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호 칼럼] ‘너 자신을 알라’를 다시 해석하다
생은 몸에 달린 가벼운 액세서리가 아니다. 절박하고 소중한 실존일 뿐이다.
너 자신을 알라. 이 질문은 이천년 전부터 사람에게 혹처럼 따라다녔다. 흔히 우린 자신을 잘 안다고 생각한다.
뿐만 아니라 부모, 형제, 친구, 동료까지도 다 알고 있다고 착각한다. 사람은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가정과 사회에 길들여지며 성장할 수밖에 없다. 그 반복되는 말과 행동이 가치관이요 세계관으로 자리 잡게 된다.
사회 분위기가 개방적이고 자율적이면 개인은 의지를 말로 표현하겠지만, 폐쇄적이고 억압적이라면 개인은 의지를 말로 드러내지 못한 채 가슴앓이를 할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우리 사회처럼 폐쇄적인 분위기에서는 자아를 올바르게 이해하고 정립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진정 자아와 삶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고뇌하며 존재 이유에 대하여물어야 한다. 더 나가 정체성에 대해 회의(懷疑)하고 좌절하며 희망을 노래해야한다. 개인의 존재 가치는 단순히 누구의 자식으로서의 의미가 아니라 절박하고도 엄숙한 개별적 실존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이 ‘너 자신을 알라’라는 말을 소크라테스가 한 말로 잘못 알고 있다. 그리스의 지리학자 파우사니아스에 의하면 이 말은 델포이의 아폴로 신전 입구에 새겨져 있다.
그 당시에도 자신의 주제나 분수를 모르고 이웃과 사회에 갑질을 하거나 패악질을 행한 사람이 많았기에 그리스인들은 삶에 대한 엄숙함을 경구(警句), ‘너 자신을 알라’라고 새긴 듯하다.
문제는 예나 지금이나 이 경구에 담긴 의미를 곱씹어보고 실천하는 사람이 많지 않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아를 찾으려고 노력하고 행하는 지식인은 존경을 받지만 동시에 비난을 감수해야하는 진퇴양난에 처하게 된다.
우선 소크라테스의 삶을 더듬어 보자. 그는 델포이 신전의 신탁에 의해 지혜로운 사람이라는 평을 받았다. 다른 사람은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다 아는 척하며 으스대었지만, 소크라테스만은 자신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이 무지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에 깨어있는 사람으로 불리웠다.
그는 삶이 모순투성이라는 사실을 알았기에 역설적으로 사회의 풍경을 한 눈에 볼 수 있었다. 대다수의 시민이 부패한 기득권의 모습에 동조할 때, 그는 뽀쪽한 언어를 꺼내어 그들의 몽매함을 일깨워 주었다. 그의 말은 기성세대보다는 주로 청년을 대상으로 하였는데 그들에게 거듭 질문을 이어가며 잘못된 지식에 길들여졌음을 넌지시 알려주었다.
"내가 하는 일은 오로지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청년이든 노인이든 만나는 모든 이들에게, 미덕은 재물로부터 생겨나지 않지만 재물을 비롯한 인간의 모든 사적이고 공적인 축복들은 미덕에서 생겨난다고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지요.
또한 육신이나 재물보다도 어떻게 하면 영혼을 가장 선하게 만들 수 있는가에 더 큰 관심을 쏟아야 한다고 설득하는 일만 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만일 내가 그런 말을 해서 청년들이 타락하는 것이라면, 그것이 해로운 것이어야 하겠지요. 하지만 내가 그런 말 이외의 다른 말들을 하고 다닌다고 누군가가 말한다면, 그는 내가 하지도 않은 말을 했다고 하는 것일 뿐입니다.“
소크라테스의 가르침은 젊은이들의 가슴에 불을 지폈고, 마침내 그들은 마음속에 담아 두었던 자신과 사회에 대하여 의문의 불씨를 하나 둘 자신의 언어로 살려내기 시작했다.
이런 불편한 진실을 알아버린 소크라테스는 기득권자들에게 미움을 샀으며 무지한 시민 배심원에게까지 버림을 받으며 생을 마감했다.
