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포 피난민 학살 진실을 찾아서

[이야포 특별기고] ③ 1부. 학살 사실을 밝힐 결심

2022-07-25     양영제

노인은 머리에 하얀 이슬이 내려 앉아 있었다. 등에는 무거운 가방을 짊어지고 있었다. 나는 여수 고속버스 터미널에서 만난 노인을 모시고 장군도가 보이는 카페에 가서 증언을 녹취하기로 했다.

노인은 가방에서 재판기록과 가족사진 육필 증언 등을 모두 꺼내어 나에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아름답고 포근한 여수 바다 풍경이 보이는 곳에서 비극적 드라마가 열리고 있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노인을 살아있는 박물관이라고 한다. 1950년 8월 3일 안도 이야포 미군기에 의한 피난민 학살 생존자 이춘혁 어르신과 처음 만남이었다.

▲이야포 미군기에 의한 피난민 학살 생존자 이춘혁 어르신과 필자

나는 이춘혁 어르신 만나기 전 충북 영동 노근리 쌍굴을 갔다 왔었다. 증언소설 ‘그대 우리의 아픔을 아는가’ 무대인 것이다.

한국전쟁 초기 1950년 7월 26일 인민군에 밀리던 미 8군 제 1 기병여단이 방어선을 쳤던 곳이다. 이곳으로 영동 주곡리 일부 마을사람들이 미군으로부터 소개 명령을 받고 노근리로 이동하고 있었다. 주곡리 피난민들을 기다린 것은 기관총 세례였다. 백여 명 피난민들이 미군명령과 무차별 사격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

폭격기까지 동원된 학살은 7월 29일까지 계속되었고 노근리 쌍굴로 대피했던 피난민들 200여명이 죽어나갔다. 한국전쟁 당시 미군에 의해 저질러진 민간인 학살 대표적인 사건 ‘노근리 학살사건’이다.

▲영화 ‘작은 연못’ 중 한 장면 

은폐되었던 노근리 학살은 생존자 한 사람의 끈질긴 외침을 들은 AP통신 서울지국 최상훈 특파원에 미군에 의한 노근리 피난민 집단학살사건 취재가 1999년 9월 말 AP통신을 타고 전 세계에 보도되었고, 그 여파로 국내의 보수적 언론도 크게 보도하게 됨으로써 세계에서 주목을 받았다.

곤혹해진 미국은 부수적 피해(collateral damage)라고 했다. 즉 한국의 평화와 자유를 지키기 위해 미군이 전쟁을 치르는 과정에서 발생한 불행한 사건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당시 미국 클린턴 대통령은 사과(apology) 대신 유감(regret) 이라고 표명했다.

과연 부수적 피해인가 아니면 부수적 살인(collateral murder)일까. 결론부터 말하면 미군에 의한 노근리 피난민 학살 사건과 이야포 피난선 학살 사건은 부수적 살인이다. 내가 왜 단정적으로 부수적 살인이라고 하는지에 대해선 2 부 기고문에서 밝히겠으나 이야포 학살은 노근리 학살보다 복잡하고 진실을 밝혀내야 할 것이 많다. 왜냐면 당시 방어선 개념과 폭격요청 시스템. 그리고 결부되어 있을 가능성이 높은 한국경찰 역할 때문이다.

하여간 노근리 사건은 최근 미국 드라마에서 인용되어 화제가 되었다. 넷플레스 10부작 드라마 <메시아>(2020)에서는 재림예수로 불리는 ‘알 마시히’가 미국 대통령과 독대하면서 미국의 전쟁범죄로 베트남 마라이 학살과 한국전쟁 노근리 피난민 학살사건을 예로 들어 전 세계에서 미군철수를 요구한다.

▲ 미국 드라마 메시아 포스터

72년 전 일이다. 한 세대가 교체되는 세월이고 다 지나간 일이다. 미국은 한국에 있어서는 혈맹이고 우방이다. 그런 미국이 어떻게 한국에서 민간인을 학살할 수 있었을까? 왜 그랬을까? 전장이라는 아수라장에서 피아를 구분할 수 없어 벌어진 어쩔 수 없는 실수였을까?

