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년 묵종의 세월! 드러나는 '이야포의 진실'

4년전과 완전 달라진 이야포, 다시 이야포를 말한다! 8월 3일 ’이야포 미군 폭격 사건 71주년 민간인 희생자 추모제’ 개최

2021-08-02     심명남
▲ 하늘에서 본 이야포 포구 모습 ⓒ 이기재 제공

폭염입니다. 요즘 코로나19도 벅찬데 연일 기록적인 폭염은 팍팍한 삶을 더 지치게 만듭니다. 이맘쯤 떠오르는 시 한편이 있습니다.

내 고장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

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 주저리 열리고

먼 데 하늘이 꿈꾸며 알알이 들어와 박혀

하늘 밑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

흰 돛단배가 곱게 밀려서 오면

내가 바라는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

청포(靑袍)를 입고 찾아온다고 했으니...

 

이육사 시인의 <청포도>를 읽노라면 참 마음이 맑고 시원해집니다. 해마다 여름이면 좋아하는 시인데 4년 전부터 이 시를 읽으면 불현듯 우리 마을에서 일어난 반갑지 않는 전설 같은 사건이 떠오릅니다.

안도 이야포에서 서고지를 넘어가는 고갯마루 이름은 ’빈지‘라고 불렀습니다. 이곳 지명인 '빈지'는 밤이면 발길이 뚝 끊기는 곳이었습니다. 귀신이 자주 나타나는 터가 아주 사나운 무서운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곳에 가기를 꺼렸습니다. 학창시절 서고지 제 친구들은 밤에 야간자율 학습 후 이곳 '빈지'를 넘어서야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쉬며 너무 무서웠다고 합니다. 

왜 그랬을까 참 궁금했지요. 그때는 '요즘 세상에 귀신이 어딨어? 겁쟁이들'이라고 비웃었지만 이제야 그 이유를 알게 되었습니다. 바로 '이야포 미군폭격사건‘ 때문이었습니다. 71년 전 이곳 '빈지' 앞바다에서 미군 폭격에 의해 피난선에서 150여 명이 비명횡사했고, 50여 명이 중경상을 입었습니다. 평화를 찾아 피난을 떠난 피난민들은 미군전투기 폭격으로 순식간에 피난선은 아비규환으로 변했습니다. 죽은 피난민들의 시신을 피난선에 모아 기름을 붓고 불태웠습니다. 이 배는 3일 밤낮을 활활 타올라 수장된 암울한 역사가 감춰졌던 것입니다. 마치 안도판 ’킬링필드’가 일어났던 사연을 어린시절 아니 어른이 되어서도 모르고 지냈던 것입니다. 

▲ 이야포 미군폭격사건의 마지막 생존자 이춘혁(우) 어르신과 산증인 이사연(좌) 어르신의 모습

하지만 정권은 이를 철저히 외면했습니다. 그 세월이 어느덧 71년이 흘렀습니다. 원통한 세월은 ’묵종(默從)‘속에 흘러갔습니다. 이야포 미군폭격학살에서 살아남은 마지막 생존자 이춘혁 어르신은 자신이 겪은 <이야포 미군폭격사건의 참상>을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이번 이야포 평화공원 조형물에 새겨진 증언록의 일부입니다.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일어났고, 북한 인민군을 피해 부산으로 피난을 떠났다. 일곱 가족은 부산진구 성남국민학교 서울 피난민수용소에 수용되었다. 정부는 부산으로 몰려드는 피난민들을 분산 수용하고자 서울 피난민수용소 사람들을 인근 도서 지방으로 이동시켰다. 정부에서 징발한 배를 타고 통영과 욕지도를 거쳐 또다시 거문도를 향해 이동했다. 피난선이 남면 안도 이야포 해상을 지날 때 총소리가 들렸다. 이야포 곶머리에서 해상 감시하고 있던 경찰의 정박 명령이었다. 피난선은 이야포 해안에 정박해 경찰 검문을 기다렸다. 1950년 8월 2일 오후였다. 다음날인 8월 3일 아침, 피난민들은 안도 주민들이 마련해 준 주먹밥을 먹고 경찰 검문을 기다렸다.

