은 밑줄 그어 놓고 다 읽은 뒤 메모, 스크랩해서 항목별로 정리해 두면 어떤 경우에 스피치로 활용할 수 있고 책을 쓸 때도 활용하면 좋은 작품이 될 것이다.

 

이중에서 ‘왜 메모를 활용하지 못할까? 하는 아쉬움’이 필자가 발견한 ‘최상준의 창의’이다. 창의는 ‘왜’라는 질문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최 부회장은 앞으로도 “남화 70주년인 올해(2016년) 9권을 출판하고, 마지막 10권은 이제까지 모든 책의 핵심만 간추려서 핸드북으로 만들고 싶다”는 계획을 밝혔다.

최 부회장의 성과는 결국 ‘메모하는 성실’과 ‘메모를 재활용하는 지혜’가 더해졌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최 부회장의 ‘늦깎이 출판’에서 필자는 몇 가지 교훈을 얻었다.

-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늦은 게 아니다.

- 새로운 일도 ‘시작이 반’이니 나머지 반만 하면 된다.

- ‘성실하게만 한다면’ 누구나 할 수 있다.

 

나이와 전공을 잊은 최상준의 열정은 2007년 ‘현대문예 수필 부문’에서 ‘신인상’을 안겨주었고, 70세의 나이에 수필가로 등단하게 되었다. 이는 최상준의 ‘또 다른 성실의 성과’이다.

 


70세에 현대문예 수필 부문 ‘신인상’ 수상

 

필자는 신인상 ‘수상작품’이 궁금했다. 그의 저서 7권, ‘손이 두 개 달린 뜻은’이 그것이다.

 

고희가 넘으니 새삼스럽게 느껴지는 것이 하나 더 있다. 왜 우리 몸에 손이 두 개 달려있는지를 알 것 같다. 여태까지 살면서 양손으로 부지런히 움직여서 나의 의식주를 해결하려고 무척이나 힘써왔다. 그런데 조물주는 우리들의 손을 자기만을 위해서 쓰라고 두 개나 달아놓지 않았을 것 같다. 오른손은 자기를 위해 달아주셨고, 왼손은 남을 위해 쓰라고 준 것이 분명하다.

 

심사위원들은 심사평에서 “이 작품은 착상이 신선하고 설득력을 갖춘 작품으로서 독자의 눈길을 끌어당긴다. 독자의 깨달음을 유도할 뿐 아니라 앞으로 작가 자신이 가야할 길을 명확히 밝히고 있다”고 평가했다.

 

그의 글에는 항상 ‘삶의 지혜’와 함께 ‘배려’가 빠지지 않는다.

대표적으로 2권, ‘입은 하나, 눈과 귀는 둘인 의미’라는 작품이 있다.

 

눈은 시야를 넓게 많은 것을 보라고 두 개가 달려있다.

귀가 좌우로 달린 것은 한 쪽 말만 듣지 말고 양쪽 말을 다 참고해서 귀 담아 들으라는 것이다. 또한 한 쪽으로 듣고 한 쪽으로 흘러버리라고 좌우로 달려있다.

눈과 뒤는 둘인데 입이 하나인 이유는 많이 보고 듣고 말은 적게 하라는 뜻이다.

 

최상준 부회장이 여태 ‘나눔’과 ‘배려’를 강조한 이유는 오늘날 ‘우리사회가 가장 필요하지만, 가장 부족한 부분’이다.

그는 “자기 자식만 잘 가르치겠다는 사교육은 사회병패다. 남을 배려하고 사는 것은 남을 위한 일이면서도 결국은 자기 자신을 위한 일임을 알았으면 좋겠다“며 현재 우리나라의 ‘그릇된 교육’을 안타까워했다. 최 부회장이 지난 수십 년 간 ‘교육’에 열정을 쏟아 부은 이유가 아닐까.

 

그의 ‘기부’에 관한 이야기는 이미 여러 언론을 통해 보도되었다.

