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식 건물이 무슨 연유로 '국가등록문화유산'이 됐을까?

詩를 품어 온 세상에 빛을 전한 광양 '정병욱 가옥'

2024-10-13     영은
▲국가등록문화재 제341호 정병욱 가옥 ⓒ영은

광양 光陽!  눈부시게 빛나는 햇살의 땅 광양, 망덕포구에 詩를 품어 빛을 전한 가옥이 있다. 국가등록문화재 제341호 정병욱 가옥이다.

이 건물은 정병욱의 부친 정남섭이 1925년에 지은 점포형 주택으로 양조장과 주택을 겸한 일본식 건물이다. 현재 보기 드문 주상복합 건축물이다. 국문학자 정병욱 선생이 이곳에서 판소리와 한글을 연구했던 장소로도 알려져 있다.

밖에서 보기에는 별로 특별할 것도 없는 빨간색 지붕을 가진 일본식 건물이 무슨 연유로 국가등록문화유산이 됐을까?

민족․저항시인, 윤동주 시인은 우리 민족이 매우 사랑하는 시인이다. 정병욱 가옥은 시인의 자필 원고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명주보자기에 겹겹이 싸서 툇마루 밑, 항아리에 숨겨서 보존하여 세상에 부활시킨 공간으로 문학사적인 의미가 매우 크다.

▲ ‘툇마루 밑, 항아리 안에 윤동주 시인 자필 원고 보관 ⓒ영은

현재 전시관으로 사용하고 있는 정병욱 가옥에 들어서면 그의 어머니가 ‘툇마루 밑, 항아리 안에 윤동주 시인 자필 원고를 보관했던 모습’을 재현해 놓고 있다.  

문화해설사 말에 따르면 “지금 재현해 놓은 원고는 사본이다. 자필시집 원고 원본을 비롯한 유품들은 연세대학교 윤동주 기념관에 보관중이다. 기념관은 두 분이 함께 기거했던 전 연희전문학교 기숙사 자리에 있다. 정병욱 선생은 한국출판문화상 상금 전액을 쾌척하여 연세대학교에 윤동주 시비 건립 등 기념사업에도 물심양면으로 도왔다.”  

만약 시인의 유고가 보존되지 못했다면 우리 민족 세대를 초월하여 애송되는 윤동주 시인의 ‘서시, 별 헤는 밤’ 등을 비롯한 이 시집에 실린 시들의 존재를 과연 알 수 있었을까?

사람은 일생동안 수 없이 많은 인연을 맺으며 살아간다.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인생이 달라지기도 한다. 그 중에는 보석처럼 빛나는 아름다운 인연도 있고,  바람처럼 스치며 지나가버린 인연도 있다.  

간도 출신 윤동주 시인의 유고가 어떻게 광양, 섬진강 끝자락과 남해바다가 시작되는 망덕포구에 보존됐을까?

국문학자 백영(白影) 정병욱 선생(1922-1982)은 윤동주 시인(1917-1945)보다 나이로는 5살 아래, 연희전문학교 2년 후배다.

정병욱 선생은 1940년 4월 연희전문학교에 입학했다. 그 당시 3학년이던 윤동주 시인이 조선일보 학생 기고란에 실린 1학년 정병욱의 수필 ‘뻐꾸기 전설’을 읽고 감동해서 학교 기숙사로  찾아온 것이 인연의 시작이다. 

두 사람은 기숙사와 하숙집에서 함께 생활하며, 2년 가까이 문학청년으로 동행하였다. 시 ‘별 헤는 밤’은 윤동주 시인이 부탁하여 정병욱 선생이 읽어 본 후 “다 좋은데 조금 허한대요?” 라고 평가했다. 시인은 퇴고를 거쳐 마지막 연을 덧 붙였다고 한다.

 ⟨별 헤는 밤 마지막 연⟩
그러나 겨울이 지나고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 
~중   략~
자랑처럼 풀이 무성 할게외다.

윤동주 시인은 졸업 즈음 시집을 출간하려 했으나, 일제 말기 엄혹한 시기에 제자를 걱정하는 은사님의 만류로 한글 시집 출판을 포기하게 됐다. 시인은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자필 시집 3권을 손수 작성해서 그중 1권은 자신이 갖고, 나머지 2권은 은사인 이양하 교수와 정병욱 선생에게 각각 증정했다.   

1944년 1월 정병욱 선생은 학병에 끌려가게 되자 광양에 계신 어머니에게 윤동주 시인 유고 보존을 부탁하며 유언처럼 이런 말을 남기고 떠났다. “어머니, 동주나 내가 다 죽고 돌아오지 않더라도 조국이 독립되거든 이것을 연희전문학교로 보내어 세상에 알리도록 해 주세요”
 
일본으로 유학 간 윤동주 시인은 독립운동혐의로 후쿠오카형무소에서 복역하던 중 해방을 불과 6개월 앞두고 1945년 2월 16일, 29살 젊은 나이에 순절하게 된다. 시인의 친구, 고종사촌 송몽규도 3월 7일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사망했다.
 
송몽규는 “형무소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주사를 정기적으로 맞았다”고 말했다 하니 이는 ‘일제의 생체실험의 일환이었다는 의혹’이 짙다고 한다. 

▲詩를 품어 온 세상에 빛을 전한 광양 '정병욱 가옥' ⓒ영은

정병욱 선생은 광복이후 일본 징병에서 구사일생으로 귀환했다. 선생은 윤동주 시인의 연희전문 동기 강처중, 시인의 동생 윤일주 등과 함께 유고 31편을 묶어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초판을 1948년(정음사) 발간하였다. 

문화해설사는 힘주어 말했다. “해방 후 유고 3권 중 윤동주 시인 본인이 갖고 있던 것과 교수님께 드렸던 것 모두 행방을 찾을 수 없었다. 윤동주가 시를 썼지만 윤동주를 시인으로 만든 것은 정병욱과 그 가족이다. 

윤동주(尹東柱) 시인은 동시를 쓸 때는 필명을 동주(童柱)로 사용했다. 윤동주 시인이 순절하고, 10년 후 시인의 동생 윤일주는 정병욱 선생의 여동생 정덕희와 결혼했다. 윤동주 시인과 정병욱 선생은 사돈지간이다.“ 

두 사람의 인연은 친구에서 사돈으로 연결되어 후대까지 이어지고 있다.

국문 ․ 민속학자, 수필가 백영(白影) 정병욱 선생은 연세대와 부산대를 거쳐 서울대 교수로 27년간 재직하고 박물관장을 역임하였다. 고전시가를 비롯해 문학연구의 초석을 다졌으며, 판소리 연구와 대중화에 힘쓰는 등 전통문화예술분야에서 커다란 업적을 남긴 분이다. 

한글과 국문학에 대한 공로로 한국출판문화상, 외솔상과 3.1문화상을 수상했으며, 사후 1991년 은관문화훈장이 추서됐다. 

“동주의 노래 소리는 전국의 방방곡곡에 메아리치지 않는 곳이 없게 되었으니 동주는 죽지 않았다고 할 것이다.(...)
내가 평생 해낸 일 가운데 가장 보람 있고 자랑스런 일이 무엇이냐고 묻는 이가 있다면, 나는 서슴치 않고 동주의 시를 간직했다가 세상에 알려 줄 수 있게 한 일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정병욱 수필, ⟨잊지 못할 윤동주의 일들⟩중에서

정병욱 선생은 자신의 아호 백영(白影)까지도 윤동주의 시 ‘흰 그림자’에서 가져 와서, 평생 윤동주 시인을 세상에 알리고 기억하며 죽는 날까지 함께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