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포미군폭격사건 취재나선 '자유아시아방송'

이야포 찾은 자유아시아방송..."진실 찾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겠다" 마지막 생존자 이춘혁 어르신 생계지원 절실 여수시의회 이야포특위 박성미 위원장 "토론회와 학술대회 이어갈 것"

2023-10-28     심명남
▲ 이야포미군폭격을 생생히 목격한 이사연 어르신이 자유아시아방송과 인터뷰 모습 ⓒ심명남

이춘혁 그분이 죽기 전에 다만 보상이라도 받았으면 좋겠다는 절실함을 전합니다. 350명중에 살아있는 마지막 한사람 아닌가?

73년전 14살에 이야포 참사를 목격한 안도 주민 이사연 어르신의 말은 절절했다.

4대의 미군폭격기가 당산 나무가 닿을 정도로 저공비행으로 날아와 350여명이 탄 피난선을 폭격한 미군에 대해 그는 "한국민을 그렇게 많이 죽여놓고 조정사가 살아 있다면 와서 빌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미국이 자유민주국가가 아니다"라고 거듭 미국의 사죄를 촉구했다.

▲ 이야포 주민 이사연 어르신이 자유아시아방송과 인터뷰중에 마지막 생존자 이춘혁 어르신에 대한 생계지원이 절실하다고 호소하고 있다 ⓒ심명남

작전보고서 살펴본 자유아시아방송....이야포 취재 나서

이날 자유아시아방송 기자가 미군작전보고서에는 4대의 편대가 공격했다고 되어있는데 4대가 공격한 모습을 봤냐는 물음에 "전투기 편대가 2대씩 4대가 안도 당산나무가 닿을 정도로 낮게 날았다"면서 "당시 쏜 기관총 실탄 껍질이 많이 떨어져 주민들이 주웠다"라며 "그때 실탄 껍질을 주워 놨다면 이 사건을 해결하는데 편했을 텐데 놓쳐버린 게 한스럽다"라고 한탄했다.

그러면서 "미군의 기총사격으로 수많은 피난민이 총맞아 쓰러져 아비규환으로 변했고, 이후 산자들이 한꺼번에 너무 많이 전마선에 올라 타서 배가 뒤집혀 많이 죽었다. 이후 3일뒤 죽은 사람들이 바다에서 떠올랐는데 자꾸 시체가 뜨니까 영암경찰에서 기관장에게 바다에 뜬 시체와 육지에 있는 시체를 본선에 실으라고 명령해 불을 질러 3일 밤낮으로 불타 배가 침몰됐다"라며 생생한 증언을 이어갔다.

이날 하늘에선 까~악 까~악 까마귀가 계속 울어 대며 평화탑 위를 빙빙 맴돌았다. 이야포의 시간은 태엽풀린 시계처럼 멈췄지만 무심한 세월은 73년이 훌쩍 지나버렸다.

▲ 이야포미군폭격사건을 취재중인 자유아시아방송과 이종명 언론학 박사의 모습 ⓒ심명남

27일 오전 여수시의회 미군폭격사건 특위는 남면 안도 이야포 현장 활동에 나섰다. 이날 박성미 위원장과 이미경, 정신출, 문갑태 위원과 여수시의회 자유아시아방송 이정호 한국특파원 주재 기자와 취재팀 그리고 강원대학교 이종명 언론학 박사 등 15명이 이야포 평화공원을 찾았다.

자유아시아방송 취재팀이 동행해 이야포 평화공원을 둘러보며 73년전 그날의 생생한 목소리를 청취했다.

▲ 27일 오전 미군폭격사건 특위가 남면 안도 이야포 현장을 찾은 어업지도선 202호 관공선에서 하선하고 있다 ⓒ심명남
▲ 어업지도선 202호가 당시 이야포사건이 발생한지 6일뒤 미군폭격으로 조기잡이에 나선 지역민 20여명이 희생된 두룩여를 지나고 있다 ⓒ심명남

신월동을 출발한 어업지도선 202호 관공선은 미군폭격사건이 발생한 두룩여 비극의 현장을 둘러봤다. 이후 이야포가 있는 안도 마을에 도착했다. 일행은 주민들과 점심을 함께하며 이야포 평화공원과 백비 표지판이 설치된 현장 취재가 시작됐다. 또 피난선 침몰선 잔해가 발견된 현장을 둘러보며 73년 전 과거로 되돌아갔다.

이번 행사를 기획한 이야포 특위 박성미 특별위원장은 "지역 사회에서 관심을 가져주니 외신에서 여수까지 찾아주셔서 너무 감사하다"면서 "지금까지 특위위원님과 함께 해왔던 세월과 과정속에 억울하게 돌아가신 분들에 대한 다양한 역할을 해왔는데 이것을 계기로 다음달에 학술대회를 준비 하려한다"라고 말했다.

▲ 여수시의회 이야포특위 박성미 위원장이 선상에서 자유아시아방송과 인터뷰 모습 ⓒ심명남

이어서 "10월말에 침몰선 인양 결과가 잘 나오면 굉장히 좋은기회라 생각한다"면서 "어쩌면 이 시간을 계기로 미국에 잘 알려진다면 생각했던 것보다 빠르게 특별법 제정으로 다가가지 않을까 생각한다"라고 덧붙였다.