 

“우연히 모교에 갔는데 학교에 다니지 못할 정도로 가난한 데다 먹을거리도 부족한 아이가 많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 아이들을 도울 수 있는 일이 없을까 생각했어요. 아이들이 우리 미래를 열어갈 꿈나무인데.. 하는 안타까운 마음이 들어 기부를 시작했어요.”

 

“기부요? 주는 내가 더 행복’하니까 하는 거예요. 어려운 이웃들을 돌보면서 보람된 삶을 살아가는 것이 제가 가야 할 길이에요.”

 

“얼마를 기부했는지는 중요한 게 아니에요. 어려운 이웃을 도울 수 있다는 게 보람 있는 일이죠.”

 

“나를 찾아서 공사를 맡겨준 사람에 대한 보답, 그리고 사회에 대한 보답은 당연한 일이죠.”

 

“나만 생각하지 말고 가족과 사회와 함께 잘 살아야 보람된 삶이라고 할 수 있어요.”

 

그리고 신문기사에는 ‘기부금액’까지 명시되어 있다.

3곳의 장학재단 운영자금 14억 원, 학교의 장학기금 15억 원, 학교시설 확장 8억 원, 결식아동 후원금 2억 원, 교회발전후원금 7억 원, 통일기금 1억 원, 도서관 건립 33억 원 등 최소 70억 원에서 최대 100억 원 규모이다.

이에 대해 남화토건의 조영환 전무이사는 “알려지지 않은 것도 더 있을 것”이라고 귀띔했다.

 

어쨌든 분명한 것은 최 부회장은 대기업이 아닌 직원 120명 규모의 CEO라는 것, 회사 돈이 아닌 ‘개인 재산’을 지속적으로 지역사회에 환원했다는 것, 그리고 타 지역보다 우리지역의 저소득층 학생, 심장병어린이, 결식아동 등 소외계층 모임과 광주시내 우범지역의 예방기금 등에 집중한 것이다.

 

여기에서 필자는 최 부회장의 나눔이 ‘상대를 알고 기부했다’는 사실에 주목하고자 한다. 우리 주변을 대상으로 하는 기부는 타이밍, 기간, 규모, 형편 등을 살필 수 있지만, 상대를 잘 모르고 하는 기부는 자칫 ‘눈먼 돈’이나 ‘전시성 기부’ 등의 부작용으로 돌아올 수도 있기 때문이다.

평소 그가 “기부도 적기, 적소에 해야 보람을 느낄 수 있다”는 말과 일맥상통한다.

최 부회장의 기부는 ‘분수에 맞는 기부’, ‘실효성 있는 기부’, 그리고 무엇보다 한 번 시작하면 끝까지 정성을 다하는 ‘성실한 기부’였다.

 

우리 지역을 대상으로 하는 그의 나눔은 ‘사회봉사’ 분야에서 더욱 선명하게 드러난다. 다음은 그가 ‘70대에 가졌던 직함들’이다.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광주지역 부의장, 대한적십자사 광주·전남지사 회장, 광주경영자총협회 회장, 한국산학협동연구원 이사장, 석봉장학재단 이사장, 광주공동체 원탁회의 위원, 빛고을 결식학생 후원재단 이사장, 대동문화운영위원회 이사장, 천주교광주대교구평신도교발전위원회 회장, 전라남도자원봉사센터 이사장, 광주상공회의소 부회장, 대한건설협회 본회 부회장, 전남대학교 경영대학 자문위원, 전남대학교 총동창회장 등

 


제 17기 민주평통 간부위원 임명장 수여식(2015)

 

159cm 단신, 백발의 노인이 어떻게 이 많은 일들을 다 할 수 있었을까?

남화 창간호(2006)의 칼럼에서 그 비결이 있다.

 

주어진 시간은 모두에게 공평하다. 시간을 누가 더 갖고 덜 갖는가? 또 이것을 사고 팔 수가 있는가? 빌려 쓸 수가 있는가? 아껴두었다가 다시 꺼내어 쓸 수가 있는가?

 

그는 이와 같이 반문하며 ‘시간활용법’을 제시했다.

 

① 삶의 목표를 정하고 자기개발 시간을 관리하라.

② 주변사람을 활용하여 시간을 절약하라.

