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호칼럼] 고전의 정수, 대학을 다시 해석하다 - 두번째 이야기

고전을 읽으며 영혼을 정화하다

2023-02-21     김광호
▲ 고전을 곱씹으며 영혼을 정화하자.

"사람이 배우고 익혀서 지극히 착함에 이르면 마침내 머무를 곳을 안 뒤에 정(定)함이 있다. 그 정함이 있은 뒤에 고요할 수 있고, 고요한 뒤에 편안할 수 있고, 편안한 뒤에 생각할 수 있고, 생각한 뒤에 얻을 수 있다."

 
여정의 샘터

삶에 대한 지식이 차곡차곡 쌓이면 반드시 지극히 착함의 경지에 도달할 것이다. 어떻게 언행을 해야 할 지, 가야할 곳과 가지 말아야 할 곳, 머물려야 할 곳과 머무르지 말아야 할 곳을 알 수 있으니 자신이 뜻하는 방향을 정할 수 있다.

뜻하는 방향이 정해지면 마음이 경거망동하지 않으며 쉽게 움직이지 않는다. 혹여 지위나 돈으로 유혹한다고 해도 뜻과 지조를 지키며 사람의 길을 당당하게 걸어갈 수 있다.

마음이 그 때 그 때 움직이지 않으니, 처하는 곳마다 심신이 편안하고 안정적이다. 삶을 누가 시켜서 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의지대로 디자인하며 행하니, 이르는 곳마다 마음 또한 편안하다. 마음이 안정적이니 주어진 일을 정밀하고 상세하게 풀어갈 수 있다.
 
생각이 깊으니 그것이 바로 지극히 착함에 도달한 것이다.이와 같이 지극한 선에 이르게 된다면, 뜻하는 삶은 중심축을 중심으로 여러 바퀴가 조화를 이루며 삐걱대지 않고 잘 굴러갈 수 있다.

만약 그렇지 않으면 뜻한 바가 없기에 이익에 따라 가볍게 행동할 것이며, 그 행위로 인하여 다른 사람에게 손가락질을 당할 것이기에 마음까지 불안하다. 당연히 그 불안한 마음은 일을 처리함에 있어 알게 모르게 영향을 주기 때문에 맡은 일을 대충대충 하게 된다.

그래서 옛 선비들은 옷차림부터 말과 행동까지 정제하며 생활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고지식한 삶의 행태라고 비판하겠지만 거기에는 이유가 있었다. 그만큼 사람이 '밝은 덕, 지극한 선'에 도달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선비들은 그 인격의 정점에 이르기 위해서 옷차림부터 마음 추스림까지 그 무엇 하나 생각 없이 행하지 않았다는 의미이다.

▲ 그 순백의 영혼을 찾아 나서다.

임은 어떻게 삶과 대면하고 있는가?

그 사람의 외면을 보면 그 사람의 내면을 알 수 있다고 한다. 그 사람의 첫인상을 보면 그 사람의 삶의 발자취와 방향을 짐작할 수 있다고 한다.

자신의 높은 인격, 깨달음이 있는 자아 그리고 착한 마음의 세 바퀴를 하나 하나 살펴보고 혹여 부족한 부분이 있으면 배움을 통해 조금씩 수양하면 되지 않겠는가?

'知止而後에 有定이니 定而後에 能靜하며 靜而後에 能安하며 安而後에 能慮하고 慮而後에 能得이니라.' (대학 원문)

The point where to rest being known, the object of pursuit is then determined and, that being determined, a calm unperturbedness may be attained to.To that calmness there will succeed a tranquil repose. In that repose there may be careful deliberation and that deliberation will be followed by the attainment of the desired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