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두번 감옥간 아버지에 여동생까지...쑥대밭 된 납북어부의 삶
평생을 감시당한 납북어부 가족들의 기구한 삶 53년 만에 무죄받은 탁성호 선원들 재심 줄이어
53년 만에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은 탁성호 선원들의 재심 청구가 줄을 잇고 있다. 전남 여수 금오도 여천기미(여천마을)에서 오징어잡이 배를 탄 탁성호 선원 4명이 재심 준비에 나선 사실이 뒤늦게 알려졌다.
주인공은 탁성호 생존자 김덕주씨를 비롯해 고인이 된 신유근, 김우수, 오재식 씨의 유가족이 바로 그들. 생존자 김덕주(81세) 씨는 현재 요양원에서 투병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여천기미 마을 4명 탁성호 승선해 납치 당해
현재 고 신유근씨와 김덕주씨는 재심을 신청했고, 부산에 사는 고 김우수 아들 김기호씨는 부산에서 변호사를 샀다. 또 고 오재식 자녀 오근식씨 역시 재심을 준비중인 것으로 확인됐다. 같은 동네에 살았던 터라 이들은 서로 연락을 주고받고 있다.
53년 만에 무죄 선고 소식을 듣고 <여수넷통뉴스>에 연락해온 탁성호 선원 신유근의 딸 신선자(68세)씨는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그냥 평생 가슴에 묻혀 살뻔했는데 이렇게 탁성호 선원들의 무죄 소식에 너무 감사하고 기쁘다”라면서 “아버지가 감시와 탄압받던 굴레에서 완전히 벗어난 느낌이었다”라는 소감을 털어놨다.
지난달 30일 여서동 찻집에서 두명의 유가족을 만난다. 아버지와 남편의 억울한 삶을 법원이 무죄 선고를 했는데 어떤 말을 하고싶냐는 물음에 신씨는 “세상이 좋아져서 이런 일은 다시는 없겠지만 우리같이 정말 억울한 사람이 없는 공평한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다”라는 바람을 전했다.
당시 나이 21살이었던 신씨는 아버지의 기억을 털어놓으며 "아버지가 이야기하는 것을 아주 싫어했다. 왜냐면 날마다 형사들이 깔려있고 사람만 지나가도 무서워했다"며 "아버지는 납북사건으로 두 번이나 간첩으로 몰려 순천교도소에 갔고 이로 인해 모진 고초를 겪는 한 많은 삶을 살았다“라고 털어놨다.
송환뒤 또다시 마을 이장이 간첩으로 몰아...
형사가 돈을 주면서 동네 사람들한테 이북 다녀온 얘기를 들려달라 했어요. 아버지를 술자리에 불러내어 이북은 뭐가 있더냐 물어 아무 말을 하지 않자 담배는 있더냐고 묻길래 담배 줘서 얻어 피웠다. 그리고 사과도 얻어 먹어봤다는 얘기를 하니 이장이 아버지를 간첩으로 신고했어요. 형사가 마을 이장한테 돈을 주면서 술을 사 먹이라고 부추긴 거예요. 옛날 간첩신고 하면 포상금이 있으니까 짜맞추기식 수사로 인해 아버지는 2차피해로 모진 고초를 당했고, 교도소를 두 번이나 다녀온 뒤 대인기피증이 생겼어요. 그 후 60대 초반에 돌아가셨어요.
송환된 후 1차 교도소를 마친 후 그의 아버지는 또다시 2차 피해를 당했다. 이장이 간첩으로 몰아 붙인 것. 교도소를 다녀온 뒤 신씨의 아버지는 거동을 못 하다시피 집에만 누워 있었다.
이런 자초지종을 안 파출소장은 이장을 꿇어 앉혀놓고 돈 얼마 받아 처먹었냐고 싸대기를 갈겼다. 이북에서 고생하고 온 것도 서러운데 왜 신고했냐고 호통친 않는 것을 가족들이 직접 목격했다. 이후 신씨는 그동안 아버지의 억울함을 풀기위해 사방팔방을 찾아 헤맸지만 허사였다. 결국 포기하고 살다가 작년 12월 진실화해위원회와 면담을 했다. 이런 사실을 딸에게 어떻게 해면 좋겠냐고 했더니 사위가 <여수넷통뉴스>를 알려줘 자세한 기사를 접하게 되었고 뒤늦게 재심을 신청했다.
