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번 붙은 '라벨' 평생간다...나는 어떤 부모?

[주경심 상담칼럼⑯] 아이에게 무심히 던진말, 뗄 수 없는 '라벨'로 남아 라벨로 본 아이에게 붙여진 잘못된 꼬리표 최고라고 믿어주는 순간 아이는 최대 잠재력 발휘해

2022-05-29     글:주경심, 편집:심명남
▲ 모든 물건에 붙어있는 라벨 ⓒ주경심

거리를 지나는 사람들의 옷차림이 한결 가벼워졌다.

철모르고 걸쳐 입고 나온 외투가 유난히 거추장스럽게 느껴지던 지난 주말, 어디를 가든 계절의 변화와 함께 연휴를 실감할 수 있었다. 골목 어귀 화장품가게에서부터 대로변에 이르기까지 사람, 차, 왁자지껄, 설렘이 가득했다. 그 틈을 뚫고 들어가 편하게 입을 반팔티셔츠 두 장을 사서 집으로 왔다.

그리고 새로 산 옷을 꺼내 라벨을 제거하기 시작했다. 어떤 옷이건, 어떤 브랜드건 상관없이 일단 새 옷을 사면 뒷목이나 허리춤에 달려있는 라벨을 반드시 제거해야만 비로소 입을 수 있다.

보통 뒷목에는 사이즈와 브랜드 라벨이 붙어있고, 옆구리에는 세탁방법 및 주의사항과 함께 여분의 단추가 있는 라벨이 붙어있다.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라벨제거작업이 점점 어려워지는 것과는 반대로 라벨박음질은 점점 작아지고 정교해졌다.

물건에 붙어있는 라벨 아이에게도....

▲생각의 틀에서 깨어나야 새로운 싹이 튼다ⓒ주경심

그러니 라벨제거가 그리 쉽지만은 않다. 투명한 실로 묶여있는 라벨도 있고, 옷감과 같은 색깔로 박음질되어 있는 것도 있다.

또 어느 옷에는 라벨이 별도로 붙어있지 않고 옷과 같이 바느질이 되어있어서 제거하는 대신 가위로 어설프게 잘라내고 입어야 하는 옷도 있다. 그러다보니 라벨을 제거하다가 구멍 난 옷이 한 두 벌이 아니다. 특히 니트 소재나 얇은 소재의 옷은 라벨제거 후 손가락 굵기만큼 뚫려있는 구멍을 다시 바느질로 메워야 한다.

이로인해 구멍이 난 새 옷을 볼 때면 여간 마뜩찮은게 아니다. 그럼에도 아직은 나의 손과 눈의 협응작업으로 라벨을 뗄 수 있으니 그나마 다행이다 싶다.

그렇다면 라벨은 물건에만 붙어 있을까? 아니다. 물건에도 붙어있고, 사람에게도 붙어있다. 물건은 원가와 브랜드를 따져 가격과 세탁방법, 주의사항에 대한 라벨을 붙일 수 있지만 사람에 대한 라벨은 어떻게 붙여지는 걸까?

상담을 하면서 만난 많은 청소년들의 자아상을 탐색하다보면 참 많은 라벨들을 발견하게 된다. 아직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정체감이 확립되기 전이다 보니 아이들이 갖고 있는 라벨 중 대부분은 부모님에 의해 박음질이 되어있다. 이는 긍정적인 것, 부정적인 것, 긍정과 부정이 섞인 것, 미래지향적인 것까지 다양하다.

저는 재수 없대요.

그리고 까칠하고, 아빠 닮아서 밥맛 떨어지게 생겼대요.

그래서 엄마는 저 때문에 인생이 망했대요.

학교폭력으로 상담에 의뢰된 수민이(가명)의 라벨은 부정적이고 비관적이다. 수민이가 기억하는 최초의 기억과 최근의 기억이 모두 부정적인 라벨을 정성스럽게 붙이는 부모님의 모습이었다.

