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이야포·두룩여...역사적 진실 살펴야 할 많은 이야기 남아
1950년 8월 3일 남면 안도 이야포·두룩여 미군폭격사건 피난민을 가득 실은 화물선 안도 도착...일반적이지 않아 노근리 사건처럼 진실규명과 희생자 명예회복 위기 처해
일제강점기 36년을 벗어난 광복의 기쁨은 좌우익이라는 정치적 이념논쟁의 소용돌이를 헤어나오지 못하고 커다란 희생으로 이어졌다.
남해안의 조그만 섬 안도의 경우도 예외가 될 수 없었다. 제주 4.3 진압을 위한 출동 명령을 거부한 14연대 군인들의 봉기로 봉기와 전혀 관련이 없던 안도까지 진압 작전을 펼쳤던 진압군 5연대 대대장 김종원의 만행에 1948년 11월 1일 11명의 안도 청년들이 희생되었다.
당시 남면 진압 작전에는 해방이 되자 친일행위로 얻은 어장을 잃은 남면 출신 친일인사가 개입하여 더 많은 희생이 있었다고 알려지기도 했다. 여순사건을 겪고 난 후 지역 민심은 극도로 흉흉해져 모두가 숨죽이며 살아가는 시절이었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또 한 번의 학살이 이어졌다. 여순사건과 관련하여 조금이라도 관계가 있는 사람은 가입하면 용서를 해준다는 이야기에 여순사건의 아픔을 겪은 지역민 중에는 ‘보도연맹’에 가입한 사람들이 많았다.
사실 여순사건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었지만, 해방 후 좌익정당에 가입한 경력이나 청년단 활동 등도 문제가 되었다. 합법적인 정당 활동이었지만 좌익정당의 기준도 권력자들이 마음먹은 대로 정하는 거라 어디에도 항의나 부당성을 주장할 수 없는 시절이었다.
이렇게 가입한 보도연맹원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이승만 정부는 이들을 잠재적인 적으로 간주하였다. 전국에 걸쳐 각 지역 경찰서나 지서로 모이게 한 뒤 학살을 감행하였다. 남면의 경우는 상부의 지시를 받은 경찰들이 ‘안도와 금오도의 초삼섬 사이 해상’ 에서 보도연맹원 학살을 감행했다. 삼산면에서는 삼부도의 작은섬 검등여에서, 여수시에서는 남해의 애기섬에서 총살 후 수장했다.
보도연맹원의 학살이 일어난 지 일주일이 채 지나기 전 안도에는 한국전쟁을 일으킨 인민군이 밀어닥쳤다. 1950년 7월 20일 경이었다. 당시 안도에는 영암과 함평군의 경찰이 안전지역이라 여기고 안도로 피난을 와 있었는데 인민군이 들어온다는 소식에 안도의 ‘상산’으로 피신한 상태였다. 인민군의 규모를 알 수 없었던 상황에서 불가피한 조처였을 것으로 여겨진다.
안도에 1차로 들어온 인민군은 남고지 부근에 천막을 치고 하루를 머물고 금오도로 돌아갔는데, 함께 안도로 들어온 부대원 중 인민군 여성이 안도에 남아있다 주민의 신고로 영암 경찰에 붙잡혔다. 여군은 주민이 지켜보는 가운데 살해되었고 시신은 안도마을 이사무소 부근에서 난도질 되었다.
주민들은 이 끔찍한 광경을 지켜봐야만 했다. 금오도로 갔던 인민군들이 다시 돌아와 이런 사실이 알려지자 신고한 주민을 찾아내어 똑같은 방법으로 보복 살상하였다. 주민을 모아놓고 자행되었던 처참한 상황을 두 번이나 지켜본 안도마을 사람들은 한동안 몸서리치는 공포가 느껴지는 마을 이사무소 앞을 지나지 못하는 트라우마에 시달렸다.
이야포에 피난민선이 도착한 것은 1950년 8월 2일 저녁이다. 1950년 7월 말경 부산에서 출발하여 통영과 욕지도를 거쳐 안도까지 오게 되었다. 당시 상황을 이야기하는 여러 기사에는 정부의 주선으로 다른 지역으로 옮겨 가라는 소개 명령을 받았다고 하지만 명확히 확인되지 않는 내용으로 보인다.
당시 여수 안도는 인민군 점령지로 정부가 소개 명령을 내릴 지역으로 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최근 필자가 입수한 자료 중 1950년 당시 상황을 알려주는 해군본부가 발행한 작전경과보고서는 인민군이 장악한 육지와 달리 여수 부근 남해안 해상은 미군의 작전지휘 아래 해상봉쇄 상태였음을 알려주고 있어 피난민을 가득 실은 화물선이 야음을 틈타 안도의 낯선 섬에 기착하였던 상황이 일반적이지 않았다는 사실을 짐작하게 해준다.
