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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사‘ 증언 18년째...‘총살‘ 누명 벗나?

  • 입력 2012.06.03 11:46
  • 기자명 심명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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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명예 찾아 나선 지 42년... 전사 확인한 김소동의 육성녹음

세계박람회로 인해 여수는 지금 세계인의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박람회는 분명 여수를 한 단계 업그레이드시켜 놓은 국제적인 행사임이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박람회 도시 여수의 화려함 뒤에는 국가로부터 희생당하고 있는 여수 시민들도 있습니다. 61년 전 국가의 부름을 받고 전장에서 용감히 싸우다 전사했지만 군에서는 ‘총살‘이라며,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습니다. 군의 주장이 허위로 밝혀졌는데도 사법부는 이를 인정치 않고 여전히 ‘불명예 제대‘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억울함을 3회에 걸쳐 호소합니다. <기자 말>

관련기사 : <국방부, 6.25 전사자 언제까지 농락할 텐가?>


"나는 강원도 철원 백마고지에서 전사한 심옥동의 군 전투행적 사실에 대하여 살아 있는 증인이요, 기록이다. 위 진술에 대한 사실은 내가 이 세상을 떠난다고 해도 변함 없이 영원히 유효하다."(2006년 2월 28일 인우보증인 김소동의 진술서 및 회고록 중에서)

등장 밑이 어둡다고 했던가? 아버지의 얼굴도 모르고 유복자로 태어난 심질수(61세, 여수 남산동)씨는 온갖 수소문 끝에 1994년 5월 인우보증인 김소동씨를 찾았습니다.

전사하신 큰아버지(심옥동)의 살아 있는 유일한 증인 김소동씨는 "심옥동이 6사단 2연대 9중대 복무 중 1951년 10월 19일 오후 4시경 백마고지 전투에서 사망했다"고 증언했습니다. 이때 본인 역시 손에 관통상을 입고 발에 파편을 맞아 발가락이 절단되는 부상을 입었지만 후퇴하던 전우들에 의해 구사일생으로 살아났고 부산 3.1육군병원으로 후송되어 제대했다고 인우보증서와 회고록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국방부는 여전히 심옥동이 전쟁 당시 군법을 어겨 ‘총살‘을 당했다며, ‘불명예 제대‘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지난 15일 <국방일보>에는 ‘6.25 특별강좌 열기 후끈‘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습니다. 그 기사에는 6.25를 겪은 90대 강사가 10대 어린이들을 상대로 6.25전쟁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강연이었습니다.

이 신문은 "두 시간 동안 강연을 통해 6.25전쟁의 발발부터 휴전까지의 주요 전투사를 중심으로 고령의 나이가 믿기지 않을 만큼 녹슬지 않은 기억력으로 생생한 체험을 증언해 큰 감명을 줬다"면서 "긴박했던 순간들을 소개했다"고 전했습니다. 국방부가 전쟁을 겪었던 경험자의 이야기를 들려준 ‘산교육‘을 한 셈입니다.

그런데 국방부의 이런 모습은 큰아버님이 당하고 있는 것과는 180도 다른 모습입니다. 그것은 군이 고령이라는 이유로 인우보증인 김소동씨의 일관된 진술을 부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김소동씨는 큰아버님의 전사 사실을 직접 목격한 산 증인입니다. 군은 지금까지 정상 참작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의 나이 63세인 1994년부터 80세였던 2009년까지 심옥동이 전사했다고 증언해주신 전우입니다.

"심옥동이 1951년 10월 19일 백마고지 전투에서 사망했다"


김소동씨는 심옥동(沈玉同, 생일 : 1930. 10. 23. 군번 : 0618567)의 살아 있는 마지막 전우였습니다. 그는 돌산 사는 박순석과 박종안, 그리고 남면 안도 출신인 심옥동과 함께 제주1훈련소에서 훈련을 받았습니다. 이후 부산2보충대를 거쳐 제6사단 2연대 3소대 3분대로 배치되어 큰아버님과 함께 군생활을 보냈다고 합니다.