③ 미리 계획하여 낭비되는 시간을 줄여라.

④ 행동계획표는 저녁이나 아침에 만들고, 오전에는 정신을 오후에는 만남의 시간을 배정하라.

⑤ 약속시간을 지키고 기다리는 시간을 활용하라.

⑥ 일의 우선순위를 정하라.

⑦ 유익하지 않는 약속은 거절하라.

 

이에 대한 실천사례가 무엇일까? 이에 조영환 전무는 “최상준 부회장님은 여행 중에도 DVD, USB에 동영상 강의를 담아 수많은 강의를 시청하고, 평소 승용차 안에서도 전자책이나 책들을 보고 메모하신다”며 “잠시도 시간을 허투루 쓰는 법이 없다”고 증언했다.

최 부회장이 책 출판과 회사경영, 그리고 수많은 사회봉사를 성실하게 할 수 있었던 비결은 이와 같은 ‘시간을 활용하는 창의’였다.

 

이러한 창의는 ‘수상’이라는 결과로 이어졌다. 다음은 최 부회장이 ‘70대에 받은 상(賞)’의 일부이다.

 

2015년 자랑스런 한국인 대상, 한국윤리경영 대상, 자랑스러운 가톨릭경제인상, 2014년 대한경영학회 경영자 대상, 광주상공 대상, 2013년 건설의 날 금탑산업훈장, 자랑스러운 전남인상, 2012년 바티칸 베네딕토 16세 교황의 강복장, 2008년 광주전남교육공헌 종합대상, 2007년 현대문예 신인문학상, 2006년 용봉경영자 대상, 2005년 한국CEO 대상 등...

 

최상준 부회장이 지금까지 받은 ‘상의 개수’에 대해 조영환 전무는 “감사패까지 포함하면 500개가 넘는다. 그리고 최상옥 회장님은 300개 정도”라고 말했다.

우리지역에서 ‘형제가 받은 역대 최다(最多) 수상 기록’이 아닐까?

 

이렇게 수많은 수상 실적은 대가를 바라고 한 게 아니었다. 최상옥, 최상준 형제는 평소 ‘과욕 없는(無慾) 경영’을 강조하였다.

 

“끝없이 욕심을 내다 망하는 거다. 욕심을 줄이고 건실하게 나가야 한다.”

“욕심이 앞서면 무리하게 되고 허영심이 앞서면 내실을 기하기 어렵다”

“생활에 불편을 주지 않는 경제력 이외의 재산은 사회에 환원하는 게 좋다”

 

위는 언론에서도 자주 등장한 최 부회장의 인터뷰 기사들이다. 그는 욕심을 줄이고 ‘나눌수록 좋은 이유’를 그의 저서 8권에서는 ‘비운 만큼 반드시 채워집니다’에 소개하였다.

 

마음이든 물건이든 남에게 주어 나를 비우면 그 비운만큼 반드시 채워집니다.

남에게 좋은 것을 주면 준만큼 더 좋은 것이 나에게 채워집니다.

좋은 말을 하면 할수록 더 좋은 말이 떠오르고

좋은 글을 쓰면 쓸수록 더 좋은 글이 나옵니다.

슬픔을 나누면 반으로 줄어들지만 기쁨을 나누면 배로 늡니다.

기쁨의 충분한 가치를 얻으려면 그 기쁨을 누군가와 나누어 가져야 합니다...

 

최 부회장의 ‘무욕 경영’에 대한 진실성은 ‘부회장 직(職)’에서 느낄 수 있다. 평범한 CEO라면 자신이 직접 ‘회장’으로 나서든지, 형님의 그늘에서 벗어나 별도의 법인을 차리지 않겠는가. 그러나 80세 최상준은 부회장 그 이상을 바라지 않았다. 이러한 필자의 질문에 대해 그는 고개를 저으며 “한 번도 그러한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고 잘라 말했다. 그 이유는 “형님이 계시기 때문”이란다.