필자는 이야포 사건을 현재 생존한 이춘혁씨의 동생 이춘송씨로부터 1999년 처음 제보받았다. 제보 후에는 사건 내용을 확인하기 위해 안도와 금오도, 횡간도, 돌산도, 여자도, 고흥 원주도 등 피해지역을 돌아다니면서 조사하였고 조사내용은 여수지역사회연구소 이름으로 언론에 보도자료를 냈다.
그래서 1999년 11월 22일 호남신문을 비롯해 지역 언론과 세계일보 등에 이야포 사건은 처음으로 세상에 알려졌던 것이다. 당시 피난민들이 화물선을 타게 되었던 상황은 이들이 화물선을 구해서 부산보다 안전한 제주도로 피난하려고 했다는 내용을 이춘송씨가 이야기를 했던 것으로 필자는 기억한다. 당시 피해자의 한 사람이었던 재미교포 윤학재씨는 아리랑 그림자라는 수필집을 내면서 ‘배는 부산진을 출발하여 거제도 피난민 수용소로 가는 것이다'라고 기록하고 있어 사건에 대한 기억이 사람마다 조금씩 다르게 기억되고 있다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
그리고 최근 여수MBC가 미국국립문서보관청(NARA)을 방문하여 찾아낸 미 공군의 임무보고서는 8월 3일과 8월 9일 안도의 이야포와 두룩여 일대의 조기잡이 어부들을 포격한 사실을 생생하게 확인하고 있다.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는 2010년 여수시 남면 안도리 미군폭격사건을 ‘1950년 8월 3일 여수시 남면 안도리 인근 해상에서 피난민 배에 타고 있던 민간인들이 미군의 폭격으로 희생되었고, 1950년 8월 9일 여수시 남면 두룩여해상에서 고기잡이를 하던 주민들이 미군의 폭격으로 희생되었다’라고 진실규명 결정을 하였다.
그렇지만 ‘가해 폭격기는 미군소속 전폭기로 추정되나, 사건과 관련된 직접적인 폭격기록이나 관련 문서의 부족으로 가해자를 특정할 수 없었다’라고 하면서 희생자와 유족들을 울리고 있다.
여수MBC의 발굴자료는 진실화해위원회에서 부족하다고 하는 미비한 요건을 충족하는 자료라 할 수 있다. 이와 함께 희생자 발생 원인으로는 ‘미군과 한국 군경이 인민군의 공세에 밀려 급하게 퇴각한 후 이 지역 전체를 적진으로 간주하여 무차별적인 폭격했기 때문으로 규정하였으나 미군의 공중 폭격 시 적절한 민간인 보호조치, 민간인과 인민군을 구별하려는 노력 등 관련 국제법 규정을 수행하지 않았던 것으로 판단된다.’ 라고 하여 책임 소재를 분명히 하고 있으나, 온 세상이 떠들썩하도록 시끄럽게만 하고 더 이상 진전 없이 멈춰있는 노근리 사건처럼 진실규명과 희생자의 명예회복은 이루어지지 못할 위기에 처해있다.
다행스러운 일은 여수지역에서 2018년 첫 추모제를 시작으로 그동안 여수시와 여수시의회, 이야포 · 두룩여사건 민간인위령사업추진위원회가 구성되어 사건을 상기시키며 정부에 사건 해결을 촉구하고 있고, 미군의 공식적인 사과를 요구하고 있다.
여수시 남면 안도에서 74년전 일어났던 미군폭격사건은 이제야 조금씩 국민들에게 알려지며 전쟁의 참상에 대한 교훈을 알려주고 있으나 아직 사건의 전모와 피해규모가 밝혀지지 않았다. 사건 해결을 위한 대책도 매년 8월이 되면 연례행사와 같이 진행되는 점이 없지 않아 상시적인 관심과 종합적인 대책이 마련되어 좀 더 정교하게 계획적으로 추진되었으면 좋겠다.
피난민 수송선과 조기잡이 어부들에게 왜 포격을 가했는지, 생존 유족들은 얼마나 살아남았는지, 향후 희생자에 대한 진실규명과 명예회복에 대한 대책은 무엇이며 재발 방지를 위한 계획과 희생자를 추모하고 위로하는 계획은 어떻게 진행될 것인지.
안도 미군폭격사건과 남면 두룩여 조기잡이 미군 폭격사건에는 아직 진상을 정확히 규명하고 피해자를 확인하여 역사적 진실을 살펴야 할 많은 이야기가 남아있다.
- 박종길 소장 (여수지역사회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