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담칼럼] 아이 한 명을 키우려면 온 마을이 필요하다

출생률저하...단지 “왜 낳지 않느냐?”의 문제 아냐 관점부터 달라져야, 정상의 기준은 생명 그 자체

2024-06-16     주경심
▲ 생명이 기준이어야 한다. ( 출처: pixabay )

결혼 7년 차에 이혼을 결심한 지연 씨는 아이들 때문에 망설이게 된다.

완벽한 엄마는 아닐지 라도 아이들에게만은 최선을 다하며 살아왔다. 하지만 얼굴만 봤다 하면 싸우는 엄마·아빠의 모습을 아이들에게 더 이상 보여주고 싶지 않고, 이렇게 사는 것 역시 자신이 원하던 삶은 아니기에 이혼을 결심했지만, 끝까지 망설이게 되는 이유는 역시 아이들이었다. 엄마·아빠의 선택을 아이들이 다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그럼에도 아이들이 받을 상처가 걱정된다고 했다.

사람들이 내 아이들을 이상한 시선으로 바라보지 않았으면 하는 것. 아이들이 행동 하나하나에서 이혼가정이라는 원인을 찾아내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아이들 스스로 무언가를 선택할 때 망설이는 이유가 부모의 이혼이 아니었으면 하는 바람 등.

결혼생활 35년 만에 이혼을 선택한 현정씨는 부모의 이혼이 아이들의 앞길을 방해할까 봐 꾹꾹 참아왔는데, 이제는 자식들도 다 결혼했고, 젊을 때는 혼자 산다고 하면 이혼당했다고 손가락질하거나 수군댈까 봐 망설였지만 더 이상 참을 이유가 없어져서 미련도 후회도 없이 이혼을 했다. 그리고 다시 태어나면 절대 결혼은 안 할 것이라고 혀를 내두른다.

여덟 살 아이를 키우는 미영 씨는 아이가 학교에서 문제를 일으킬 때마다 심장이 조여와 숨이 쉬어지지 않는다. 퇴근해서 돌아온 남편은 아이의 모든 것들을 아내에게 책임을 돌리며 화를 냈고, 그날은 반드시 부부싸움으로 이어졌으며 그것도 부족해서 주변 지인들에게도 자신을 탓하는 원망과 비난을 거침없이 쏟아냈다.

“남들처럼 맞벌이하는 것도 아니고 집에서 애 하나 키우는 게 뭐가 힘들다고 그것 하나 제대로 못 해? 그럴 거면 나가서 돈을 벌어와!!”

두 아이를 홀로 키우는 민재 씨 또한 이혼만 하면 배우자의 사치와 잔소리에서 벗어날 것 같아 원하는 대로 다 해주고 이혼했지만, 막상 두 아이를 혼자 양육하면서 직장생활까지 병행하려니 자신을 돌 볼 시간은 하루 중 단 한 시간도 없었다. 자신도 이혼 가정에서 자라서 아이들만큼은 행복한 가정에서 살게 해주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한 것도 미안하고, 어릴 적 자신이 부모에게 느꼈던 서운함과 원망을 대물림 해 주지 않으려고 애를 썼지만 아무리 애를 써도 혼자서 두 아이를 키우는 일은 절대 만만치 않았다.

돌봄도 알아보고, 방과후 서비스도 알아봤지만, 시간도 맞지 않고, 비용 역시 만만치 않았다. 그래서 가끔은 이럴 줄 알았으면 결혼도 출산도 좀 더 신중할 걸 후회하면서 아직 결혼하지 않은 후배들에게 자신도 모르게 결혼도, 출산도 말리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고 얘기했다.

▲ 출생률저하...단지 “왜 낳지 않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출처pixabay

부모도 이웃도 나를 돌봐주지 않았던 어린 시절의 기억이 있는 사람들은 내 아이들이 자신과 같은 삶을 살게 될까 봐 결혼과 출산을 꺼리게 된다.

이혼가정이라는 오명으로 인해 누군가는 이유 없이 불쌍한 아이 취급을 받았고, 누군가는 발달적 과정에서 경험하는 이벤트로 남들보다 더 크게 혼이 나기도 했다. 게다가 부모가 있는 정상 가정에서의 출생만을 인정해 주다 보니 많은 미혼 및 비혼주의는 임신을 포기하거나, 낙태를 선택하게 된다.