 

자리에 욕심이 없는 최상준 부회장은 물질도 절제를 추구하는 ‘검소 주의자’다. 그는 “이승만 전 대통령 영부인 프란체스카의 유품이 전시되어 있는 이화장(梨花莊)의 몽당연필과 낡은 예복 등의 검소한 모습을 보고 큰 감동을 받았다”면서 “검소한 생활이 복을 부른다” “검소하게 사는 사람이 최고다”라는 ‘검소의 미(美)’를 역설했다.

 

이러한 생각은 대개 ‘어린 시절의 환경’에서 비롯된다. 그의 저서 7권, ‘생일유감’에서 당시의 생활을 엿볼 수 있다.

 

나는 생일을 지낸 기억이 거의 없다. 더욱이 음력 12월 안에 가족 여섯 명의 생일이 집중되었다. 1일은 조카, 2일은 나, 3일은 아버지, 8일은 형님, 15일은 어머니, 22일은 형수. 어느 날 누나와 심하게 싸웠다는 이유로 어머니께 매를 맞아 움직이지도 못하고 누워있는데 어머니께서 해질 무렵 밭에 나가셨다 들어오시더니 “대단히 미안하다”고 하시며 눈물을 흘리셨다. “내일이 아버지 생신이고 오늘 너의 생일인데 잊고 너를 때렸구나!”하셨다. 나는 괜히 서러워서 눈물을 쏟았다...

 

그 시절 한 가족의 가난한 살림살이와 부모의 고생을 짐작할 수 있다. 최 부회장이 ‘고생’에 관한 남다른 철학을 가지고 있음은 그의 저서 3권, ‘강한 바람이 불어야 강한 풀을 안다’에 나와 있다.

 

젊어서 사서 고생하라는 속담이 있다. 온갖 역경을 이겨내야만 험난한 세파를 헤쳐 나갈 수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역경을 당해 보지 않으면 평상시엔 편안한 것을 알지 못하게 된다. 눈물 어린 빵을 먹어보지 않는 사람, 근심으로 가득한 밤에 자기 잠자리에서 울어보지 않는 사람은 역경에 처한 사람의 심정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래서 고생한 사람이어야 고생한 사람의 사정을 안다.

 

“역지사지(易地思之)는 결국 ‘고생’으로부터 나온다”는 교훈이다.

최 부회장은 “우리 집에서 나만 대학을 나왔지, 형과 누나 둘 모두 중학교에도 가지 못했다. 내가 대학에 간 것은 형님 덕택”이라고 했다. 형 최상옥이 20세에 창업한 이유도 이 때문일 것이다. 최 회장의 자서전에는 그 시절의 ‘고생’을 다음과 같이 요약하였다.

 

스무 살 때 맨주먹으로 남화토건을 창업한 나는 사장 일로부터 급사 일까지 혼자서 도맡아 왔다. 낮에는 공사장과 관청을 둘러보고 밤에는 트럭을 타고 자갈길을 달리며 자재를 운반해야 했다. 공사를 수주하거나 자재를 구입하러 서울에 출장을 갈 때면 한 달의 반 이상을 야간열차 침대칸에서 새우잠을 자야했다...

 

일제 강점기와 6·25 사변을 겪고 오직 ‘먹고 살기 위해’ 몸부림쳤던 청년 최상옥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다. 그것은 자신이 장남으로서 부모님을 모시고 동생들을 보살펴야 할 책임감 때문이었으리라. 오직 앞만 보고 달려온 최상옥이 중년이 되어서 자신처럼 배우지 못한 후학들을 위해 장학사업을 펼쳤던 이유가 아닐까. 그 증거는 최 회장이 직간접적으로 후원했던 장학회, 후원회 목록에 남아있다.

 

재광화순향우장학회, 전주최씨광주전남 화순장학회, 화순만연장학회, 광주소방서 녹수장학회, 광주학생운동유족후손장학회, 광주새로나장학회, 광주라이온스장학회, 이남장학회, 대한적십자사 광주전남지사, 전라남도공동모금회, 전남4H후원회 등. 그리고 현재는 최 회장이 재단이사장인 ‘유당문화재단’이 있다.

