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머스마는 지금 어디서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까?

60년 전 짝꿍을 좋아했던 소녀의 썸 고백기

2024-09-16     장수연
▲붕어빵으로 점심 끼니를 대신하는 어르신. ⓒ조찬현 (자료사진)

“난 눈물이 메마른 줄 알았어요. 여태 사랑을 다시 못할 줄 알았어요. 
오늘 난 자욱한 연기 사이로 사랑의 짝을 보았어요~”

윗 문장은 유행가 <이젠 사랑할 수 있어요> 가사 일부분이다.

손주까지 본 나한테는 사랑의 감정이 남아있는 게 없다고 생각했는데 웬걸 우연한 기회에 옛 사랑의 감정이 되살아났다. 늙은 나이에 웬 청승이냐고? 살아보니 이게 바로 인생이다.  

 
내가 태어나 자란 고향은 무진장 시골이다. 고향에 가려면 십리길 산봉우리 세 개를 넘어야 한다. 오르내림이 심한 고갯길을 내려와서 울퉁불퉁한 자갈길을 따라가다 보면 넓은 하천엔 항상 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물의 깊이가 깊어서 이리저리 피해 징검다리를 건너야 한다. 비가 와 움푹 팬 길에 차라도 한 대 지나가면 흙탕물 벼락을 맞아 몸 전체가 노란물이 들기도 했다. 그때는 아스팔트 길이 없었다. 

요즘 같으면 운전자한테 잘못한다고 욕지거리하고 하겠지만 그때는 모두가 착해 빠져 피하지 못한 자기 잘못으로 돌리곤 했다. 새 신발 버린 것만 속상할 뿐이었다. 

그때는 부러운 것도 많았고 먹고 싶은 것도 많았다. 하지만 남을 흉보고 질투하고 모략하는 학생은 한 명도 없었다. 정직한 농사꾼의 자녀가 많았기 때문이리라 생각된다. 

새 신발 새옷 책가방 필통 목수건 색연필을 지참하고, 등하교할 때 껌이나 사탕을 사먹는 아이들은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그때 짝꿍은 시계도 찼다. 전교생 중 한 명이었다. 정말 부러웠다. 하루만 차고 내일 갖다줄게 하다가 “웃기고 있네!” 라는 말만 돌아왔다. 

그런 시절이 있었기에 물자 흔한 요즘에 옛 기억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요즘 아이들은 훗날 어떤 추억이 남을까 이 넘치는 시대에 무엇이 갖고 싶을까? 입만 벌리면 다 사주는데. 

몽당연필에 볼펜 부러진 것 끼워 마르고 닳도록 침 묻혀 가면서 쓰던 기억, 내려 물려받은 너덜너덜한 교과서와 전과 수련장. 그때는 헌책방이 문전성시를 이루었고, 한푼이라도 싸게 살려고 책방 주인과 다투는 것이 일상이었다.

한집에 형제들이 6~7명씩 되니 새것을 사줄 수가 없었다. 모든 것을 내려받아 사용한다. 그때는 형제애가 두터웠고 모두가 효자였다. 부모와 선생님 말씀에 무조건 복종했다. 선생님은 똥도 안 누고 사시는 줄 알았다. 그림자도 피해 다니고 함부로 가까이할 수 없을 만큼 고결하고 거룩하신 분이셨다. 때로는 무서운 분이시기도 했다. 

선생님이 내주는 숙제나 시험을 못 보면 매를 맞았다. 틀린 수만큼 맞기도 하고 지각을 해도 맞았고 청소를 깨끗이 안 해도 맞았다. 선생님한테 매 안 맞으려고 모든 것을 열심히 했다. 

그때는 한 반에 70명이었다. 이름을 다 외울 수가 없었다. 선생님이 이름 한번 불러주면 너무 좋아했다. 나의 이름을 기억하다니 정말 감격한다. 그때도 선생님이 좋아해주는 학생도 있었다. 모든 것을 잘하고 눈치 빠른 학생을 좋아하셨다. 지금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지만, 지금 아이들은 선생님을 평가한다. 양에 차지 않으면 집에 가서 모두 일러바친다. 

