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창의 암 소식에 잊고 싶은 가을 산행의 기억 떠올려

이제는 기다려지지 않는 동창모임

2024-03-04     김경희
▲  산행 (자료사진)

어릴 적 한동네에서 낳고 자란 30년이 넘은 친구 모임이 있다. 이른바 30년 동안 '박힌 돌'들이다. 그런데 8~9년 전 새로운 친구 한 명이 모임에 들어오면서 박힌 돌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전까지는 모임 날이면 아침부터 콧노래가 나오며 기다려지고 하루 종일 기분이 좋았다. 모임에 가서도 즐겁고 힐링이 되었다. 새로 입회할 친구가 “한 명이라도 반대하면 안 들어오겠다”고 말해서 기존 멤버들은 나를 설득했고 내키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이 쪽수에 밀려 승낙했다.

그 친구와는 어릴 적부터 지금까지 특별한 추억도 없고 학창시절 같은 반을 했던 기억도 없다. 서로 좋은 감정보다는 안 좋은 감정만 갖고 있는 것 같았지만 부딪칠 일이 없으니 모르는 존재로 살아왔다.

그 뒤로 모임에 가는 게 그다지 즐겁지 않고 용기가 필요했다. 심호흡 크게 한번 하고 ‘오늘도 잘 끝내고 오자'라고 마음을 다잡고 향했다. 그러다 결정적으로 내 마음을 닫게 하는 사건이 생겼다. 

동창회 행사는 가을 산행이다. 회장을 맡은 나는 25인승 버스에 사시미, 찰밥, 찐고기등 맛있는 것을 잔뜩 실고 룰루랄라 떠났다. 도착해서 단체 사진도 찍고 산행팀, 둘레길팀으로 나눠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한참 시간이 지나도 산행팀이 내려오지 않았는데 여자 친구 한 명이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면서 다쳐 꼼짝할 수 없어 119구급대를 불렀다고 했다. 그날은 주말에 단풍철이라 차도 사람도 많아 구급차가 쉽게 들어오지 못했고 산에 올라가 환자를 실어 내려오는데도 시간이 많이 흘렀다.

맛난 음식들은 펼쳐 보지도 못하고 무거운 마음으로 일정을 마무리하고 돌아왔다. 그날 밤 평소 다친 친구와 절친을 자청하는 남자 동창에게서 내게 전화가 왔다.

그는 대뜸 “네가 지금 회장이고 네가 산에 데리고 갔으니 책임을 져라!”라며 입에 담기 힘든 욕지거리를 했다. 술 취한 목소리였고 말도 안 되는 술주사를 해 한참 실랑이를 벌이다 전화를 끊었다. 나는 그날 한숨도 못 자고 꼬박 날을 샜다. 다쳐서 수술하고 병원에 누워 있는 친구 귀에도 이날의 통화 이야기가 들어갔고 나도 그 친구도 한동안 마음고생하면서 시간이 흘렀다.

그러고 1년 정도 지나 그때 '진상' 남자 동창의 암 진단 소식이 들려왔고 몇 개월 시한부 판정을 받았다는 말을 들었다. 잊고 지냈던 가을 산행의 안 좋은 기억과 시한부 판정 소식에 마음이 뒤숭숭했다.

내 감정은 접어두고 한 번쯤은 병문안을 가봐야겠기에 동창회 총무를 맡고 있는 친구에게 전화했더니 ‘굴러온 돌’이라 표현했던 친구가 주축이 되어 병문안을 갔다 왔다고 했다.

그때 다쳤던 친구도 전화로 같이 갔냐고 물었고 휴가 중이라 못 갔다고 대답했다. 같이 병문안 가자고 하면 판단은 내가 할건데 ‘나한테는 연락도 안했다는 말이지?’ 어이가 없었다. 매사에 이런 식이라 나는 그 친구가 모임에 들어오는 것을 반대했었다.

휴가 중이라 못 갔던 친구와 따로 병문안을 갔다 왔다. 병문안을 다녀온 보름쯤 후 부고 문자가 떴다. 명절을 앞두고 있어 부의금만 보냈다. 병문안 사건 이후 나는 그 친구에게 모임은 같이 하고 있지만 마음의 문을 닫았다.

며칠 뒤면 동창회 모임인데 어찌 좀 떨떠름하다. ‘다른 친구들은 매번 모임 때마다 나의 이런 불편한 마음을 알기나 할까?’ 이제는 모임이 그다지 기다려지지 않는 건 왜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