 

남화토건이 안정된 이후 최 회장은 동생과 함께 무등산, 광주천, 시민공원, 금남로 등의 환경개선사업과 거리질서 캠페인, 범죄예방 환경개선사업, 바르게살기운동 등을 전개하고, 광주 민주의 종, 호국무공수훈자 전공기념비, 전남 화순 향교 중수 지원 등 지역문화 발전에 기여하였다.

 

최상옥 회장은 “기부와 봉사는 실천해 본 자만이 그것이 주는 행복과 기쁨을 알고 있다. 기부는 부자라고 해서 하는 것이 아니고 부족한 가운데에서 떼어, 내 나눔을 같이 하는 게 보다 큰 의미가 있다”고 하였다.

 

이러한 최 회장이 걸어온 삶의 발자취는 광주서석고등학교 내의 ‘유당역사관(裕堂歷史館)’에 보관되어 있다.

 

 

 
최상옥 회장의 '유당역사관'과 명찰 유품

 

최상옥 회장의 자서전 ‘지성의 행로’에는 1972년 6월 17일을 ‘내 생애 감격적인 날’로 기록하고 있다. 유당학원(裕堂學園, 광주서석중·고교) 설립인가를 받은 날이다. ‘넉넉할 유(裕)’와 ‘집 당(堂)’은 최 회장의 지인인 의제 허백련 선생이 지어준 작명으로 이 학원명이 그의 아호가 되었다. 최 회장의 자서전 머리말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남을 도와준다는 것은 받는 사람보다 먼저 주는 마음이 기뻐야 한다. 도와주신 모든 이에게 감사를 드리며, 남은 생애 동안 한결같이 이런 마음가짐으로 살아가리라는 것을 스스로에게 약속한다...

 

최근 기업들이 강조하는 CSR(Corporate Social Responsibility, 기업의 사회적 책임)이나 CSV(Creating Shared Value, 공유가치창출)를 최상옥 회장은 수십 년 전부터 실천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마지막으로 “조용히 살면서, 힘이 다할 때까지 후학들을 위해 봉사하겠다”고 다짐했다.

 

최 회장의 장남 최재훈 대표는 “아버님은 90살까지 생존해 계시지만, 이제까지 욕 한 번 하시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며 “그러한 아버님이 존경스럽다”고 했다. 그리고 “물론 서운한 게 많이 있었지만, 남에게 적을 사지 않으려고 노력하셨다”고 했다. 그리고 최상옥 최상준 형제의 사이에 대해서는 “형은 동생을 믿어주고 동생은 형을 따라주고”라는 말로 정리하였다.

 

최상준 부회장은 이제까지 가장 잘 했다고 생각하는 일로 ‘남화토건을 코스닥에 상장한 일’을, 또 가장 기뻤던 일로 ‘금탑 산업훈장을 받은 일’을 꼽았다.

 

 
지역 건설업체 최초의 코스닥 상장(2012)과 금탑산업훈장 수상(2013)

 

형제가 받은 ‘산업훈장’은 남화토건의 사훈인 ‘성실’과도 닮아있다.

1984년 ‘석탑’에서 시작한 산업훈장이 IMF 위기를 넘어 2000년 ‘동탑’, 2007년 ‘은탑’, 2013년 ‘금탑’에 이르기까지 형제가 함께 한 단계씩 ‘성실의 탑’을 쌓아올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필자는 또 하나의 특이점을 발견했다. 석탑 ‘형’ → 동탑 ‘동생’ → 은탑 ‘형’ → 금탑 ‘동생’으로 형제가 서로 약속이나 하듯이 번갈아가며 수상한 것이다.

 

 


     석탑 최상옥(1984)        동탑 최상준(2000)         은탑 최상옥(2007)        금탑 최상준(2013)

 

‘형님 먼저, 아우 먼저’라는 말이 떠올랐다. 상 하나에도 형제의 우애가 담겨 있는 것인가. 필자는 최상옥 회장의 자서전에서 그 뿌리를 찾았다.

