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호칼럼] 실천적 지혜가 사라진 사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결코 앎이 아니다, 바로 실천적 지식이다
우리 사회는 실천적 지혜(프로네시스, Phronesis)를 타살한 지 오래다. 모두가 그것을 알면서도 모른 체 할 뿐이다. 우리 사회는 배움과 앎을 강조하면서도 실천적 지혜를 말하지 않을 것을 보면 그 지식의 이면에는 위선과 허위가 숨어 있는 것은 아닐까?
우리 사회는 방탕함이요 자제력이 없음이요 위선(僞善)이라는 이름을 가진 아크라시아(Akrasia)가 세상은 요지경이라는 노래에 맞춰 방탕한 춤을 추고 있다. 만약 지금처럼 아크라시아와 프로네시스의 간극을 좁히지 못한다면 국민의 고통지수는 절대 줄어들지 않을 것이다.
앎이란 무엇일까? 지식 쌓기란 어떤 의미일까? 매일 매스컴에 오르내리는 큰 사건과 사고를 보면 앎이 많은 사람이 주로 행함을 알 수 있다. 도대체 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누구든지 알면 행하는 것일까? 아니면 행하지 않은 것은 알지 못하기 때문일까? 만약 알면서도 행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의지나 자제력의 문제일까, 아니면 제대로 알지 못하기 때문일까?
소크라테스는 제대로 알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술을 끊으면 건강에 좋다는 것을 알면, 반드시 술을 끊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을 행하지 않는 것은 다름 아닌 앎이 올바르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결국 그는 만약 알면서도 실행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의지나 자제력이 부족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최선임을 제대로 알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소크라테스가 주장하는 참된 지혜를 갖추면 틀림없이 금주를 실천할 수 있을까? 사람은 정말 몰라서 행하지 않은 것일까? 알면서도 행하지 않은 것일까?
A 검사나 B 판사는 항상 공정과 상식을 입에 달고 산다. 그들이 법을 집행할 때 정말 정의로운 일이 무엇이고 정의롭지 않은 일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기 때문에 잘못된 기소나 판결을 하는 것일까?
H당의 정치인이나 P당의 시장은 눈만 뜨면 국민이 국가의 주인이라는 말을 외치곤 한다. 그들은 정말 어떻게 하면 국민이 행복할 수 있는 방법을 모르기 때문에 부정과 비리를 저지르며 나쁜 정치를 하는 것일까?
이런 사례를 보면 앎과 배움에 대하여 아는 것이 병이라는 식자우환(識字憂患)의 한자 성어를 꺼낼 수밖에 없다. 그러면서 넋두리로 말하곤 한다.
“정말 많이 배웠다는 사람이 더한단 말이야. 차라리 배우지 못했다면 그럴 수도 있겠다고 하겠지만, 많이 배워도 정말 아무 쓸모가 없어. 오늘도 배임, 뇌물수수, 청탁이 신문을 도배하고 있군. 또 고위공직자야, 정말 세상 말세야 말세.”
그렇다면 아는 것과 행하는 것을 다른 것일까? 이에 대하여 아리스토텔레스는 앎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해석하고 있다. 그도 올바른 행동을 하기 위해서는 먼저 알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렇지만 그가 말하는 앎은 실천을 위한 지혜, 즉 현명함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한다. 앎이 단순히 인식과 기술적인 지식이 아니라 현명함과 탁월성과 관련이 있다고 말한다.
즉 어떤 상황에서 일이 일어났을 때 과연 그 일이 자신에게 무엇이 좋고, 나쁘며, 무엇이 유익하고 해로운가를 판단하는 앎과 동시에 실천하는 지혜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의 견해에 의하면 알고 있지만, 행동으로 보여주지 않으면 그것은 올바른 앎이 아니라는 것이다.
A검사와 B판사가 자신이 행하는 것이 나쁘다는 것을 알면서도 의지나 자제력이 부족하기에 그것을 행한다고 하자. 만약 그들이 감정이나 욕구를 자제할 줄 아는 사람이라면 자기가 그것을 행하면 나쁘다는 것을 알기에 보편적으로 이성에 따라 행동한다는 것이다. 바로 실천적 지혜가 중요하다고 역설하고 있다. 그는 그것이 진정한 앎이요 현명함이요 탁월함이라고 말하고 있다.
지금 우리 사회는 배웠다는 사람이 상식 이하의 행동을 더 보여주곤 한다. 그들은 욕망을 절제하지 못하고 앎을 올바르게 사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 잘못된 판단과 행동이 고개를 쳐들며 위선(僞善)이 선(善)인 양 우리 주위를 서성이고 있다.
마치 정의와 사랑이 사람이 걸어가야 길임을 알면서도 그것을 실천하지 않는 교육자나 목회자처럼 말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결코 앎이 아니다. 바로 실천적 지식이다. 분초를 다투어 절실하게 행해야 할 것은 실천적 앎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