당시에는 보급이 잘 되지 않아 배고픔에 치를 떨었다고 합니다. 큰아버님은 배가 고파서 다래 열매를 따러 갔다가 그만 군번줄을 잃어버렸다고 합니다. 큰아버님이 다래를 따왔는데 나중에 보니 군번줄이 없어 김소동씨가 큰아버님을 크게 나무랐던 이야기가 생생히 녹취록에 남아 있습니다.

"10월 19일 날인데 다래가 무지 많이 열렸어. (심옥동이) ‘형님 나 저기 가서 배가 고픈께 다래 좀 따갖고 올란다‘ 그래서 나중에 본께 모가지에 군번줄이 없어. 군번줄 어쨌냐닌께 어쩌다가 떨어지고 없다 그래. ‘아, 이 멍청한 자식아 그게 없으면 니 목숨과 마찬가진디 왜 그것 없어졌냐?‘ 그러니까 어찌된지 모르겠다고 그래. 다래 따고 하면서 어디다 잃어버린 모양이라. 근데 다래만 한 주먹 갖고 묵을라 근디 ‘야 이 개××야 이것 처먹는 게 먼저냐? 니 모가지에 단 군번줄이 뭐냐(어쩔거야)?‘ 솔직히 그래 갖고 심옥동씨는 그렇게 군번줄을 잃은 거야."

2006년 조사한 군의문사는 김소동 진술의 신빙성 여부에 대해 "심옥동과 김소동이 동시에 입대하여 제주1훈련소에서 훈련을 함께 받았으며, 제3보충대를 거쳐 제2보충대로 동시에 배속된 것은 각 인사명령지와 김소동의 진술이 일치하므로 사실로 인정된다"고 밝혔습니다.

김소동씨는 2008년 6월 <KBS 시청자 칼럼 우리 사는 세상>에 출연하여 큰아버님에 대해 증언했습니다.

김소동 : "심옥동은 6사단 2연대 3소대 3분대에서 같이 있다가 실탄을 맞았어요 그 사람은 틀림없어요."

PD : "그러면 그날 돌아가셨습니까, 심옥동씨가?"

김소동 : "그날 하여튼 오후에 돌아갔습니다. 오후에."


필자가 돌산읍에 사는 김소동씨를 취재하기 위해 그의 집을 찾아간 것은 2009년 5월21일 이었습니다. 당시 김소동씨는 혼자 살고 있었고 80세 노인답지 않게 건강한 모습이었습니다. 특히 1994년 인우보증서 내용은 15년이 흐른 그의 증언이 처음했던 진술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또한 2006년 작성된 사실 진술서 및 회고록의 내용과도 일치합니다.

김소동 육성녹음 "심옥동 백마고지 전투중 전사했다"

이날 취재내용은 지금도 녹취록에 남아 있습니다. 39분 58초간 진행된 인터뷰는 이후 밀알 컴퓨터속기사무소에서 대화내용을 공증해 행정심판 2심 법정 증거자료로 제출된 바 있습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김소동씨는 이후 음식을 잘못 먹어 시름시름 앓다가 그만 세상을 떠났다고 합니다. 이날의 인터뷰가 그와 가진 마지막 증언이 된 셈입니다. 그가 전한 증언 속에는 여러가지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전사하기까지 큰아버님과 겪었던 이야기와 강압적인 분위기 속에서 이루어진 군의문사의 취조 등 아직도 전사처리 되지않고 있어 화를 내시던 기억이 선합니다.

녹취된 인터뷰 내용중 김소동씨는 백마고지 700~800고지에서 싸우다 돌아가신 심옥동에 대한 증언의 일부분입니다.

심명남: "700고지에 인민군들이 떼거지로 왔다는 얘긴가요?"