 

아버지는 아무리 일손이 딸리는 농사철에도 부모님과 형님이 계시는 큰댁 농사일을 먼저 돌보아드렸다. 장에서 해산물 같은 고기를 사가지고 들어오시면 반드시 큰댁으로 먼저 보내셨다. 집안 대소가와도 항상 돈독한 화목을 으뜸으로 삼으셨다...

 

그래서 최상옥 회장이 “성실은 내가 어릴 적에 본 아버님의 생활태도에서 배운 것”이라고 한 것이다.최근 언론매체에 기업체의 내홍으로 등장하는 ‘왕자의 난’ ‘형제의 난’, ‘갑질’ 등의 비속어는 우리나라 기업인에 대한 불신의 상징이 되었다.

 

최상준 부회장의 저서 8권, ‘나아갈 때와 물러설 때를 알아라’에 이러한 글이 있다.

 

자기 부끄러움을 모르는 것을 일천(一賤)이라고 하고, 남의 단점을 험담하는 것을 좋아하는 것을 이천(二賤)이라 하며, 자기 자랑을 많이 하는 것을 삼천(三賤)이라 하고, 남에게 아첨하는 것을 사천(四賤)이라 하며, 자기가 물러설 줄 모르는 것을 오천(五賤)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는 소학(小學)에서 ‘3가지 불행’을 제시했다. 첫째, 어린 시절에 높은 벼슬에 오르는 것, 둘째, 가족의 세력을 업고 고관이 되는 것, 셋째, 뛰어난 재주가 있어 벼락부자가 되는 것, 따라서 ‘쉽게 얻는 성공은 행복이 아닌 불행’이라는 뜻이다.

 

최 부회장은 행복을 위한 5가지 실천방안도 제시하였다.

①열심히 생활하라. ②주변사람과 가깝게 사귀자. ③남을 배려하는 마음을 가지자. ④고통을 받아들이자. ⑤가끔씩 자연의 품을 찾자. 결국 ‘행복은 노력해야 찾아온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최상준 부회장의 애송시(愛誦詩) 나옹화상의 시

 

최 부회장은 “행복은 멀리서 찾을 필요는 없다. 행복은 늘 자신의 곁에 있다. 만족한 마음을 가지면 그것이 바로 행복이다”며 행복의 본질에 대해 안내했다.

 

필자가 가장 궁금한 것은 ‘형 최상옥 회장과 한 번도 싸운 적이 없는가?’ ‘형에게 서운한 적이 없었는가?’였다. 그때마다 최 부회장은 “한 번도 없다”며 “윗사람이 잘 하니까. 그리고 또 내가 혼날 짓을 안해”라는 답변으로 정리하였다.

 

덧붙여 최 부회장은 “인생에서 ‘만남’이 가장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베드로가 예수를 만나고, 플라톤은 소크라테스를 만났듯이 나는 회장님을 만나서 이 자리까지 왔다“며 “화순 골짜기에서 농사나 짓고 있을 내가 지금 이렇게 사는 것은 모두 회장님 덕택이다”며 감사를 반복했다.

 

마지막으로 ‘형과 동생의 창의’에 대해 질문했다. 최 부회장은 한참 동안 고민 끝에 “한결같은 성실의 다짐”이라는 답변을 주었다. ‘성실(誠實)’의 뜻은 ‘정성스럽고 참됨’이다. 유당 최상옥과 석봉 최상준의 창의는 ‘정성스럽고 참된 인생을 살기 위해 매일 매시간 다짐하고 또 다짐했던 것이다.

    
유당 최상옥 회장, 석봉 최상준 부회장과 성실 비석

 

유당은 ‘넉넉할 유(裕)’에 ‘집 당(堂)’, 석봉은 ‘클 석(碩)’에 ‘봉우리 봉(峰)’이다. 형은 성실로 ‘넉넉한 집’을 만들고, 동생은 또 그 안에 성실하게 ‘큰 봉우리’를 세워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했으니 우리는 이들을 ‘아름다운 형제’로 기억할 것이다.

