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사람은 죄가 없다, 마을 대표인 나를 죽여라"
한국전쟁 당시 마을 주민들 살리기에 헌신한 염봉현
요즈음 TV 뉴스 보기가 싫다. 진영 논리에 빠져 상대방을 헐뜯고 남탓만하는 정치인들 때문이다. 자신의 허물은 모른 채 남만 잘못했다고 한다. 분열된 국론을 통합해 국가의 미래를 위해 열심히 일할 줄 알았던 대통령이 국무위원들에게 "싸워라!"고 말하는 모습에 절망한다.
평범한 시민이 원하는 리더는 어떤 사람일까? 대단히 위대한 사람? 뛰어난 능력이 있는 사람? 아니다. 공동체 구성원과 함께 이야기도 하고 구성원의 아픔에 공감하며 따뜻한 말로 위로해 주는 사람이다. 때론 위기에 빠진 집단 구성원들을 위해 몸을 던져 희생할 줄 아는 사람이 진정한 리더이다.
마을 주민에게는 죄가 없다며 "마을 대표인 나를 죽여라!"고 외친 염봉현
여기 그런 사람이 있다. 지난 수요일(20일) 시계를 여순사건과 한국전쟁이 벌어진 70여 년 전으로 되돌리기 위해 전라남도 보성군 문덕면 봉정리 말치마을을 방문했다.
제보자인 한금희씨와 필자는 인연이 깊다. 광주항쟁이 일어난 1980년 전남대학교 인문사회과대학 학생회 간부로 만났다. 그후 1985년부터 여수에 있는 여도중학교에서도 같이 근무했다. 사회 변혁 운동에 관심이 많았던 한금희 교사가 어느 날 여순사건 관련 이야기를 하다가 자신의 외할아버지에 대해 이야기했다.
"한국전쟁 당시 인민군이 들어왔을 때 마을 사람들이 어쩔 수 없이 부역하게 됐는데 국군이 진주해 부역자를 색출하려고 했대요. 이 소리를 들은 외할아버지가 "마을 사람들은 죄가 없으니 마을 대표인 나를 죽여라!" 라고 하시자 국군 책임자가 "당신은 훌륭한 사람"이라며 한 명도 죽이지 않았대요."
어릴 적부터 어머니한테 여러 차례 외할아버지에 대해 듣고 자랐던 한금희씨는 학생과 학부모뿐만 아니라 동료 교사들로부터 존경받는 교사였다. 그러던 그녀가 결혼 때문에 학교를 떠나겠다(2000년)고 하자 그녀를 아는 많은 사람들이 아쉬워했다.
결혼해 부천으로 이사간 그녀는 여러 시민단체에 가입해 열심히 활동했다. 10여년 동안 부천시민아이쿱생협 이사장직을 맡았고 현재는 부천 교육사회적협동조합 이사로 마을교육을 위해 활동하고 있다.
그런 그녀가 지난주 여수에 와서 옛 동료 몇 분과 식사 후 차담하던 중 필자가 그녀에게 "30년 전에 나한테 해줬던 외할아버지 얘기 좀 다시 들려줘봐요"라고 요청해 자세한 전말을 들은 후 취재에 나섰다.
보성강변에 자리잡은 말치마을은 1992년 주암호가 완성되자 수몰되어 마을이 사라졌다. 마을이 수몰되자 말치마을 주민들은 다른 지역으로 이주했기 때문에 한국전쟁 당시에 벌어졌던 상황을 증언해 줄 분을 찾기 위해 보성군청과 향교, 보성문화원, 문덕면 사무소까지 수소문했지만 말치마을에 살았던 분을 찾을 수 없었다.
다만 말치마을에서 1㎞ 떨어진 법화마을에 사는 선병국(88세)씨와 연락이 닿았다. 법화마을을 방문해 선병국씨를 만나 당시 말치마을에서 일어났던 일을 들어보니 자세한 전말은 알지 못하지만 대강의 내용을 들을 수 있었다.
외려 당시의 숨막히는 상황을 옆에서 지켜봤던 이는 한금희씨의 어머니인 염순자(86세)씨와 외삼촌인 염광일(83세)씨다. 취재하기 위해 보성에 도착하니 한금희씨와 염광일씨가 기다리고 있었다. 염광일씨는 광주와 전남의 교사로 근무하다 광주교육대학 부속초등학교 교장을 역임했다.
보성에서 점심을 먹은 후 가을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도로를 따라 한참을 달려 법화마을에 도착하니 선병국씨가 마을회관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고령이지만 문덕면지 편집위원을 역임해서인지 기억력도 뛰어났고 건강한 모습이다.
선병국씨와 염광일씨는 5년 터울이고 이웃 마을이라 단박에 서로를 알아보고 포옹하며 "아이구! 형님 오랜만입니다"하자 "이게 누구야? 40년만에 만났지만 옛모습 그대로네. 반가워 동생"이라고 말하며 말문을 열었다. 선병국씨에게 "여순사건 당시와 한국전쟁 때 말치마을에서 벌어졌던 일을 아십니까?"하고 묻자 답변을 했다.
"여순사건 때는 잘 모르고 6.25 지나고 나서 다른 마을은 시끄러웠는데 말치마을만 조용했어요. 그 당시는 이 이념이 맞는지 저 이념이 맞는지 잘 몰랐지 뭐. 하여튼 다시는 그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 돼요. 그 어른하고 우리 아버지하고 사이가 좋아서 설에는 찹쌀을 갖다 드렸어요. 선정비 이야기는 못 들었는데 그 어른보고 나쁘다고 할 사람은 없을 것이여."