그때 우리는 일러바친다는 단어조차 없었던 것 같다. 지금은 어떤가? 귀한 자식일수록 선생님을 존경하게 가르쳐야 하는데 못된 엄마들은 한 수 더 뜬다. 사회적인 지위가 높은 배경의 엄마들은 건방을 뜬다. 그런 분위기에서 자란 아이가 성장하면 이사회에 끼칠 영향을 생각 해보자. 

이와 비슷한 사례가 내 옆에 있었다. 잊히지 않는 못된 녀석이었다. 

내 짝꿍이었고. 교장 아들이었다. 요것이 맨 날 나를 괴롭혔다. 지금 같으면 학폭이었다. 한 책상에 2명씩 앉은 시대인데 늘 책상 복판에 줄을 그어 “여기 넘어오면 니는 패직인다!” 라고 했다. 그래도 교장 아들인데 내가 잘 보여야지 하고 조심하다가 실수로 지우개가 넘어가 버렸다. 일어나더니 발로 차고 쥐어박았다. 멍까지 들었다. 

선생님이 이 광경을 봤는데도 “니가 참아라!”는 말만 하고 주의를 주지 않는다. 그때 어린 마음에 마음이 너무나 많이 상했다. “이 새끼 두고 보자!” 그때부터 와신상담했다.

선생님이 짝꿍을 바꾸어 주고 나를 달랬으면 마음이 풀렸을 텐데 그때는 너무 억울하고 괘씸해 학교 가기 싫었다. 부모한테 그 말 했다가는 “교장 아들인데 니가 참아야지!” 라는 뻔한 말은 듣기 싫었다. 그리고 감히 교장 아들을 나무랄 능력도 없는 촌사람 이기도 하지만. 그때부터 나는 내 편이 없다는 걸 확실히 알았다. 마음속으로 굳게 다짐하고 공부를 열심히 했다. 

“그래 이새끼야 너한테 복수하는 길은 너와 비교가 안 되게 공부를 잘하는 길밖에 없다”

어린 마음에 칼을 갈았다. 어느 날 어린 나이에도 오기가 발동했던 것 같았다. 그 칼 덕분에 진짜 100점만 맞았다. 어느 날 짝꿍이 묻고 내가 답했다.  

“야! 너 우째서 그리 잘하노?” 
“니 덕분이다. 이 자슥아”
“우리 아부지한테 공부 못 한다고 혼났어”

하면서 이제 시험볼 때 좀 보여 줘 하길래 “그 조그마한 지우개가 그쪽으로 넘어갔다고 발로 차는 너한테 시험지를 보여줄 수 있겠나? 앞으로 너하고는 말도 안할 것이고 보여주지도 않을 것이다”라고 대답했지만 은근히 좋았다. 

그 다음 시험 볼 때마다 보여줬다. 교장 아들이고 잘 생기고 책도 많고 그때는 수련장 새 전과 하나도 부모한테 사달라 못 했는데 이 자슥이 책 사면 내가 공부하고 자신이 한 것처럼 답을 달아주고 그랬더니 학년이 바뀌었을 때도 자기 아버지 빽으로 내 옆에 앉았다. 

그 이후는 친해졌는데 또 어린 나이인데도 남녀칠세 부동석이 안 되면 소문이 나게 되어 있다. 짝꿍끼리 친하다고 입을 나불거리는 아이들이 있었는데, 그 소문이 싫지는 않았다. 교장 아들이니까.

지금은 어느 하늘 밑에서 나처럼 늙어가고 있는지 궁금하다. 백년지대계의 주역이 되어 있는지, 경처가가 되어 있는지 만날 수 있으면 한번 보고 싶다. 그때 하는 짓으로 봐서 잘 될 리가 만무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