자아 찾기의 상징, 성웅 이순신을 어떠했는가. 그는 어린 시절부터 자아를 탐색하는 일에서 한 눈을 팔지 않았다.
그는 소년 시절에 전쟁놀이를 하며 주로 시간을 보냈다. 그가 군사놀이를 하며 자신의 진지라고 금을 그어 놓았는데 어른이 그것을 모르고 밟고 지나가는 일이 있었다. 그는 눈을 뜨고도 진지를 밟는다고 행인의 눈을 향해 활을 겨눌 정도로 당돌하였다.
그는 발포에서 만호(소령급)로 근무할 때에도 자아 찾기의 일화를 엿볼 수 있다.발포 뜰 앞에 커다란 오동나무가 있었는데 전라좌수사가 거문고를 만들기 위해 그것을 베어오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러나 이순신은 이 명령을 단호하게 거부했다. ‘이 나무는 나라의 것이다. 다 심은 이유가 있을 터인데 어찌 사사롭게 쓸 수 있겠는가?’라며 상사의 지시를 거부하여 눈 밖에 나는 일이 있었다.
또한 훈련원 봉사 시절에 직속상관 서익이 자신이 알고 있는 사람을 먼저 승진시키라고 이순신에게 명령을 했지만, 그는 이 또한 법에 어긋난다며 따르지 않았다. 훗날 서익이 군기검열관으로 내려와 군 정비가 안 되었다는 생트집을 부려 이순신은 파직을 당하고 백의종군 할 수밖에 없었다.
녹둔도 사건 또한 자아 찾기의 백미라고 할 수 있다. 두만강 하류 강 가운데 위치한 녹둔도에 여진족이 기습해 아군 11명이 전사하고, 백성 160여 명이 납치된 사건이 있었다. 이순신은 즉각 반격하여 여진족 대장을 죽이고 백성을 수십 명을 되찾아 왔으나, 상관이 아군 11명이 죽었으니 패전이라고 판단해 그를 파직하고 백의종군을 하게 했다.
그는 어떤 상황에서도 정직과 원칙으로 자아 찾기를 멈추지 않았기에 임진왜란 진전에 장수로 발탁되어 마침내 전라도좌수사에 부임하였다. 그는 그 후 왜란을 예측하고 철저히 준비하여 훗날 위태로운 나라를 구하는 틀을 닦았다.
한편 그를 질시하는 무리들에 의해 삼도수군통제사에서 물러나 또다시 백의종군을 했는데, 다행히 곧 복직되어 명량해전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그는 전투에 앞서 임금과 군사들에게 했던 말이 지금도 회자(膾炙)되고 있다.
“신에게 아직 전선 12척이 있으니 죽기를 각오하고 나가서 전투를 벌리면 오히려 이길 수 있습니다. 비록 전선의 수가 적지만 아직 신은 죽지 않았기에 감히 우리 아군을 업신여기지 못할 것입니다.
병법에 이르기를 죽고자하면 살 것이요, 살고자하며 죽을 것이다. 죽기를 각오하고 싸워야 한다. 그래야 이길 수 있다. 한사람이 지나가는 길을 지키면 천명이라도 두렵게 할 수 있다. 지금 우리의 상황을 두고 이르는 말이다. 그러니 명량을 13척의 배로 지키면 능히 이길 수 있다.”
이순신은 불가능한 상황에서 탁월한 리더십과 전략으로 명량해전을 승리를 이끌며 해상권을 회복하였으며, 그 후 한산도 대첩에서도 학진법이라는 새로운 전술로 펼쳐 큰 공을 세웠으나, 노량 해전에서 왜적의 총탄에 맞고 장엄하게 운명하였다.
의사 안중근의 생에서도 자아탐색은 흔적을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안중근은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남부럽지 않게 살았다. 장손으로 태어나 조부와 부친의 사랑을 받으며 한학을 틈틈이 익혔지만, 그는 천성적으로 날랜 말을 타고 달리며 총으로 사냥하는 것을 좋아하였다. 이처럼 그는 어린 시절부터 말타기, 활쏘기, 사격 등 을 주로 하며 그만의 세계에 심취하였다.
