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는 마냥 기다려 주지 않는다
새벽부터 종일 일해도 언제나 돈걱정 뿐 늙고 병든 엄마에게 최선을 다하지 못했던 자신에게 후회만
울엄마 생각만 해도 가슴이 먹먹해지고 코끝이 찡하다. 어린 시절 기억 속의 우리 엄마는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하루 종일 일하셨다.
동네 사람들 일어나기 전에 (냄새로 민폐 끼칠까봐) 꼭두새벽에 머슴인 대원이 오빠와 함께 밭에 거름으로 쓸 똥을 퍼서 오빠의 똥지게에 올려 주시던 엄마 모습을, 일찍 잠이 깨던 날 종종 목격하고는 했었다.
아침에 애들 학교 보내고 낮에는 밭일, 논일, 밤에는 많은 아이들에게 입힐 헌 옷과 양말을 꿰매시던 우리 엄마, 어릴 적 내 기억속에는 차려입고 나들이 가던 기억은 거의 없고 몸빼 바지에 하얀 수건 쓴 모습만이 생생하게 떠오르곤 한다.
항상 수심 가득하던 우리 엄마, 그런 울 엄마가 웃으시면 나도 괜히 기분이 덩달아 좋아지고는 했었다. 울 엄마는 딴 살림을 차려 나가신 아버지에게서 경제적인 지원이 잘되지 않으니 언제나 돈 걱정으로 수심이 가득했었다.
섣달그믐께 주어야 하는 머슴 오빠의 새경(일 년 치 품삯). 분기별로 우리들의 등록금이 나올 즈음마다 엄마의 근심은 더욱더 깊어졌다. 엄마가 힘들어할 때마다 옛날 수산조합(수협의 전신)에서 근무하시던 외삼촌이 달려와서 대강 해결을 해주신 걸로 기억이 난다. 외삼촌이 다녀가시면 엄마의 얼굴에서 웃음이 묻어 나오고는 했으니까….
중학교 3학년 어느 겨울날로 기억된다. 나는 중학교 1학년짜리 남동생과 부산으로 아버지를 찾아간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아버지는 그때 당시 인천에서 2호 부인과 살고 있을 때인데 어느 날 엄마가 우리를 부르더니 “느그 아부지가 부산으로 배가 들어와서 고기를 팔러 왔다고 하니까 느그 둘이서 가서 납부금이랑 돈을 좀 타오너라” 하면서 나로도에서 배를 타면 여수를 거처 부산으로 가는 ‘태안호’라는 배를 태워 주었다.
처음 가는 우리들만의 대도시로의 여행이어서 두렵고 떨렸지만 엄마의 명령이라서, 또 가서 우리가 돈을 타오면 엄마가 좋아할 것 같아서, 또 둘이 같이 가니까 용기를 내서 배를 탔다. 그때에는 나로도에서 부산까지는 1박 2일 걸렸다. 배에서 잠을 자고 새벽에 내려서 지금도 기억나는데 부산 영도에 있는 남항 여관이라는 데를 물어물어 찾아갔더니 아버지는 이미 마산으로 가버리고 없었다,
아버지를 못 만나서 난감해 하는 우리들이 안 되었던지 여관 주인이 다음에 아버지 만나면 받기로 하고 우리에게 집으로 돌아갈 배삯을 빌려주셨다. 부두에 와서 배표를 사고 나니 딱 빵 한 개 살 돈이 남아서 빵 한 개를 샀다. 둘 다 어제부터 아무것도 못 먹었으니 얼마나 배가 고팠겠는가?
그러나 그래도 나는 내가 누나라고 동생 먼저 먹으라고 주었더니 동생이 한 조각도 남겨주지 않고 다 먹어버렸다. 그때 마지막 조각이 동생의 목으로 넘어갈 때 그 서운했던 마음이 지금까지 생생하다.
결국 쫄쫄 굶고 허탕치고 돌아온 우리를 부둥켜안고 아버지를 원망하며 우시던 울 엄마의 그 울음소리가 지금도 귀에 들리는 듯하다. 새 옷은 아니라도 깨끗한 옷으로 입혀 주시던 우리 엄마, 보리밥이라도 배불리 먹게 해주시던 우리 엄마인데 난 정말 나쁜 딸이었다.
젊어서는 철딱서니가 없어서 그랬고 내가 철들고 나선 사느라고, 또 내 자식 기른다고 늙고 병든 엄마에게 최선을 다하지 못했던 나였기에 이렇게 후회가 된다. 엄마가 좋아하던 음식만 보아도 울컥, 엄마와 같이 갔던 장소만 보아도 울컥한다.
잘 해 드린 것 하나 없는 것 같고 못 해드린 것만 남아서 지금도 나를 괴롭힌다. 세상의 자식들에게 한마디 남긴다면 이 말을 남기고 싶다.
“부모는 마냥 기다려 주지 않는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