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호칼럼] 전족(纏足)과 분재(盆栽)의 통증을 아시나요

억압은 폭력의 다른 이름이다 아이에 대한 지나친 관심과 사랑은 간섭이요 폭력이다

2023-09-15     김광호
▲ 영혼이 자유로운 아이만이 삶을 아름답게 채색할 수 있다.

틱낫한 스님은 "우리는 바뀌기를 원하는가, 원치 않는가?" 이렇게 질문한 적이 있다.

이 물음에는 억압적이고 강요된 삶은 사라져야 한다는 인간 존중의 뜻을 담고 있다. 더불어 “아픈 상처들아, 너를 위해 내가 여기 있다.”라는 성찰의 중요성도 강조하고 있다.

전족, 분재, 아이의 삶은 다른 사람의 손길이 뒤따른다. 그 손길이 사랑이요 돌봄이 되어야 할 것인데 안타깝게도 돌본 이의 이기심과 욕망이 숨어 있다. 그것이 도움을 과장한 간섭이요 폭력이다.

전족은 중국에서 여성의 발을 인위적으로 작게 하기 위해서 자라지 못하도록 했던 악습(惡習)이다. 여자아이가 태어나 3세에서 6세 정도가 되면 헝겊으로 발을 동여매고 엄지발가락 이외의 발가락을 발바닥 방향으로 접어 넣게 해 작은 신발로 생활하길 강요했다.

10세기 당나라 시대에 유행했던 작은 발이라는 '미의 기준'은 그렇게 후대까지 계속 이어져 여성을 괴롭혔다. 여성이 자발적으로 선택한 것이 아닌 남성 중심의 사회에서 그들의 욕망을 채우기 위한 방편으로 전족을 강요했다고 하니 이 얼마나 잔인무도한 행위인가?

다행히 이런 풍속은 중화민국이 들어선 1912년에 금지되었지만, 여성의 인권을 짓밟았던 검은 역사는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 아이는 파도처럼 아픔을 알아야 성장하는 것이다.

분재에서도 억압의 단면을 볼 수 있다. 분재하는 행위는 생명에 대한 갑질이요 나무와 꽃의 존재에 대한 경시이다. 가정이나 관공서 그리고 전시회에서 사람의 시선을 사로잡는 것이 분재이다. 나무와 꽃의 생김새가 특이한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나무와 꽃은 아프다고 야단인데 그것을 소장한 주인이나 관람하는 사람까지 한마음이 되어 품평회를 여는 모습을 보면 측은한 마음을 숨길 수 없다.

스스로 그러해야 할 나무와 꽃에 스스로 그러해서는 안 된다며 억지 모습을 강요하며, 철사로 온몸을 칭칭 감아 알뜰하게도 돌봐주고 있지 않은가? 억압을 받아본 사람만이 나무와 꽃의 고통을 이해할 수 있으리라.

나무는 "당신의 마음부터 돌봐라. 더 이상 당신의 관심은 필요치 않다. 그냥 생명을 생명으로 대할 수 있는 마음만 갖기 바란다."라며 하고픈 말을 선연하게 토해낸다.

아이의 삶은 어떠한가? 그들 또한 전족이나 분재처럼 필요 이상의 돌봄을 받고 있다. 아이는 부모의 특명, 성공과 행복을 찾기 위해 부자유스러운 틀 속에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공연히 딜레마에 빠질 때가 많아요. 세상에 두 가지 방법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거죠. 그러니까 A가 마땅찮으면 B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하지만 그건 옳지 않아요. 아직 남은 알파벳이 얼마든지 있잖아요."

미국 추리문학의 대가 로렌스 블록의 소설 '800만 가지 죽는 방법'에 나오는 글이다. 아이에게 성공한 삶만을 요구하다 보면 아이는 꿈도 미래도 잃어버릴 수 있다. 안타깝게도 어른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아이에게 서로 해치고 상처 내는 방법을 가르치고 있다. 어른도 이런 삶의 방식을 경제와 과학에게 은연중에 배웠는지 모르겠다. 언제까지 성공만 이야기하며 아이에게 상처 내는 능력만을 키워줄 것인가.

▲ 나는 밝음을 알기 위해서 어둠을 향한다.

더 이상 아이의 마음을 부모의 욕망으로 동여매서는 안 된다. 실제로 부모는 아이의 마음을 동여매지 않았다고 강변하겠지만, 아이의 마음은 오래전부터 꽁꽁 묶여 있다. 부모의 돌봄은 분명 필요하다. 하지만 탐욕으로 아이의 마음까지 색칠하지는 말자.

아이가 길들여지면 지금 당장은 부모는 편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기억해야 한다. 전족은 악습이라는 이름만 남긴 채 사라졌다. 분재 또한 멈춰야 할 행위이다. 아이가 삶과 대화를 나눌 수 있도록 한 다리 건너서 지켜보는 용기가 필요하다.

부모는 아이를 많이 아낀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아이를 자기 울타리 안에 가두어 두려고 한다. 그것은 진정한 사랑이 아니다. 자칫 잘못하면 폭력으로 끝날 수 있다. 전족과 분재는 억압하는 삶이 싫다고 세상에게 말하지 않던가. 이젠 부모가 답할 차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