학살 사실과 학살 진실은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일까. 이야포 피난민 학살사건 72주년 희생자 추모제를 앞둔 우리는 사실과 진실 어느 것에 초점을 두어야 하는 것일까. 이미 미군기에 의한 이야포 피난민 학살은 사실로 드러났다.

아직 살아계시는 생존자 이춘혁 어르신이 있고 당시 학살사건을 목격한 여러 증인들도 생존해 계신다. 게다가 법원도 당국의 피난민 분산수용정책으로 부산 학교운동장에 수용되어 있던 서울피난민을 분산이동과정에서 발생한 사건으로 인정했다.

▲ 이야포 미군기 학살 사건 인정 법원 판결문

이런 것들이 사실이다. 요즘 흔히 말하는 팩트(fact)라는 것이다. 이 사실을 당시 학교 영어선생으로 재직 중이던 오문수 선생(여수넷통 전 대표)은 영문으로 번역하여 AP한국지사에 기사를 보내 사실이 드러나길 바랐다. 그러나 이야포 미군기에 의한 피난민 학살사건은 노근리 학살 사건처럼 세상에 드러나지 않았다.

무엇이 부족했던 것일까. 왜 여수는 이 사실을 지속적으로 알리는데 노력을 하지 않았을까. 사실 여수 행정당국에서는 학살사건 조차도 확실치 않는 것으로 여기고 있었다. 피난민들이 여수사람들이 아니라서 그럴까. 알리는 사람이 적어서 그런 것일까. 내가 취재를 시작하기 시작한 것은 바로 이 지점에서부터였다.

미군기에 의한 피난민 학살이 일어난 곳은 여수 부속섬 안도 이야포다. 안도, 이곳이 문제였다. 빨갱이 무덤(RED TOOM)이라고 불리는 섬. 1948년 10월 여순민중항쟁을 진압하러 온 부산 5연대 김종원 대위가 상륙하여 빨갱이 색출한다며 무고한 섬 주민을 학살한 곳이다.

▲ 안도 여순사건 위령비

나는 소설 ‘여수역’을 쓰기 위해 취재차 안도를 여러 차례 방문하면서 밭에서 일하는 할머니로부터 미군기에 의한 이야포 피난민 학살사건도 듣게 되었다. 소문으로만 듣고 있었던 피난민 학살사건을 현지 할머니로부터 직접 들었을 때 충격은 컸다.

“뱅기가 배를 때려갔고 흐미…… 바다가 씨뻘개진디…… 흐미 삼년 동안 물질을 못했당께.”

“할매 그때가 여순사건 났을 때요 아니면 육이오 때 그랬다요?”

“긍께 그거시 그때 아녀?”

아직도 나이 드신 섬 어르신들 중에는 여순사건과 한국전쟁 당시를 구분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한국전쟁으로 인한 피해보다 여순사건으로 인한 학살 충격이 워낙 컸기 때문이다.

1948년 10월 이승만 진압군에 의한 안도 학살로 형성된 레드 콤플렉스(red complex)공포는 1950년 8월 3일 미군기 피난선 학살 사건에 영향을 끼치게 된 것이다.

한국전쟁 개전 초기 인민군에 밀려 후퇴한 영암경찰과 나주경찰은 소리도(연도)에 진을 치고 해상 방어선을 긋고 안도에 전초 초소를 세운다. 안도 동고지 곶머리에서 해상을 감시하고 있던 경찰은 욕지도에서 출발한 피난선을 발견한 것이다.

이야포의 비극은 여기서부터 시작되었고 노근리 학살 사건과 다른 차원이 여기에 있다. 이것이 이야포 미군기에 의한 피난민 학살사건 진실 찾기 시작점이다.

(2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