김소동 : "아, 완전히 거기가 벌집이라 거기가. 그래 갖고 한참 싸우고 있는디 (1951년) 10월 19일 오후 4신디 골짜기에서 아군… 그래. 저 교관이고… 아 날 보고 ‘어이 김소동씨! 심옥동이가 없네. 그래서 뭐래 왜 없는가 찾아보소….‘ 나한테 인자 참 환장하지. 그때는 전쟁 통에 어찌된 지도 모르고 죽네 사네 누가 갈라 할 거라. 그 골짝 거기로 갔는디 심옥동이는 골짜기에 있는 거여. 아이고 죽겠다고 허리를 잡으면서 나 죽겠다고…."

심질수 : "그 갈 때부터 총 맞았다 그러더만…."

김소동 : "그러니까 총을 맞아 갖고 꼼짝도 못해. 사람 둘만 있으면 끌어 올렸겠지만 혼자서(는) 절대 못해. 총 맞은 사람 못 끌어올려. 혼자서는 되도 안 해."

심질수 : "그때 총상 어디에 맞았는지?"

김소동 : "그 옆구리 어디를 맞아뿐 기라. 그러니까 맥을 못 쓰지. 그리고 나중에 보니까 아예 저기를 가도 못하고 벌써 전사돼버려 안 되겠다고 옆의 위생병이 그래."

"군의문사위에서 강압적인 분위기 속에 취조당했다"

그는 이어 군의문사위에게도 많은 불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2006년경 군의문사 조사2과장이 여수2청사에서 김소동씨를 상대로 조사가 실시되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김소동씨는 강압적으로 조사를 받은 상황에 대해 이렇게 털어놨습니다.

김소동 : "아침 7시부터 오후 4시까지 내가 조사받은 놈이요"

심명남 : "2청사에서요?"

김소동 : "응"

심명남 : "군의문사에서요?"

김소동 : "그래서 내가 ‘야 이 개××들아 오줌도 못 누러 가게 해‘. 얼마나 고생한 줄 알아. 내가?"

심질수 : "군의문사에서 오줌도 못 누러 가게 해요?"

김소동 : "그렇지. 도망갈까봐 꼼짝도 못하게 해. 그래서 내가 ‘이 새끼들아 나가 응 도주할까봐 그러냐. 걱정 말고 느그 도장까지 받아가라‘."

심질수 : "조사2과장 그 사람이 해남 사람이야."

김소동 : "꼼짝도 못하게 해. 그래서 내가 죽여버린다고, 이 소리까지 했어."


큰아버님은 백마고지 전투 중 적군의 총탄에 산화해 가신 지 61년째를 맞고 있습니다. 사촌형님 심질수씨는 아버지의 전사기록을 바꾸기 위해 42년째 국가와 싸우고 있습니다. 그런데 큰아버님은 아직도 총살이라는 ‘불명예 제대‘로 관리되고 있습니다. 6.25전쟁 때 백마고지 전투에서 전사한 사실을 본 산 증인이 있는데도 군과 사법부는 이를 외면하고 있습니다.

사촌형님이 최초 아버지의 전우 김소동씨를 찾아 전사사실 인우보증서를 받은 것은 1994년 5월 30일이었습니다. 이제 18년이라는 많은 세월이 흘렀습니다. 이제 김소동씨는 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김소동씨의 생생한 증언조차 증거로 채택되지 않고 있는 군과 분단국가 대한민국의 현실이 개탄스러울 뿐입니다.

오는 5월 30일 18년 만에 행정심판 2심 선고에서또다시 기각 당하고 말았습니다.그동안 유족들도 지칠 대로 지쳤지만 마지막 사법부의 정의로운 선택에 한가닥 희망을 기대했지만 허탈한 심정 감출 수 없습니다.하지만 ‘진실은 반드시 이긴다‘는 동서고금의 역사와 진리를 믿습니다. 큰아버님의 억울한 누명을 벗고 명예회복이 되는날까지 아직 싸움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기사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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