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몽령' 처음 듣는 순간, 황당하고 어처구니없었습니다
우리 국민이 왜 항상 눈을 부릅뜨고 깨어 있어야 하는가 내밀한 속살과 추한 죄상을 낱낱이 알아차리게 해준 12·3 계엄령
계엄령이라는 단어의 두운과 각운을 맞추어 계몽령이라는 신조어가 탄생했습니다. 음절 수도 음운도 비슷하지만 두 단어가 갖는 의미는 전혀 다른 방향을 향하고 있습니다.
친위 쿠데타를 일으켜 장기집권과 독재를 꿈꾸었던 더러운 야욕이 들통나자 구질구질한 변명을 위해 만들어진 구차한 단어가 아닐 수 없습니다. '야당의 폭거를 국민들에게 알리기 위해 선포했다'는 계엄령을 두둔하는 식의 계몽령이라는 말을 처음 듣는 순간, 황당하고 어처구니없었습니다.
그러나 지리멸렬한 탄핵 정국에서 우리는 계엄령이 진정 우리를 깨우쳐주는 계몽령이었음을 알게되었습니다.
국민들이 무지몽매하고 개·돼지만도 못하다고 치부하는 위정자들은 그렇게 생각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오만과 편견으로 가득한 그들은 국민들에게 무력을 맘대로 휘둘러도 통할 거라 생각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무지몽매한 국민을 깨우치기 위한 것이라면, 맞습니다. 우리가 너무 몰랐습니다. 대통령이라면 숭고한 정신으로 국민들을 위해 혼신을 다하는 사람일 거라 착각했습니다. 비상계엄은 유사시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 필요한 조치입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자신들을 지키기 위해 국민에게 총칼을 겨누었습니다.
우리는 그런 대통령이 과거에만 있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오늘에도 미래에도 언제든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탄핵 과정에서 최고 권력자가 하는 말과 태도는 그나마 남아 있는 대통령이라는 직위에 대한 최소한의 믿음마저 확실하게 부숴버렸습니다.
그는 국민을 확실하게 깨우쳐 주었습니다
아울러 윤석열 정부가 집권하는 2년 7개월 동안 어떤 방식으로 국정을 운영해 왔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의 권력을 지키고, 강화하고, 연장하기 위해 어떻게 행동했는지도 분명하게 일깨웠습니다.
수면 깊숙이 가라앉았던 의문들과 권모술수들을 수면 위로 떠오르게 하여 그들의 내밀한 속살과 추한 죄상들을 낱낱이 드러냈습니다.
그런 측면에서 이번 계엄령은 그 뒤에 가려진 많은 위헌·위법적 행위들을 만천하에 까발리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모르고 넘어갈 수 있었던 비리까지도 모두 알게 되었으니 우리는 계몽되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글을 쓸 때, 첫 문장이 중요합니다. 첫 문장을 쓰고 나면 그다음 문장은 계속해서 앞 문장을 따라나섭니다. 글이 글을 부르고 글이 글을 쓰게 합니다. 생각이 그에 맞는 생각을 부르는 것입니다.
말도 마찬가지입니다. 언어는 사회적 약속입니다. 자신이 한 말의 의미를 왜곡하지 않고 행동으로 지켜내는 일이 신뢰를 형성하여 안심하고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을 만드는 기초가 되는 것입니다.
자신이 저지른 잘못을 현실적으로 감당할 수 없을 때, 거짓말로 빠져나가려 뱉어낸 말은 끝없이 거짓된 말을 불러옵니다. 거짓된 말들은 서로 충돌을 일으키거나 모순에 빠지게 됩니다. 결국 처음에 시도했던 거짓말보다 훨씬 깊은 수렁에 빠지고 맙니다.
윤석열 정부는 그동안 국민을 위한 정치보다 자신들을 위한 정치를 해왔습니다. 그때마다 발생하는 모든 문제에 대해 이렇듯 거짓말로 무마해 왔다는 것을 이번 사태를 통해 짐작할 수 있습니다.
돌이켜 보면, 이 정부 들어 우연히 일어난 수많은 사건 사고는 우연이 아니라 필연이었는지도 모릅니다. 탄핵 정국에서 드러난 윤석열의 헤아릴 수 없는 거짓말은 그의 국정 운영 소신과 인간적 면모까지 여실히 드러냈습니다.
미국 순방에서 있었던 '바이든 날리면' 사건이 그랬습니다. 여당 의원의 공천 개입이 그랬고, 최소 1년 전부터 준비해 온 계엄을 경고성 계엄이라 말한 것이 그렇습니다.
국회를 대체할 입법 기구 예산을 확보하라는 쪽지를 준 적이 없다는 말이 그렇고, 국회의원 체포 지시를 한 적이 없다는 말이 그렇습니다. 선거관리위원회 침탈 이유가 그렇고, 모든 법적·정치적 책임을 지겠다는 말이 그렇습니다.
비상계엄은 헌정 질서를 지키기 위한 것이라는 말이 그렇고, 국회의 군·경찰 투입은 질서 유지가 목적이었다는 말이 그렇습니다. 지엽적이고 말단적인 일로 본질을 뒤집으려니 억지스럽고 구차하고 앞뒤가 맞지 않은 아무말 대잔치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제 그는 양치기 대통령으로 기억될 것입니다.
결국, 우리 국민이 왜 항상 눈을 부릅뜨고 깨어 있어야 하는가를 깨우쳐주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