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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등산에서 온 편지’ 민웅기(4)

청춘일기(4)

  • 입력 2016.04.19 11:13
  • 수정 2016.05.04 18:18
  • 기자명 민웅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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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일기(4)  학창 시절을 추억하다

▲ 필자 민웅기

 

어느 회사의 입사 면접에서 이렇게 말했던 기억이 난다.

저는 한 번의 인생에 세 번의 탄생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부모님으로부터 이 몸을 받고 태어난 것이 첫 번째 탄생입니다.제게 던져진 운명, 그것이 제가 하늘로부터 받은 저의 존재의 바탕이고 존재의 근거입니다.

아주 오랜 땅의 인연들, 다시 말해서, 시간과 공간을 직조하며, 그 많은 인류의 조상과 혈통을 면면히 이어온 내림의 맥락으로부터 물려받은 은덕과 재능이, 지금과 미래를 지탱하고 방향지우는 제 자신의 뿌리이고 자산입니다. 저의 잘나고 못난 모든 것은 이로부터 출발했고, 여기에 의지하고 있습니다.

▲  © 민웅기

두 번째는 종교 활동과 경험을 통해서 재탄생한 저의 모습입니다.

부모님의 영향으로 어릴 때부터 교회를 다녔습니다. 가난하고 의지할 데 없는 제가 기대고 마음껏 활동할 수 있는 터전이 되어 준 곳, 그리고 마음의 갈증을 해갈할 수 있는 샘물을 끝없이 퍼 올릴 수 있도록 영혼의 샘터가 되어 준 곳, 나아가서, 청소년들의 사회적 활동과 경험의 장이 부재했을 뿐더러, 엄격하게 제약되었던, 당시의 시대적 상황 속에서, 일말의 빈틈, 숨 쉴 수 있는 여유 공간을 제공할 수 있었던 곳, 그런 공간으로서 교회는 저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런 활동과 경험으로부터 제가 배운 것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까닭에, 이것이 저의 두 번째 탄생이 됩니다.

그리고 세 번째 탄생은 대학의 과정과 활동으로부터의 배움을 통해서였습니다.

대학은 제게 행운 이었습니다. 대학시절에 제가 경험하고 배운 것은 이제부터의 저의 삶의 방향과 구체적 실천을 담보할 무기가 되어줄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낭만과 정의와 철학, 이 세 가지 주제가 제가 대학과 캠퍼스와 그리고 이 시대에 던진 질문이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캠퍼스에서, 도서관에서, 그리고 거리의 곳곳에서 저의 의식과 실천의 영역에 들어온 것은 먼저, 우리 시대의 정신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  © 황의동

나, 라고 하는 존재의 바탕에 깔린 역사가, 일차적으로 제게 말을 걸어왔고, 제가 서 있는 리얼리티의 한 복판에서 저에게 손짓하고 있었습니다. 저의 역사의식으로 그 리얼리티에 응답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고금과 동서와 좌우를 종횡하면서 제가 구한 답은 민주와 통일과 공동체로 모아졌습니다.

그것은 나와 우리의 특수성으로부터 출발해서, 동서와 고금, 좌우, 하늘아래와 하늘 위의 모든 세계를 통섭하여 보편에 이르고, 그리고 다시 그 보편으로부터 나와 우리라는 구체성으로 복귀해 들어오는, 길고 지난한 여정이 될 것입니다.

의식과 문화, 그리고 생태에 관한 저의 질문들에 대답하기 위한 공부와 실천은 지금부터가 될 것입니다. 밝은 깨달음의 의식을 자득하는 것, 바로 그것이 저의 삶을 행복하게 하고, 동시에, 저와 함께 존재하는 이웃과 공동체의 평화와 행복을 위해서 반드시 수행되어야할 덕목일 것입니다.

하늘이 저에게 깔아준 바탕과 조상님들과 부모님으로부터 물려받은 은덕, 그리고 학교와 종교 활동에서 배운 풍부한 지식과 경험을 가지고, 이제 사회로 진출하고자 합니다. 직장은 바로 그런 저의 인생의 본색을 마음껏 드러내고 실현할 수 있는 장이 되어야 하고, 그렇게 되도록 노력할 것입니다.

돌이켜 보건데, 우리의 학창시절, 그 황금 같은 시기에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별로 없었다. 공부 말고는 다른 출구가 없었고, 주변을 돌아보면 온통 할 수 없는 것, 해서는 안 될 것뿐이었다.