 

하지만 피난선에 나타난 것은 경찰이 아니라 미군 폭격기 4대였다. 피난민들은 미군 폭격기를 향해 손을 흔들었으나 미군 전폭기는 태극기가 펄럭이는 피난선을 향해 무차별 기관총을 쏟아부었다. 마른하늘에 날벼락을 맞은 피난선은 죽음의 도가니로 변했다. 아버지와 여동생이 그 자리에서 기관총을 맞고 바다에 떨어져 숨졌다. 당시 열여섯이었던 이춘혁씨와 동생 이춘송, 누이, 세살배기 남동생을 포대기에 업고 있던 어머니는 살아남았다. 피난선에서는 또다시 절규가 일어났다. 미군 폭격기가 다시 2차 기관총을 난사했기 때문이다. 이후 안도주민들은 피난민을 구하기 위해 전마선을 띄웠다. 남동생을 업은 어머니는 전마선을 타고 오다 배가 뒤집혀 물에 빠져 숨졌다. 이야포에 이어 미군이 자행한 두룩여와 여자만 폭격으로 이어졌다. 피난선에서 살아남은 피난민들을 이야포 건너편 연도로 이동시키는 날 피난선은 불타올랐다. 기름을 끼얹은 피난선에서 원통한 수많은 죽음도 불살라졌다.

 

이야포 학살은 1950년 7월 26일 충북 영동 노근리 피난민 미군학살사건이 난 지 일주일 뒤에 일어났다. 이것이 우연의 일치나 오폭이 아닌 '미군기 피난민학살사건'이라 부르는 이유다. 71년이라는 원통한 세월이 '묵종' 속에 흘러왔다. 그러나 피난선은 수장시켰어도 학살 진상마저 가라앉힐 수 없다. 이제 내 나이 90을 눈앞에 두고 있다. 원통하게 숨져간 수많은 피난민 원혼을 달래기 위해서는 학살의 주체인 미국의 책임을 반드시 물어야 한다. 그리고 이 땅에 다시는 전쟁 없는 세상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제가 겪었던 불행한 시대를 여기에 기록으로 남긴다. 2021년 8월 3일

 

이야포 미군폭격 사건 추모제는 올해로 4년째를 맞고 있습니다. 사실 처음 추모제를 기획하게 된 계기는 2018년 7월 14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당시 <여수넷통뉴스> 엄길수 이사장과 편집위원장이었던 제가 안도마을 '여름 방충망 봉사활동'에 참여했습니다. 우연히 방충망을 고치러 온 이야포 주민 이사연 어르신을 만나 이야포 미군폭격사건 당시 억울하게 희생당한 이춘혁 어르신의 사연을 들었습니다. 너무 안타까운 사연을 듣고 지역 언론이 나서서 추모제를 열어보자고 다짐했습니다. 이후 이춘혁 어르신을 초청해 판결 서류를 확인했습니다. 재판 서류를 훑어보니 당시 이춘혁 어르신의 동생 이춘송씨는 재판장에게 읍소하며 이렇게 하소연했습니다.

판사님!

이야포 폭격 사건으로 당시 많은 인명이 손상되었는데 그 사람들의 명예회복과 피해 보상을 국가에서 책임지면 안 되겠습니까?

하지만 판사는 묵묵부답 아무런 대답이 없었습니다. 진실화해위원회가 조사를 통해 밝혀낸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영혼없는 판사는 ‘공소시효’가 넘었다는 이유로 '기각'이라며 방망이를 두드렸습니다. 

