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괜찮아 앨리스' 관람하고 70넘은 할머니는 혼란스럽다
기성세대의 교육관을 반성하게 하는 영화 ‘과연 이 길이 맞을까?’ 하는 물음표를 던지는 영화
70넘은 할머니는 혼란스럽다. 3대가 모여 한집에 살던 삶이 세대별로 다른 세상의 삶이 된 것 같다. 기성세대는 ‘둘만 낳아 잘 기르자!’란 구호 아래 아기를 적게 낳으려고 애썼다. 그래도 3~4명은 낳았다.
그런데 지금은 자녀를 갖지 않던지 한 명 정도로 만족한다. 두 명 이상을 데리고 다니면 이상한 모습으로 본다. 현시대에 맞지 않은 사람으로 쳐다본다. 자녀가 곧바로 돈으로 계산되기 때문이다. 대학 등록금까지 1억원 이상 들어간다고 한다. 한 사람을 잘 만들어 사회에 내놓으려면 투자를 많이 해야 한다. 그래서 결혼을 머뭇거린다.
그러다 보니 결혼은 필수가 아닌 선택이 되었으며 자녀도 선택적으로 갖게 된다. 예전에는 결혼 안 하면 집안 망신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비혼이 전혀 이상하지도 않다. 경제력이 뒷받침되어야 한다는 계산을 한다. 교육비와 주거를 떠올리면 자신이 없게 되고 아이를 갖는것은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부모와 자녀 세대의 생각을 바꾸게 하는 영화
영화 <괜찮아 앨리스!>는 부모와 자녀 세대의 생각을 바꾸게 하는 영화이기도 하다. 이제 발상의 전환을 하고 사회가 나서야 한다. 인구 절벽과 주거생활에 영향을 줄 수 있는 다큐멘터리이기도 하다. 천방지축인 아이들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교육비와 주거를 한꺼번에 해결할 수 있는 비전을 주는 영화이기도 했다.
학교가 재미없는 학생들이 ‘모든 것이 부족해도 괜찮다!’고 하는 학교에 입학해 학교생활을 재미있어 한다. 탈학교의 아이들은 학교에서 헤메고 있는 친구들을 안타까워 하기도 한다. 모든 것을 제로에서 새판을 짜는 과정을 너무 좋아한다. 무엇을 짜던 관계가 없다. 창의력이 쑥쑥 올라올 것 같다. 찌들었던 표정은 사라지고 무엇을 하던 자유다. 부담을 전혀 주지 않은 학교니까 표정이 밝을 수밖에 없다.
여태 경쟁의 도가니에서 탈출한 아이들은 서로가 행복하다. 시기 질투를 안 해도 된다. 굳이 돈을 써가면서 불행을 초래할 이유는 없다. 방과 후 수업을 많이 한다고 해서 성공하라는 보장도 없다. 이미 자유가 성공이 된 아이들이다.
가장 빨리 바뀌어야 할 사람은 부모다
이제 세상이 급속도로 바뀌고 있다. 세대가 다른 부모와 갈등이 생길 수밖에 없다. 가장 빨리 바뀌어야 할 사람이 부모이다. 이 영화를 자녀와 같이 보면 동상이몽인 부분도 있겠지만, 부모들은 자녀들과 다시 의논할 수 있는 장을 마련할 수 있다.
‘1년을 쉬어가는 인생학교’는 ‘과연 이 길이 맞을까?’ 하는 물음표를 던지는 영화다. 어느 길로 가도 괜찮다고, 무엇을 위해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달리기만 했는데, 이런 길도 만들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는 의견에 공감하는 어른들이 많다.
영화 <괜찮아 엘리스!>는 달리지 않아도 되는데, 멈춰도 되는데, 다른 길로 가도 되는데, 다른 경기장에 한 번 올라가 보는 것도 괜찮은 데, 라는 메시지를 던져 줬다.
<괜찮아 엘리스!> 영화가 주는 의미가 이렇게 깊고 넓고 따뜻한 말인지를 새삼 되돌아보는 어른들이 많이 나올수록 미래 세대에게는 희망적인 세상으로 바뀌지 않을까?
