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아이들 잘못된 모습 보고만 있어도 될까?
훈육하기 어려운 시대, 소신 있는 교육 찾을 수 없어
지상에서 최고로 가치있는 보석은 컬리넌이라는 다이아몬드라고 한다. 요즘 아이들은 컬리넌 이라는 이름을 능가하는 보석이다.
금쪽같은 내 새끼가 아니라. 컬리넌 같은 다이아몬드이다. ‘미운 우리 새끼’라는 프로그램도 있는데 이제 이말은 구식 말이 되어 버린 것같다.
옛날에는 남의 집 귀한 자식을 보면 “아이구 밉상이네!” 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 말은 잘 생기고 똑똑하고 영리해 지혜롭게 생긴 아이라는 덕담이었다. 지금은 농담이라도 밉상이라고 했다가는 평생 원수지간이 될 수도 있다.
사방으로 튀어야 할 혈기왕성한 어린이들을 부모의 우산 속에 가두어 놓는 모든 시스템이 갖추어져 있는 것 같다. 애플리케이션이라는 다양한 응용프로그램을 개발해 그 안에서 움직이게 해놓은 시대이다. 집 출발 학교 도착, 수업 끝나고 하교, 하교 후 학원, 이 학원 저 학원 순회, 각 학원 도착 때마다 자녀들이 샛길로 안 빠지고 도착했다고 부모의 휴대폰에는 딩동 이라는 멘트가 계속 쌓인다.
워킹 맘들은 그 소리만 들어도 자녀의 행방을 다 알아차린다. 어쩌다 실수로 소리가 안 들리면 안절부절이다. 연관된 곳으로 전화해서 난리친다. 부모가 집에 도착할 때까지, 여러 학원으로 가기 위해, 이 셔틀 저 셔틀로 시간을 맞추어 돌린다. 끝난 후 집에 도착하는 즉시 부모의 스마트폰으로 게임을 하느라 정신이 없다. 부모도 귀찮으니까 안전하게 집에 있는 것으로 만족한다. 대화가 없다. 부모는 직장에서 퇴근해 피곤하다. 자녀는 학원 도느라 피곤해 절어있다. 만들어진 부식으로 식탁에 앉는 그때가 부모와 자녀가 재회하는 시간이다.
그렇게 매일 다람쥐 쳇바퀴 돌듯 일상이 이어진다. 이런 생활이 습관이 되면 장차 독창적인 아이디어를 내거나 그런 생각으로 어떤 해결책을 제시하는 능력을 키우는 훈련도 부족하고, 창의성 발달은 뒷전이다. 모든 것이 만들어진 프로그램에 따라 사는 ‘레디메이드(Ready-made)’ 인생이 될 것 같다. “생각한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한다”고 말한 프랑스 작가 ‘폴 부르제’의 명언을 곱씹어 본다.
기성세대 들은 예전의 세계와 지금의 두 세계를 보면서 살고 있다.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시대를 따라가기에도 힘든다. 불과 몇 십 년 사이에 이렇게 변한 시대에 기성세대는 제대로 된 절차 없이 정신없이 따라가고 흉내 내고 양보하고 살고 있다. 꼰대 말을 안 듣기 위해서다. 꼰대에게는 엄청난 노하우가 있다는 걸 모른다. 그동안 젊은이가 가보지 않았던 생생한 경험이 얼마나 많겠는가, 대화의 방법을 모색해서 정말 전달 해주고 싶은 꼰대님들의 공통적인 생각이다.
삶이라는 분야(分野)에서, 지위(地位)나 나이ㆍ학예(學藝) 따위가 젊은 사람들과는 비교가 안 되는 데도, 잔소리이고 시대의 격차라고 싫어한다. 기성세대들의 책임도 있기는 하다. 불과 4~50년 전만해도 우리는 이렇게 살았다. 콩나물 시루같이 한 반에 7~80명이 다닥다닥 붙어 앉았다. 담임 선생님이 이름을 외우라고 가슴에 이름표도 달았다. 시퍼렇게 흘리는 코는 일상이니까 손수건도 옷핀으로 꽃고 다녔다. 교복은 등쪽과 소매 끝은 반들반들하다, 동생의 콧물과 본인의 콧물 자국이다. 세탁해 줄 시간이 없는 부모는 가족의 밥 때에 맞추기 위해 한시도 쉴 틈이 없었다.
농사철에는 큰 자식이 학교에서 돌아와야 동생을 맡긴다. 동생을 등에 업고 하는 둥 마는 둥 하다 보니 공부와 숙제는 뒷전이다. 학교에 가면 숙제 검사를 하고 안 해간 사람은 손바닥과 장단지에 시퍼렇게 피가 나도록 때린다. 그때는 교육이라는 미명 하에 그렇게 두들겨 맞고 와도 부모는 선생님한테 섭섭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숙제할 시간을 주지 않았던 죄책감에 부르터진 자녀의 다리를 보고도 선생님 말씀 잘 듣기를 바랬다. ‘선생님 그림자도 밟아서는 안 된다’는 훈화를 매일 들었기에 지금의 꼰대들은 반듯하지 않은 사람이 없다.
수업이 끝나고 하교길에 점빵에 들려 눈깔사탕 하나 사먹는 친구들이 부러웠다. 옆에 붙어 한 번만 빨아 먹자고 한다. 조건이 있다. 집에까지 수건에 싼 책보자기를 들어 주어야 한다. 그때는 책가방을 들고 다니는 학생이 보기 드물었다.
왕복 이십리 길을 마다 않고 어린아이들이 집에 오면 배가 고파, 찬물 한 사발 마시고 혹시 먹을 것 있나 여기저기 뒤져본다. 단지 안에 숨겨놓은 접대용 사과나 감홍시를 부모 몰래 훔쳐 먹다가 들켜 매를 맞곤 했다.
밖에 나가서 놀거리라곤 축구공을 대신하여 볏짚을 둥글게 뭉쳐 만든 공을 겨울철 빈 논에서 하다 넘어지고 다쳐도 스스로 아까징끼(머큐롬) 바르고 해지는 줄 모르고 너무 재미있어 죽기 살기로 뛰어 놀았다.
겨울철에는 농한기니까 부모님들이 만들어 주신 네모판 판자에 스키폴대와 스틱까지 만들어 냇가나 저수지에서 꽁꽁 얼어붙은 얼음사이로 절묘하게 다니는 자녀들을 보고 깊숙이 간직한 사랑스런 한 말씀을 하신다. “아이구! 잘 타네” 그 말씀 한마디로 신바람이 나는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때는 부모나 어른 앞에서 자녀를 칭찬하고 예뻐하면 팔불출이 되었다. 완고한 시대였지만 위계질서가 있고 요즘 흔해 빠진 사랑한다는 말보다 절제하는 마음 속에 사랑의 질량은 더 컸다.
지금은 칭찬 홍수에 살고 있는 것 같다. 요즘 아이들을 훈육하기 위해 매를 든다든지 말에 감정이 실렸다간 온천지 매스미디어에 순식간에 오르내린다. 지도자들이 훈육하기에 어려운 시대에 살고 있다.
운이 없으면 아동 학대죄로 고발이 된다. 이 시대 지도자들은 씁쓰레한 고심만 할 뿐이다. 백년대계를 짊어지고 나아갈 꿈나무에게 소신 있는 교육을 하는 선생님들을 찾아보기 힘든 시대다. 단지 먹고 살기 위한 직장인에 불과하다. 사회와 부모의 탓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