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포. 두룩여 74주년 특집] 트롤리 딜레마란 이런 것이다
④ 아, 안도 빨갱이 무덤
빨갱이 무덤 남면 안도를 말하기 전에 노벨문학상 이야기부터 먼저 해야겠다. 소설 ‘여수의 사랑’을 쓴 소설가 한강이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1908년 이인직이 신소설 ‘혈의 누’를 발표한 후 엄청난 국가 경사가 아닐 수 없다. 수상을 선정한 스웨덴 한림원은 한강의 작품이 역사적 트라우마에 직면하고 인간 삶의 연약함을 드러내는 강렬한 시적 산문이라고 설명했다.
이 땅에서 일어난 국가폭력에 의한 비극적 역사인 제주 4.3과 80년 광주 트라우마를 여성의 섬세한 감각으로 어루만졌다는 것이다. 지금껏 비극적 역사를 다루는 소설 방식인 서사성을 해체하고 시적 감수성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런데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에 적잖이 당황하는 부류가 있다. 국가폭력이 드러나는 것이 달갑지 않은 극우 보수다. 문단에서도 극우 보수가 있다. 소설가 김규나는 한강 노벨문학상 수상에 대해 “대한민국 탄생과 존립을 부정하기 때문에 국민이 분노할 일이다”이라며 비분강개한다. 인간에 대한 연민과 공동체 의식보다 국가 전체주의에 바탕을 둔 극우 보수의 광기다.
소설가 김규나는 또 이렇게 말한다.
”두 사건 모두 진압 과정에서 안타까운 희생이 있었지만 애초에 반란이 없었다면 그 눈물 역시 없었을 것"이라며 "중요한 건 무엇이 먼저인가다. 진압에 성공하지 못했다면 오늘의 자유 대한민국도 없었다."고 적었다.
근거 없이 짐작이나 생각에 의한 억지 주장 억견(臆見)에 불과하나 이 땅 극우의 논리를 그대로 압축하여 대변하고 있다. 소설가 김규나 주장을 다시 풀어 말하자면 요컨대 이런 것이다.
자유 대한민국은 1948년 8월15일 건국되었고 건국의 아버지는 초대 대통령 이승만이라는 것이다. 이를 부정하는 제주 4.3은 빨갱이 남로당 책동으로 일어난 반란이고, 1980년 5월 광주 폭동은 남파 고정간첩 선동에 의한 것이다. 이를 경찰과 국군이 진압에 성공하였기에 오늘 자유 대한민국이 존속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진압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발생한 민간인 희생은 먼저 반란과 폭동이 일어나서 희생자가 발생한 안타까운 일이라는 것이다. 반란이 없었다면 안타까운 민간인 희생도 없었다는 것이다. 소설가 김규나는 민간인 희생자가 발생한 것은 빨갱이 반란과 폭동 때문이라는 레토릭(rhetoric 수사학)을 구사한다. 이런 레토릭으로 논리를 펼치는 사람들이 보수라는 참칭으로 엄연히 세력을 이루고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그래서 극우 소설가 김규나가 억견을 주장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에 대해 국회 문체부 감사에서도 질의응답이 있어 보수들이 말하는 ‘희생자’ 레토릭에 대해 생각해 봐야겠다.
극우 보수들이 구사하는 ‘희생자’ 레토릭이 문제인 것은, 그들이 역사를 해석하기 위한 특정한 시대나 문화에서 지식을 구성하고 이해하는 인식 체계 없이, 심정적 차원에서 자신의 주장을 내 세우기 때문만은 아니다. 또 문제는 극우 보수 세력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극우 보수의 희생자 레토릭에 포섭된 여순 10.19 추념식이나 글 등에서도 문제다. 친일 친미 극우 보수 세력들이 자기 존재 합리화로 구사하는 ‘희생’ 논리를 비판 없이 준용하는 것이 문제라는 것이다. 그래서 예를 들어야겠다.
1945년 3월 21일이었다. 영국 전폭기들이 덴마크 코펜하겐 시내 건물을 폭격했다. 건물 이름은 ‘셀후스’이었다. 셀후스 건물은 점령군 독일 나치 게쉬타포 본부이었다. 수많은 덴마크 저항군과 시민을 잡아다 고문을 하는 건물이었다. 그래서 덴마크 레지스탕스는 영국 공군에 폭격 요청을 하였다.
셀후스 건물 폭격작전명은 ‘카르다고 작전 Operation Carthage’이라고 한다. 영국 공군 폭격 작전을 눈치챈 나치는 셀후스 건물 꼭대기 층에 잡아 온 덴마크 저항군을 가두어 놓고 인간 방패로 삼았다. 이 사실은 인간 방패가 된 저항군 포로나 폭격 요청한 덴마크 레지스탕스나 알고 있었다. 여기에서 다수의 이익을 위해 소수를 희생하는 것이 낫는가를 묻는 ‘트롤리 딜레마 Trolley dilemma’에 봉착한다.
트롤리 딜레마란 이런 것이다. 기차가 달리는 중에 기관사가 선로에 사람 다섯 명을 발견했다. 기관사 주어진 임무대로 정해진 선로를 달리면 다섯 명 목숨이 사라진다. 기관사가 다른 선로로 바꾸면 바뀐 선로에는 사람 한 명이 있다. 선로를 바꾸는 스위치 장치는 기관사 손에 쥐어져 있다. 어느 쪽을 선택하는 것이 나은 것인가.
전쟁과 같이 고도로 예측 불가능한 상황에서 트롤리 딜레마와 유사한 선택을 강요받는 상황이 자주 펼쳐지는 것은 쉽게 예상할 수 있다. 이럴 때 문제해결은 의외로 간단하다. 대의를 위해 선로에 있는 다섯 명이 자신을 재물로 기꺼이 희생하는 것이다.
그래서 국가를 위해 자발적 희생을 고양하는 군가 중에는 ‘이 몸이 죽어서 나라가 선다면 기꺼이 죽으리라’ 하는 가사도 있다. 나치 인간 방패가 된 레지스탕스 포로들도 마찬가지였다. 카르타고 작전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 ‘폭격’에서는 셀후스 건물 꼭대기 층에 가두어진 덴마크 저항군들은 “우리는 조국을 위해 희생되는 거야” 이렇게 말한다. 나치를 물리치고 조국 덴마크를 위해 자신들이 희생되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