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담칼럼] 유연성이 필요한 이유
유연함은 단지 부드러움일까? 유연함이 관계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가?
결혼 4년차, 이제 막 돌을 맞은 아이의 부모인 지원씨와 대진씨는 아주 사소한 이유로 시작뙨 말싸움이 약간의 몸싸움까지 이어지고 말았다. 시작은 ‘대화’였다. 아니 주제는 대화였지만 대화는 시작도 못한 채 사단이 나버린 것이다.
일주일에 3일을 술을 마시고 들어오는 남편으로 인해 육아도 살림도 오롯이 혼자서 해야하는 지원씨는 지칠대로 지친 상태였고, 남편에게 술과 육아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을 뿐이다. 하지만 지원씨가 이야기를 시작하자마자 남편은 핸드폰을 열었고, 대화와는 상관 없는 영상을 보면서 대답을 회피하는 듯 보였다. 그 모습에 이제까지 꾹꾹 참았던 감정이 터지면서 원초적인 원망과 함께 넘지말아야 할 감정선까지 넘어버렸다.
"너 같은 남자랑 결혼하는게 아니었어, 무책임하고, 이기적이고, 넌 결혼할 자격도 아빠자격도 없어. 이혼해”
그 말에 남편 역시 그 동안 참았던 감정을 터트리며
“그래 나도 이젠 지겹다. 이혼하자 이혼해!”
자신을 달래주기는커녕,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이혼을 언급하는 남편을 더 이상 마주할 자신이 없었던 지원씨는 그 길로 자고 있는 아이를 들춰업고 집을 나와버렸다.
대진씨의 입장은 이러했다.
언제나처럼 대화를 하자는 아내의 제안에 벌써부터 숨이 막힐 것 같아서 일부러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며 아내의 이야기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사실 대화라고 하지만 아내는 항상 자신에 대한 원망, 다른 집 남편들과 비교, 경제력과 시부모에 대한 불평과 불만을 털어놓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듣기 좋은 콧 노래도 한 두 번’이라고 매번 자신에 대한 서운함과 원망을 늘어 놓는 아내에게 더 이상 해 줄 말도, 위로 할 단어도 찾을 자신이 없었다. 그저 아내의 화가 풀릴때까지 들어주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자신의 속마음도 모른채 단지 핸드폰을 열었다는 이유만으로 결혼자격, 아빠자격을 운운하는 아내에게 화가 나서 하지 말아야할 말을 해버린 것이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이미 뱉어버린 말인데, 게다가 실수라고 해도 화가 날대로 난 아내가 자신의 사과를 받아줄것같지도 않아서 아이를 들춰업고 집을 나서는 아내를 잡을수가 없었다.
그래서 서운했노라고, 그래서 화가 났노라고 제발 자신의 입장과 마음을 더 많이, 더 먼저 알아달라고 호소하는 두 사람을 보면서 문득 유연성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두 사람은 사건만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두 사람의 진짜 문제는 ‘패턴’이 바뀌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그 패턴은 내가 살아온 방식과 경험이 빚어 낸 결과이기도 하다.
"또 투정부리겠지"
"또 내 탓을 하겠지"
"어차피 무슨 대답을 해도 안 달라지겠지"
그래서 대화에 집중하지 못하고, 나름의 이유와 변명을 찾아 상대방을 원망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유연성, 융통성이라고 부른다.
대진씨는 술을 마시는 행위가 아니라, 경기가 안 좋은 상황에서 회사를 나가기 위해, 버티기위해 어쩔 수 없이 윗사람의 눈치를 살펴야하는 자신의 입장에 대해 누구보다 지원씨의 이해가 필요했다. 지원씨 역시 상황이 바뀌지 않을것이라는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남편의 위로가 필요했다. 하지만 서로의 단편적인 모습만으로 상황과 감정과 원인까지도 다 판단해버린 두 사람의 대화는 결국 별거, 그리고 이혼이라는 과정으로 이어져 버리고 말았다.
유연성은 맥락을 이해하는 능력이다.
맥락을 이해하고 그에 맞게 대처하는 능력이다.
유연성이 떨어지는 사람은 피해사고가 높을 수 있다. 웃자고 던진 농담에 죽자고 덤비는 사람. 안부 차 던진 ‘밥 한 번 먹자’에 당장 약속을 정하려고 ‘언제요?’하고 묻거나 이제나 저제나 그 사람의 연락을 기다리고 있다가 종국에는 삐치거나, 서운함이 극에 달해서 그 사람과 손절을 해 버린다.
또 유연성이 부족한 사람은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고집을 부리거나, 아집으로 똘똘 뭉쳐서 소통하지 않으려고 한다.
“나는 원래 그래!!”
“내 말이 법이야!!”
“내가 그렇다면 그런거야!!” 라고 우기기 일쑤다."
그러니 다른 사람과 어울리지 못하고, 어울릴 기회가 없다보니 혼자 있게 되고, 자신만의 세상에서 상황을 이해하고 판단하고, 대처하다보니 유연성이 길러질 기회가 더 없어지게 되는 것이다.
지원씨와 대진씨 또한 감정의 끈이 너무 팽팽하게 당겨져있다보니 유연성을 잃어버린 것이다. 그러니 큰맥락은 놓쳐버린채 작은 단서만으로 상대방을 원망하고, 비난하고, 자책하면서 일을 더 크게 만들어버린 것이다.
유연하지 못한 아버지는 가정을 불행하고 만들고 유연하지 못한 어머니는 자식을 불안하게 만든다
"우리 때는 다 그랬어!“라고 우길 것이 아니라 유연성을 배우기 위해서는 ‘나’를 조금은 내려놓을 필요가 있다.
‘나’라는 기준과 가치관이 내 삶에 최선의 적응수단이었을때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유행에따라, 신체변화에 따라, 계절에 따라 옷을 바꿔입는 것처럼 ‘나’라는 틀에도 변화가 필요하다.
몸은 어른인데 7살의 자기중심성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있지는 않은지 그래서 ‘저 하늘의 태양도 나를 위해 비추는거야!“라고 우기고 있지 않은지, 혹은 다섯 살처럼 “내가 다 할 거야, 다 내꺼야!”라고 하나도 내려놓지 않은채 움켜쥐려고만 하는지 스스로 점검해야한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통합의 과정이다. 삶과 죽음의 통합, 나와 타인의 감정과 가치관의 통합, 유기체적 존재로써 어울려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알아가는 것이다. 통합의 과정을 걷지못한 어른은 여전히 아이처럼 고집을 부리고, 사소한것에 감정을 드러내고, 나의 책임보다는 타인의 탓으로 돌리고, 물질과 보여지는 것에 집착하게 되며, 타인의 평가에 예민하고, 자신에 대한 확인 부족으로 불안해한다.
그래서 내가 하는 생각, 나의 판단에 스스로 질문해보는 습관이 필요하다
“이게 맞아?” 하는 의심이 1단계
“내가 또 이런 생각을 하고 있네!”하는 비판의 2단계
마지막은 “그래 조금만 다르게 생각해보자”라는 재결심이 필요하다.
태풍이 불면 300년 된 떡갈나무는 쓰러지지만 아주 여린 갈대는 쓰러지지 않고 살아남는다. 이유는 바람길을 내주며 부드럽게 휘는 갈대에 비해 떡갈나무는 휘지 않기 때문이다.
관계에서 직장에서, 가정에서 얼마나 유연하게 대처하느냐가 나를 더 나은 사람, 나의 삶의 만족도를 높이는 최선이라는걸 기억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