불과 몇 십년 전만 해도 이런 엘리스의 여행을 상상 해볼 수가 없었다. 가난한 시대였다. 국민소득 향상의 역군인 부모들은 돈 벌기와 의식주 해결에만 급급했다. 교육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전등도 없던 시대였고 호롱불도 아끼던 시대였다. 할머니 세대에는 공부하라는 말보다 호롱불 기름이 닳아진다고 “불끄고 자거라!” 라는 말을 더 많이 들었다. ‘불꺼!’라고 할까 봐 심지를 가위로 잘라 작게 만들고, 불빛이 새어 나갈까 봐 창에 수건을 가리고 공부했다.
학교 놀이터라 해봐야 진흙으로 상상하는 것 만들고, 하교 도중에 냇물에 발담궈 물장난치는 게 일상이었다. 한창 성장할 때라 돌아서면 배가 고파도, 군것질할 돈이 없으니, 길가 밭에서 수확하고 남은 배추 뿌리를 캐 이빨로 쓱쓱 껍데기 벗겨 나누어 먹었다. 집에 오면 부모를 도와 동네 하나밖에 없는 공동 우물에 물 뜨러 다니고, 산에 소 풀 뜯으러 다니다 해가 기울어서야 집에 돌아왔다.
동네 골목에서 자치기, 고무 줄 놀이, 구슬 따먹기, 고작 그런 놀이를 해도 너무 재미있고 즐거웠다. 간식이라곤 농사지어 묻어둔 고구마와 무우, 손님 오면 대접하려고 단지 안에 숨겨 둔 홍시감 하나 꺼내 먹다가 혼이 나도 불만이 없었다. 배불리 못 먹었으니 영양실조로 얼굴과 머리에 마른버짐을 달고 살았다.
부모는 종일 들일하고 공장일로 근근이 살아오던 시대에 공부가 하고 싶어 도시로 가출을 하기도 했다. 머슴살이, 식모살이로 야간학교에 다니며 먹고 입고 싶은 것 아껴 부모한테 보내주는 것이 당연한 자식 도리인 줄 알았다. 그렇게 자란 세대들은 위계질서와 예의바른 행동으로 지금 이 사회의 주도권을 잡고 살고 있다.
고생과 아쉬운 것이 없이 자란 아이들은 간절히 해보고 싶은 욕망이 있을까? 경쟁 사회에만 내몰린 아이들은 부모의 과잉보호 속에서 아무 생각없이 숨도 크게 못 쉬고 시킨대로 하고 있다. 부모의 등쌀에 재미없고 가기 싫은 학원에 가니, 항상 불만스러움이 가득하다.
‘어떤 인생을 살 것인가?’를 질문하는 영화다
영화는 ‘멈춰서도 괜찮다’고, ‘속도가 아닌 방향’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 영화는 ‘어떤 인생을 살 것인가?’를 질문하는 영화다. 단순히 학교를 소개하거나 교육 현실을 반추하는 데 그치지 않고, 쉼없이 달려온 우리 모두에게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지 생각해보게 한다. 어떤 삶을 살아야 할지에 대한 깊은 성찰의 결과이자, 한국 사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는 중요한 메시지다.
왜 우리는 ‘있는 그대로의 나’를 사랑하지 못하고, 남들의 기준에 맞춰 자신을 평가해왔을까? <괜찮아, 앨리스!>를 통해 마음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미래가 아닌 지금 당장 행복하고 싶다고 외치는 청소년들에게, 내 안의 엘리스를 찾아보도록 하는 게 제작 의도인 것 같다.
오연호 꿈틀리 학교 설립자는 “자기 주도성, 있는 그대로의 나를 사랑하는 것, 옆 사람과 협력하는 것, 그래서 최종적으로는 인생이 살 만하다고 느끼는 것, 이 네 가지를 소중하게 여기고 실천하려고 하는 꿈틀리 인생학교를 여러분의 가슴 속에, 여러분의 가정과 직장에, 세우는 것이 꿈”이라며 영화가 끝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