그는 어린 시절 아버지가 소중하게 여겼던 벼루를 깬 일이 있었는데 그는 아버지께 무릎을 꿇고 솔직하게 말하며 용서를 빌었다. 끝내 그는 아버지에게 종아리가 터지도록 회초리를 맞았고 잠시 후 하인이 거짓말을 해서 모면할 수도 있었는데 꼭 그렇게 해야만 했는지를 물었다. 어린 그는 “종아리가 아프기는 하지만 마음은 편합니다. 아프고 괴롭지만 마음이 편한 것, 이것이 정직 아니겠습니까?”라고 담담하게 말하였다.
그는 19살이 되던 해 천주교에 입교하여 선교활동을 하면서 다양한 계층의 사람을 만나며 조선 민중의 현실에 눈을 떴다. 27살(1905년)이 되던 해 일본에 외교권까지 빼앗기며 조국의 운명이 풍전등화에 놓이게 되자 그는 일제침략을 세계에 알리고 주권을 되찾겠다며 상하이로 건너갔다.
그곳에서 프랑스의 르각 신부에게 “너처럼 모든 사람이 고향을 다 떠나버리면 누가 조선 땅을 지키겠는가? 교육으로 인재를 양성하고 독립사상을 높이는 것이 먼저다.”라는 충고를 듣고 고향으로 돌아와 전 재산을 헌납하여 삼흥 학교를 세웠을 뿐만 아니라 돈의 학교를 인수하여 인재양성에 몸을 바쳤다.
1907년 고종의 강제 폐위, 군대강제 해산, 사법권과 경찰권까지 전부 일본에 넘어가버렸다. 그는 교육 계몽운동으로는 더 이상 일제에 맞서기 힘들다는 결론을 내리고 해외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본격적으로 의병 투쟁을 통해 독립투쟁을 시작하였으며 의병대장으로서 큰 활약을 했다.
1909년 비밀결사대, 단지회를 결성해 왼손 넷째 손가락을 자르며 태극기에 붉은 피로 대한 독립을 쓴 뒤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치겠다는 의지를 다졌다. 1909년 10월 26일 이토가 만주 하얼빈으로 온다는 소식을 듣고 3명의 동지들과 구체적인 암살 계획을 세워 다음날 실행하였다. 그는 거사 전날 밤 장부가(丈夫歌)를 쓰며 일본제국주의의 심장, 이토의 사살할 것을 천명하였다.
“장부가 세상에 처함이여, 그 뜻이 크도다. 내가 영웅을 지음이여, 영웅이 때를 지으리라. 분하다 한번 감이여, 반드시 목적을 이루리로라. 쥐도적 이등이여, 어찌 즐겨 목숨을 이어갈꼬. 동포동포여! 속히 대업을 이룰지어다. 만세 만세여! 대한독립이로다. 만세 만세여! 대한 동포로다.”
그는 10월 26일 9시 30분쯤 하얼빈 역에서 민족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의 심장을 저격하고 ‘꼬레아 우레, 꼬레아 우레’를 목 높아 외친 뒤 체포되어 형장에서 이슬처럼 사라져버렸다.
이처럼 자신을 안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사람이 존재하는 한 이 경구는 영원한 숙제로 남을 것이다. 어떤 죽음은 서럽고 서글프지만, 어떤 죽음은 장엄하고 숭고하다.
우린 자신을 알아버린 철인 소크라테스, 성웅 이순신, 의사 안중근의 죽음 앞에서 자유와 희망을 엿볼 수 있었다. 그들은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알기 위해 진지하게 노력했기에 죽음 앞에서도 정체성을 바꾸지 않고 하나 뿐인 목숨을 자신과 조국에 바쳤다.
우리의 생은 몸에 달린 가벼운 액세서리가 아니다. 절박하고 소중한 실존일 뿐이다. 그대 아직도 자아 찾기와 담을 쌓을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