가임여성의 기준에 들지만 가정을 이루지 않은 상태에서의 임신은 비행, 또는 품행, 문란함으로 인식하는 데다가 혼자 출산해서 아이를 키우는 일은 절대 녹록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뿐인가? 입시 위주, 학습 위주로 경쟁을 부추기는 세상에서 살아 남아야하는 치열함과 함께, 본인은 살아남았음에도 여전히 자신감보다는 열등감을 경험해야하고, 만족보다는 상대적박탈감을 경험해오다 보니 내 인생의 연장선과 같은 내 아이를 통해 그 삶을 반복하고 싶지 않은 것도 또 하나의 이유가 된다.

보호 체계 차원에서 보자면 안전과 치안이 세계에서 가장 훌륭하다는 대한민국이지만 매일 뉴스에서 보는 흉악범죄 중 범죄 피해자 대부분은 여성이다. 하지만 범죄를 저지른 가해자에 대한 처벌은 솜방망이 수준이다.

출산에 가장 큰 역할을 하는 여성은 자신을 지켜야 하는 것뿐만 아니라, 약자인 자신보다 더 약한 아이를 낳아서 길러야 하고. 약자 편이 되어주지 않는 세상에 내보내야 하는 선택은 두렵고 무서울 수밖에 없다. 그래서 애초에 그런 선택 자체를 하지 않으려는 것이다.

출생 이후는 또 어떠한가? 아동학대로 고통을 겪는 아이들을 다시 그 보호자에게 돌려보내서 아이들이 목숨을 잃게 되는 경우가 생기고, 정상 가정이지만 가장 안전해야 할 가정 안에서 사랑하는 가족으로부터 가정폭력에 시달리는 사람들을 다시 그 가정으로 돌려보내서 배우자 또는 파트너로부터 끝내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데, 이런 문제들을 여전히 한 개인, 한 가정의 문제와 책임으로 돌려버리는 현실은 출생률을 떨어뜨리는 또 하나의 원인이 된다.

폭력을 경험하고, 상처 입은 마음을 누구도 알아주거나, 돌봐주거나, 이해해 주지 않은 기억들이 인간으로서 큰 기쁨중 하나인 결혼과 출산, 양육을 포기하게 만드는 것이다. 또한 정상이라는 틀을 만들어 사람들을 생각과 가치관을 가두고 다름을 이해하지 않으면서 무조건 출산만을 장려하는 정책은 반발심만을 부추길 뿐이다.

▲ 무조건 출산을 장려하면 반발심만 부추긴다. ⓒpixabay

여자는 출산을 위해 세상에 태어난 것이 아니라. 성별을 떠나 자아실현과 보람, 즐거움이라는 기본 욕구를 충족할 수 있어야 한다. 반드시 결혼해야 하고, 반드시 아이를 낳아야 하는 ‘당위성’은 이제 더 이상 정책으로서의 힘이 없다고 보인다.

여전히 높은 유리천장지수로 인해 같은 대학을 나와도 승진이 제한되고, 같은 시험을 봐도 합격률이 낮고, 같은 목소리를 내도 여자라서 그렇다는 비난을 듣지 않는 세상이 되어야 한다. ‘누가 낳느냐?’, ‘어떤 가정에서 태어났느냐?’, ‘부모는 키울 자격이 있느냐?’가 아니라 태어난 아이만을 온전한 인격체로, 보호 대상으로, 귀한 대상으로 바라봐야 할 것이다.

정자의 건강도를 측정해 주는 정책, 난관을 복원해 주는 정책, 여아를 1년 빨리 취학시키는 말도 안 되는 정책은 출산에 대한 여러 걱정과 두려움을 조금도 이해하지 못함을 스스로 인정해 버린 것이다.

‘아이 한 명을 키우기 위해서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인디언 속담처럼 낳는 데만 집중할 것이 아니라 키우는 모든 과정을 사회가, 이웃이 지지해 주고 격려해 주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