▲ 이야포 추모제를 처음 제안한 엄길수 추진위원장 모습

섬봉사를 다녀온 한달 뒤 <여수넷통뉴스>와 <여수뉴스타임즈>  <해양환경인명구조단 여수구조대>는 발빠르게 움직였습니다. 공동으로 ‘1950년 격침 수장된 피난선 피해자 추모제’라는 타이틀로 68년 만에 첫 추모제를 열었습니다. 안도 주민 김성수 시인이 쓴 '이야포 참사' 추모시는 가슴을 울렸습니다. 여수구조대 다이버들이 이야포 미군폭격 피난선 수중탐사를 실시했으나 별다른 성과 없이 끝났습니다.

이후 2019년 8월 3일  ‘이야포 미군 폭격 사건 추모제 및 표지판 제막식’ 두 번째 추모제를 열었습니다. 6명의 다이버가 피난선 수중탐사를 진행했으나 또다시 성과 없이 끝났습니다. 이후 작년 8월 3일 ‘이야포 미군폭격사건 70주년 추모제 및 평화탑 쌓기‘로 이어졌습니다. 70주년을 맞아 민간인 학살사건의 희생자와 유가족을 위로하며 역사의 정의를 바로 세우기 위한 돌탑을 쌓았습니다. 특히 이날 여수구조대가 수중탐사 3년 만에 침몰선 잔해로 추정되는 잔해물을 발견해 전국에 방영되며 화제가 되었습니다.

▲ 추모제 3년만에 이야포 앞바다에서 피난선 잔해로 보이는 침몰선을 발견한 해양환경인명구조단 여수구조대원들의 모습

추모제 이후 작은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작년 9월에는 여수시의회의 의장단 전원이 ‘이야포 사건’ 현장을 찾아가 주민 의견을 청취했습니다. 의회 차원에서 이야포 관련 조례제정 필요성이 부각되면서 지난 6월 박성미 의원이 대표 발의한 ‘이야포 두룩여 해상 미군 폭격 사건 민간인 희생자 위령 사업 지원에 관한 조례안이 시의회를 통과하며 이야포 사건은 새로운 전기를 마련했습니다.

올해 8월 3일 이야포 평화공원에서 ’이야포 미군 폭격 사건 71주년 민간인 희생자 추모제’를 앞두고 있습니다. 지난 7월 미군폭격 민간인 희생자 위령사업 추진위원회(추진위원장 엄길수)가 구성되었습니다. 우리 지역 국회의원과 시장, 시의장 등 많은 정치인과 많은 시민들이 추진위원으로 합류했고 이번 행사에 함께 합니다.

이야포 평화공원에는 설치미술가 최병수 작가의 ’하늘꽃‘ 추모조형물도 들어섭니다. 조형물 건립과 행사에 여수시와 시의회가 지원을 아끼지 않았고 독지가들의 재능기부가 이어졌습니다. 특히 이야포미군폭격사건 기금마련을 위한 ‘국화 한 송이 1만 원’ 온라인 모금 운동에 시민참여가 줄을 잇고 있습니다.

4년 전 이춘혁씨 어르신의 말씀이 떠오릅니다. “68년 전 부모님과 가족을 보낸 오늘을 어찌 잊겠냐? 이곳 이야포는 부모 형제가 생죽음을 당한 무덤 없는 묘지다"면서 "내 생전 추모공원이라도 만들어 그분들의 억울한 원한을 풀어드리는 게 마지막 여생의 소원”이라며 "비석 하나만이라도 세워달라"고 간곡히 부탁했습니다. 비록 이야포 미군폭격사건으로 내 부모 형제가 다치진 않았지만 전쟁을 피해 피난을 떠난 이들 역시 우리의 이웃이자 동포입니다.

추진위원회가 이번 일을 추진하면서 내건 구호는 ‘역사에 정의를! 진실은 침몰하지 않는다!’입니다. 지역의 양심 있는 시민들이 모여 4년째 함께 하고 있습니다. 미약하지만 지역의 불행한 역사를 바로 세울 수 있다는 작은 울림이 이제 더 크게 메아리 치고 있습니다. 고단했던 피난민들의 영혼이 더이상 구천을 맴돌지 않고 편히 쉴 수 있도록 노근리특별법에 이어 이제는 이야포특별법이 제정되길 간절히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