얌전하다

투정부리지 않는다

속깊다

착하다

왕따로 고생하다가 결국 자퇴를 결심하게 된 민지(가명)에게 붙은 라벨이다. 단어 자체는 긍정적이지만 이런 라벨을 달고 있는 아이는 자신이 이런 모습이어서 다행이라고 느껴진다. 하지만 엄마가 기대하는 모습과는 다른 생각이나 행동을 할까봐 두려워하고, 자신을 싫어하는 친구를 속으로 원망조차 못한 채 그런 생각을 한 것만으로도 죄책감과 자책감으로 인해 힘들어한다.

“망할놈. 빌어먹을놈. 재수 없는 놈”이라는 라벨을 달고 있었던 동현이(가명)는 자신의 인생에 대해 조금의 기대와 설렘, 희망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어차피 망할거라고 믿어의심치 않는다.

한 아이에게는 한 가지 라벨만 붙어있는 게 아니다. 보통 한 개 이상의 라벨이 달려있다. 그중 많은 라벨로 인해 자신의 진짜 모습을 찾지 못한 채 그때그때 눈에 보이는 라벨로 자신을 설명하곤 한다.

어릴 때는 착했는데, 이제는 좀 재수 없어졌어요.

얌전했는데 지금은 개 나대요

집에 있으면 얌전하고 밖에 나오면 관종이에요.

한번 붙은 라벨은 떼기가 참 어렵다. 자신이 원하지 않은 라벨이 자신에게 붙어있고, 그 자신을 대신하고 있다는 것도 모른다. 아이들 본인이 그 라벨을 뗀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아이에게 붙여진 부정적인 라벨 왜?

아이들에게 이런 라벨을 붙여준 부모를 실제로 만나보면 참 아이러니하게도 절대 그런 험한 말(?)을 안하게 생긴 건 물론이고 세상에 둘도 없을 만큼 자녀사랑이 깊다.

부모님에게 아주 조심스럽게 아이가 진술한 자아상에 대해 알려주면 부모 10명중 10명 모두 경악을 금치 못한다. 자신의 아이가 그런 말을 했다는 것에 당황해서 쥐구멍이라도 찾아들어갈 것처럼 안절부절 못한다.

그렇게 생각하는 줄 몰랐어요!

당연히 모를 수밖에 없다. 배움의 정도나 재산의 정도, 권력 유무와 상관없이 모든 부모는 내 자녀가 잘되기를 진심으로 바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그런 말들을 했을까?

버릇없는 사람이 될까봐

도리를 알지 못하는 사람이 될까봐

무엇이 위험한지 모를까봐

타인의 권리를 침범하는 사람이 될까봐

법을 어기는 사람이 될까봐

즉 내 아이가 잘못 될까봐 염려되어 어쩌다 한번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했단다. 그래서 부모는 억울할 수 밖에 없다. 부모가 쏘아올린 화살은 아이들에게 상처로 남아 있다.

하지만 아이들 입장에서 보면 어쩔 수 없다. 태어나서 가장 먼저 만난 사람도 부모이고,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사람도 부모고, 가장 닮은 사람도 부모고, 가장 인정받고 싶은 사람도 부모고,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것도 부모이기 때문이다. 부모가 던지는 한마디 말은 그 말이 비록 진심이 아니었더라도 아이들에게는 스스로 뗄 수 없는 라벨이 된다.

그렇다면 라벨에 갇혀있는 아이들에게서 라벨을 떼는 방법은 무엇일까?

아이들이 듣고 싶어 하는 말, 아이들이 좋아하는 말을 아이들의 언어로 표현해주고, 아이들이 이뤄낸 작은 성공경험도 알아차려서 칭찬과 격려를 해주면 아이들은 비로소 제 색깔을 내고, 변화를 경험하게 된다.

▲우리 아이는 '나'라는 특허로 아이가 자신을 드러내며 살아야 한다.

내 아이가 자신만의 브랜드를 가지고,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나’라는 특허로 자신을 드러내며 행복하게 살기를 원하는 건 모든 부모의 소망이다.

김춘수의 꽃이라는 시에는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는 싯구가 있다. 그저 바람에 나부끼는 몸짓이 될 것인가 꽃이 될 것인가는 아이들을 불러주는 부모의 언어에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아이들은 누군가 최고라고 믿어주는 순간, 그리고 불러주는 순간, 최고의 잠재력을 발휘할 수 있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