아버지가 납치된 후 신씨 가족은 풍비박산이 났다. 그는 "아버지의 사건으로 온 가족이 쑥대밭이 되었다”면서 “형사가 아버지를 잘 봐주겠다는 조건으로 초등학생 동생을 데리고 가서 식모살이했는데 동생이 트라우마로 자살해 세상을 일찍 떠났다”라고 한탄했다. 그는 이어 “큰동생은 낮에는 해녀 배를 타고 밤에는 고되구리 배를 탔다"면서 "남동생이 가족들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기에 너무 일을 많이 하다 보니 두번의 양쪽 무릎과 네번의 허리 수술을 하다 보니 몸이 온전하겠냐?”라며 눈시울을 붉혔다.
연애시절 결혼 앞두고 납치당한 기구한 운명
또 다른 선원인 김덕주 씨의 부인 배종엽(71세) 여사의 사연은 기구하다.
당시 둘은 연애 시절이었다. 남편은 30대 노총각시절 약혼녀 배씨는 19살이었다. 배씨는 “그때 서로 양갓집을 오가던 시절이었는데 돈 벌러 오징어 배 타러 갔다가 납치가 되고 말았다”면서 결혼을 약속한 사이였다. 배씨는 “아저씨가 교육을 얼마나 받았는지 말을 안해 깊은 내막은 모르겠는데 야튼 고생을 엄청 많이 했다. 송환 후 자녀 4명을 낳았다”라고 기구한 삶을 털어놨다.
남편이 송환된 뒤 여천기미에서 29살때 여수로 나왔어요. 남편은 여천공단 노가다도 하다가 몸이 안 좋아 집에서 가끔 배도 탔어요. 몸이 아파서 가장으로서 돈도 못벌고 맨날 허리 아프다고 골골했어요. 그렇게 살다 보니 나 혼자 애들 키우면서 돈 되는 일이라면 안 해본 일이 없어요. 배 FRP 일부터 탱크 청소와 노가다도 댕기고 식당 일까지 자식 넷 키우려고 돈되는 일이라면 다 하고 살았어요.
눈시울을 붉힌 그는 끝내 울음을 터트렸다. 남편이 원래부터 몸이 안 좋냐고 묻자 “젊었을 때는 건강했는데 북한에 납치되고 난 뒤 송환되어 허리를 잘못 맞았는지 허리가 병신이 되어 돌아왔다”라면서 “간첩으로 몰려 엄청 맞았다”라고 말했다.
배씨는 “진실화해위원회에서 연락이 와서 재심을 청구해 억울하게 간첩으로 몰린 것에 대한 명예회복 하는 것이 평생소원이었다”라면서 “신원조회에서 빨간줄이 올라가 아들이 대기업에 취직을 못했는데 살아생전 남편의 빨간줄을 지울 수 있다면 원이 없겠다”라며 억울했던 지난 시절을 털어놨다.
재심 무죄, 탁성호 사건은?
한편 31명의 선원이 납치당한 여수선적 탁성호 사건은 1971년 여수에서 동해로 오징어잡이에 나섰다가 8월 30일 악천후 속에 밤새 오징어 조업을 마치고 동해 묵호항으로 돌아오는 길에 북한 경비정에 ‘납치’당했다.
탁성호는 납치 직전까지 해군에 구조를 요청해 약 6시간 동안 대치되면서 언론을 뜨겁게 달궜다. 당시 대한민국 영토인 거진 앞 해상에 침투한 북한 경비정에 의해 강제납치되었음이 기록상으로도 명백한 전례 없는 대한민국 어부가 납치된 사건을 말한다.
이후 동해에서 조업하던 선원들이 수사기관으로부터 인권침해를 받은 중대 사건으로 귀환 직후 불법구금되어 수사를 받고 국가보안법, 반공법 및 수산업법 위반으로 처벌 받았다.
이후 제54차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는 '승운호 탁성호 등 납북귀환어부 인권침해사건에 대해 '진실규명결정'을 내렸다. 재심에 나선 유가족은 10월 26일 오후 2시 광주지방법원 순천지원에서는 탁성호 선원 김석봉, 김도암, 서미남, 심여종, 심일수 5명에 대한 재심에서 허정훈 재판장은 국가보안법 위반, 수산법 위반 등은 모두 무죄를 선고했다.
재판부는 50여 년이나 지나서 판결이 잘못된 과거 판결 법원을 대신해 진심으로 죄송하다고 사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