"우리 동네 사람들 아무도 피해없게 하자"고 빨치산 출신 친구와 약속한 염봉현
한금희씨의 외할아버지인 염봉현(1915~1977)은 여순사건 당시 문덕면 산업계장이었고 한국전쟁 기간인 1951년에 문덕면장(5대)이 됐다. 이후 7대 면장을 역임한 그는 문덕농협을 창설하기도 했다.
다음은 당시 열네살이었던 염순자(한금희 모친)씨가 아버지인 염봉현씨에게 들었던 이야기다. 여순사건 당시 문덕면 산업계장이었던 염봉현의 친구는 빨치산 간부였었다. 친한 사이였던 둘이는 "우리 동네 사람들 아무도 피해 안 되게 하자"고 약속했고 둘이는 그 약속을 지켰다.
염봉현의 문덕면장 시절은 당시 전쟁에 흉년마저 들어서 매우 힘든 상황이었는데 세금은 예년과 다름없이 부과되었다. 이에 염봉현 면장은 보성군청에 문덕면 상황을 설명하고 감면을 요청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전남도청을 거쳐 부산임시정부를 찾아가 세금을 탕감해달라고 끈덕지게 호소한 결과 문덕면의 세금을 탕감받게 되었다.
부산에서 좋은 소식을 가지고 온 염봉현 면장을 본 주민들은 그를 헹가래치고 선정비를 세워주겠다고 했지만 본인이 극구 만류했다. 선병국씨와 대화가 끝나자 옆에 앉았던 염광일씨가 인민군이 마을을 점령했을 당시의 상황을 설명해줬다.
"인민군이 마을을 점령한 동안에 아버지는 어쩔 수없이 마을 인민위원장직을 맡았습니다. 지금으로 치면 인민위원장은 이장이죠. 아버지의 조카인 사촌형님이 순천경찰서 형사로 근무하고 있었어요. 한국전쟁이 터지자 동료 경찰들과 함께 피난가는 트럭을 타고 부산으로 가던 중 하동쯤에서 갑자기 뛰어내렸대요. 일찍이 큰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어머니와 여동생만 남기고 떠날 수 없기 때문이었답니다. 이때 동료 경찰들의 총격으로 다리에 관통상을 입었다고 합니다.
형님은 아픈 다리를 끌고 일주일만에 고향마을에 도착했어요. 본가에 들르지 못한 형님은 작은 아버지인 우리집 마루 밑에 구덩이를 파고 숨었대요. 나는 당시 열 살이었는데 그런 사실을 전혀 몰랐어요. 혹시라도 철없는 어린이가 발설할까 걱정한 어른들이 비밀로 했나봐요. 그 형님이 무사히 탈출할 때도 전혀 몰랐다니까요. 나중에 누나들한테 들었죠. 마루 밑 개구멍을 모두 돌로 막아버리고 사람이 들어갈 만한 크기로 마룻바닥을 톱으로 잘라 구덩이를 파서 요강과 음식을 넣어줬다고 합니다.
경찰인 형님이 마을에 돌아왔다는 소문을 들은 인민군들이 수시로 우리집으로 들이닥쳐서 아버지더러 "조카를 어디다 숨겨 놓았느냐. 조카를 내놔라"고 했어요. 형님은 수복이 될 때까지 인민군의 행패를 마루 밑에서 숨어지내면서 다 들었다고 했어요."
다음은 염순자씨와 당시 10살이었던 염광일씨가 해준 뚜렷한 증언 내용이다. 인민군이 물러간 후 마을에 들어온 국군은 마을 사람들을 전부 당산에 집합시켜놓고 인민군에 부역했던 부역자 색출 작업에 나섰다. 군 간부가 외쳤다.
"염봉현이는 나와라!"
"예! 제가 염봉현입니다. 제 조카가 경찰이었고 조카를 살리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인민위원장직을 조건부로 수락했습니다. 반장을 맡은 마을 사람들은 어쩔 수없이 부역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죄가 없습니다. 죽이려면 나를 죽이십시오."
이 말을 들은 대장이 염봉현씨에게 악수를 청하며 "경찰 가족이었고 마을을 위해서 희생한 모습이 아름답습니다"라며 동네 주민들한테 "박수를 쳐라!"고 명령한 후 "당신이 원하는 게 무엇이요?"라고 묻자 "마을 사람들 손대지 말고 치안을 확보해 주세요"라고 말했다.
당시 이 모습을 옆에서 지켜본 둘째 딸 염순자(당시 14세)씨는 "애기를 업고 있는 어머니 몸이 얼마나 떨리는지 애기까지 덜덜 떨렸어요"라고 증언했다. 이웃마을 인민위원장이 죽었다는 소문이 돌고 있어 남편이 죽을지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전쟁이 끝난 후에도 아버지를 잡으러 온 빨치산에게 맞아 어머니가 두 번이나 기절한 것을 목격한 염순자씨가 몸서리쳤던 경험담 한 가지를 보탰다. 염봉현씨는 자수하는 방법과 절차를 모르고 두려워서 망설이는 주민들을 설득해 60리나 떨어진 보성경찰서까지 데리고 가서 자수시키느라 머리가 하얗게 됐다고 기억했다.
이념전쟁에 휩싸였던 여순사건과 한국전쟁사를 보면 좌익과 우익이 서로 죽고 죽이는 보복 살인으로 수많은 사람이 희생됐다. 그러나 말치마을에서는 그러한 보복살인은 없었다.
염봉현 면장은 시골 향리이다. 어려운 시기에 내 편과 네 편의 편가르기를 마다하고 마을을 위기에서 구했다. 마을 주민들이 총살당할 위험에 빠지자 마을 대표인 자신이 책임지겠다며 죽기를 자청한 시골 마을 리더의 살신성인은 후세에 귀감이 되기에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