제주4.3으로 논문을 쓴 이종명 언론학 박사(35세)는 "이런 일들이 어떻게 언론에 기록되고 있고 기억하고 있는가? 지역 차원에서 국가 공식기록으로 남기는지, 노근리, 제주4.3, 광주 518이 아주 치열한 논쟁과 과정을 통해 공식화 되었다"라며 "기념식을 거치고 국가의 공식적인 사과, 위로와 보상 등 순차적인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라고 말했다.

▲ 이야포미군폭격사건 취재에 나선 자유아시아방송과 이정호 기자(좌)와 강원대 이종명 언론학 박사의 모습 ⓒ심명남

그러면서 "이야포는 이제 막 시작하는 단계인 만큼 이것을 학술적으로 다뤄주고 언론학계와 시민단체 그리고 지자체와 함께 움직인다면 굉장히 큰 목소리가 되고 제주4.3 처럼 오래 걸리지 않고, 좀더 빨리 국가의 비극적인 사건들이 회복될 수 있도록 학계에서 힘을 보탤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현장을 방문 했다"라고 말했다.

이야포 특위, 특별법 제정에 힘모으겠다.

자유아시아방송 이정호 기자는 앞으로 취재 계획을 묻는 질문에 "이 사건이 미국에서 잘 알려지지 않았다"면서 "직접 취재해 진실을 찾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겠다"라고 약속했다.

▲ 이야포 특위 문갑태 의원이 진상규명을 위한 빠른 특별법 제정을 촉구했다 ⓒ심명남

현장을 찾은 문갑태 의원은 "여수하면 떠오르는 게 반란, 학살, 사건 등 안좋은 모습들이 있었던 게 사실인데 이를 풀어가려는 시민들의 노력과 관계 공무원들의 노고로 여수가 평화와 안식 인권의 도시로 거듭나고 있어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야포에서 미군에 의한 피난민들이 학살당한 사건이 발생해 너무 안타깝다"며 "빨리 이 분들의 명예회복과 진상규명이 이루어져 당시에 아픔을 치유할 수 있도록 정부와 도민, 여수시가 함께 손을 잡고 여순사건의 특별법을 만들었던 것 처럼 이야포와 두룩여 학살사건에 대한 특별법을 만들어 배보상은 물론 이곳에 평화 공원이 생길 수 있도록 힘을 모으겠다"고 다짐했다.

▲ 제주4.3 유족인 정신출 의원은 부모님의 아픔을 보고 살았기 때문에 이야포 사건 당사자는 아니지만 그런 대물림했던 아픔을 느낀다고 말했다 ⓒ심명남

정신출 의원은 자신이 4.3 희생자임을 커밍아웃했다.

사실은 우리 지역이 아닌 다른 외신에서 많은 관심을 갖고 멀리서 찾아와 줬다 라는 것만으로도 이야포에 대한 진실이 한 발짝 더 가까워질 수 있는 가능성을 가졌다는 측면에서 매우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이런 기회로 인해 이야포의 진실이 정말 밝혀져야 합니다. 우리가 원하지 않았지만 불행한 역사가 생겨버렸기 때문에 우리 제도권에 있는 의원들이 책임감을 가지고 알려야 하는 역할을 해야 됩니다.

저도 사실 4.3 희생자 유족의 한사람입니다. 부모님의 아픔을 보고 살았기 때문에 이야포 사건 당사자는 아니지만 그런 대물림했던 아픔이 느껴져요. 비슷한 역사를 가진 여수와 제주는 당시 혼돈의 시대였고, 그 이후 이야포·두룩여 미군폭격사건으로 피난민과 지역민이 많은 아픔이 있었어요. 그때는 미국이라는 거대한 나라에 대항을 하지 못했지만 지금은 아니라고 봐요. 그때는 하고 싶은 얘기를 못했지만 지금이라도 진실을 밝혀내 우리 아이들에게도 이런 역사에 대한 교훈을 분명히 남겨줘야 하는게 의원 사람으로서 책임감을 가져야 된다고 생각 하고 있습니다.

▲ 여순특별위원장이자 이야포특위 위원인 이미경 위원장은 가슴 아픈 역사의 이데올로기를 다듬어서 평화공원에 있는 이야포의 그날과 추모비를 보니 울림이 있는 것 같고 맘이 아프다고 말했다 ⓒ심명남

마지막 여순특별위원장이자 이야포특위 위원인 이미경 위원은 "이야포 특위위원들이 매번 이곳에 왔지만 올때마다 가슴이 울리는 이유는 저희가 특위를 하면서 마무리를 못 짓는다면 이춘혁 어르신의 소원대로 뭔가 결과물을 만들지 못한 것에 대한 책임감을 또 한 번 통감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저희가 의회에서 지속적으로 사업이 될 수 있도록 했으면 좋겠는데 방법이 무엇인 알아보고 같이 연구해 제대로 된 역사의 기록을 다시 한 번 새기는 자세로 임하고 싶다"고 피력했다. 그러면서 "여순특위위원장을 하고 있지만 이야포도 별반 다르지 않기 때문에 가슴 아픈 역사의 이데올로기를 다듬어서 심장에 새긴 아픔이 아닌 저희가 목적의식을 가지고 새겨야 할 부분이 아닌지 절절한 생각이 든다"라며 눈시울을 붉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