금기,그것은 어른들이 학창시절의 우리에게 퇴로를 차단한 채, 물리고 채워준 재갈과 차꼬였을 것이다.

▲  © 황의동

일제가 남긴 제복의 유산인 거무튀튀한 교복을 입고 다녔던 시절, 군인들과 차별될 수 없는 빡빡머리 혹은 상고머리로, 교련복을 입고서 정규 수업시간에 군사훈련을 받지 않으면 안 되었던 시절, 치마의 길이와 머리칼의 길이를 자로 재어 단속했던 시절, 통행금지가 시간개념과 통행시간을 엄격히 규제했던 시절, 우리의 학창시절은 그래서 말 그대로, 금기 투성이 였다.

청춘은 길들여지지만, 길들여지지 않는다.
구속과 부자유로부터 일탈을 꿈꿀 수 없다면, 청춘이 아닐 것이다.

일탈,그것은 창조를 내오는 불온함이고,
결핍을 방편으로 해방을 수행하는 비장의 무기이리라.

혹시, 내가 만약에, 정말로 만약에, 학창시절로 다시 돌아갈 수 있다면, 그런 일탈을 기도할 수 있을까? 생각만 해도 가슴 뛰는 일이다. 가슴 벅차오를 일이다.

중등부 학생회장을 처음 맡았을 때, 그때 대학생이었던 교회 선생님은 나를 보고 카리스마가 있다고 했었다. 카리스마의 말뜻을 몰랐던 까닭에 대학생이었던 형에게 그 뜻을 물었다. 그리고 그것이 신적인 권위를 뜻하는 말이나, 때로 독선적이라는 부정적 의미로도 쓰이는 말이다, 고 새겨들었었다. 그러한 카리스마를 태생적으로 장착하고 있었던 나는, 그 덕택에 중, 고등 시절의 여러 소임과 직분을 강력하게 수행할 수 있었을 것이다.

내가 교회 자치활동을 얼마나 열정적이고 즐겁게 수행해왔는지는, 그때 나의 전도 실적- 우리 반 60명 중에서 15명이나 교회에 데리고 왔다- 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런 활동 가운데 가장 재미있었던 것은 역시, 여름과 겨울 두 번의 수련회였다. 2박- 3박의 기간을 틈타, 강가나 산으로 나가서 텐트를 치거나 시설을 이용해서 진행하는 수련회는, 우리에게, 종교집회라기보다는, 캠핑과 오락의 기회를 제공하였고, 억압된 지배질서와 규율, 그리고 공부로부터 해방과 일탈을 만끽하게 해주었던, 말 그대로, 자유의 공간이었다.

▲  © 민웅기

그리고 그 수련회의 밤과 새벽은, 기획되고 의도된 프로그램 자체로부터의 일탈마저 꿈꾸고 누리게 하는, 해방의 틈새가 되곤 하였다.

달무리 진 해변이나 강가, 혹은 별빛 쏟아지는 숲속과 들판에서, 기타를 치며 둘러앉아 불렀던 그 시절의 주옥같은 노래들이, 지금도 내가 기억하고 좋아하는 애창곡으로 자리 잡고 있고,

동화 같은 유토피아적 이상향을 마음속 깊이 심어주었던, 맑고 순수한 동요와 가곡들이, 그 아름다운 시간과 공간에 불리어졌던 우리들의 잊을 수 없는 추억이 되었다.

그 틈에도 몰래, 자리를 일탈하여, 달빛마저 그 빛을 감추어 희미하고 어둑한 구석의 곳곳에서, 무언가를 속삭이며 웃고 울었던 동무들,

그 동무들은 지금, 어디에서 무얼 하고 있을까. (계속)

편지를 보낸 민웅기는 전 여수YMCA총무였다.  조선대 평생교육원에서 ‘노자 도덕경’을 강의했으며 현재 무등산 인문학당 강사다. 「태극권과 노자」저자이고, ‘무위태극선’,'송계선원' 대표이다. 송계선원은 노자와 장자,공자와 맹자,원효와 최수운의 삶과 지혜를 공부하고, 태극권과 명상 등을 수련하고, 자신의 몸과 마음을 수행하는 공간이다.   필자 연락처 : 전남 화순군 이서면 송계길39. 손전화 010ㅡ3621ㅡ9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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