 

 

최상옥 최상준 형제의 창의 요약

 

  • , 무어음, 무편법으로 성실의 기틀을 다짐

성실한 경영자의 인수인계와 ‘교육’을 통한 위기 극복

성실한 기부와 배려를 통한 ‘나눔’ 확산과 '더불어 행복'

 

손재주가 좋은 최상옥은 인생의 갈림길에서 ‘새로운 기술’을 선택하고 이를 배워서 남화토건을 창업하였다. 그는 ‘성실’과 ‘정도경영’을 신념으로 토목과 건축공사에서 ‘제 값 받고 제대로 공사“를 실천했고, 그 결과 ‘미군공사’ 등에서 신뢰성을 인정받으며 탄탄한 회사로 성장하였다. 회사의 이윤은 학교 설립과 장학재단 설치, 지역의 문화예술계, 체육계 등에 환원하였다. 한편 최 회장은 동생 최상준을 고등학교(건축과)와 대학(건축공학과)에 진학시키고 졸업과 동시에 사원으로 맞이하여 입사 30년 만에 모든 경영권을 동생에게 넘겨주었다.

 

동생 최상준 CEO는 이러한 형의 ‘성실’을 이어받아 상생의 리더십으로 회사를 이끄는 한편, IMF 위기에서는 직원 구조조정 없이 ‘교육’으로 돌파하는 승부수를 띄웠다. 직원교육 중 건설 교육은 ‘신기술 개발’의 밑거름이 되고, 인문학 교육은 ‘노사화합’의 계기가 되었으며, 금연 교육은 15년 간 노력 끝에 ‘전 직원 금연’을 성공토록 했다. 또 60세에 헌혈을 시작하여 ‘최고령 최다수 헌혈자’로 선정되고 ‘전 직원 헌혈 동참’을 이끌어내는 등 모든 일에서 ‘솔선수범 리더십’을 발휘하여 산업훈장 수상에서 석탑 → 동탑 → 은탑 → 금탑에 이르는 ‘성실의 금자탑’을 쌓아올렸다.

 

최 부회장은 회갑, 칠순을 넘기면서 일반 CEO와 다르게 돈을 버는 일보다 ‘돈을 쓰는 일’에 더 많은 정성을 쏟았다. 지역의 심장병어린이, 결식학생 등 불우이웃을 돕기 위해 10여 개 이상의 시민사회단체에서 다각적인 봉사활동을 펼쳤다.

또한 모교인 오성초와 화순중은 물론, 전남대와 광주공고의 동창회장이 되어 후배들을 위한 장학금을 체계화하고 부족한 학교시설을 증축하고 흩어진 동문을 결집시키는 등 20여 년 간 ‘모교사랑’에 앞장섰다.

 

뿐만 아니라 팔순(八旬)을 앞두고 모교인 광주공고 정문 앞에 ‘석봉도서관’을 기증하여 오랜 숙원인 ‘도서관 건립’의 꿈을 이루었다. 또 자신의 수십 년간 ‘메모들을 재활용’하여 80대의 나이에 총 9권의 책을 출판했다. 이것은 그의 성실한 ‘메모습관’과 ‘메모를 재활용하는 창의’, 그리고 ‘시간을 아끼는 지혜’가 더해진 결과이다. 최 부회장은 이 책을 통해 자신의 삶을 정리하고 이웃에 지혜와 사랑이 전파되기를 학수고대하고 있다.

 

이 모든 일들은 형이 동생을 믿고, 동생이 형에게 늘 감사했기에 가능했다.

형제는 평생 동안 ‘검소’와 ‘성실’을 실천하면서 행복한 삶을 이루고, 이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지역 인재를 육성하며, 주변의 어려운 이웃을 돕고자 노력하였다. 그것은 내가 나를 발전시켜 행복하고, 또 이웃을 사랑하여 더불어 행복할 수 있는 최상옥 최상준 형제의 ‘아름다운 창의’다.

 

지금도 가방을 들고 출근하는 ‘난형난제(難兄難弟)’의 90대, 80대 형제는 오늘도 ‘성실’을 실천하고 있다. 한 결 같은 성실의 다짐, 그것이 진정한 창의다.

 

<전남대학교 문화전문대학원 김경수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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