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호 칼럼] 정의는 승리하는 것이 아니라 지속되는 것이다

정의는 사랑을 먹고 자란다 정의는 각자가 자기 역할을 다할 때 실현된다

2025-06-28     김광호
필자 김광호

사람이 세상에 홀로 존재한다면 정의도 불의도 필요 없다. 타인과 부딪히고 함께 살아가며 비로소 이 두 개념은 모습을 드러낸다.

정의는 공동체의 방향을 불의는 경계해야 할 위험을 말해준다. 그런데 현실의 삶은 단순하지 않다. 많은 이들이 가슴속에 정의와 불의를 함께 품고 살아간다.

우리는 때로 분노한다. 촛불을 들고 광장에 나서기도 하고 억울한 이를 위해 목소리를 높이기도 한다. 그러나 어느 날엔 침묵하거나 심지어 부당한 권력에 기대어 자기 이익을 챙기기도 한다.

정의와 불의는 그만큼 가까이 있다. 마치 인간의 그림자처럼 늘 우리 곁에 있다.

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악은 뿔 달린 괴물처럼 오는 것이 아니라 일상의 무관심 속에서 평범한 얼굴로 스며든다"고 했다. 그녀의 말처럼 불의는 때로 거대한 폭력보다 더 교묘하게 일상을 잠식한다.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행정, 침묵하는 언론 침해받은 정의를 외면하는 사회 그 모든 것이 ‘평범한 불의’다.

그렇다면 정의는 어떻게 존재할 수 있을까? 루마니아의 정치학자 블라디미르 티스마는 "정의는 언제나 사랑을 먹고 자란다"고 말했다.

정의는 법조문이나 도덕 교과서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 사이의 관심과 연대로부터 자라난다. 무관심은 불의를 키우고 사랑은 정의를 지켜낸다.

얼마 전 종식된 내란 사태와 뒤이은 대통령 선거는 바로 그런 사례였다. 불의는 고도로 계산된 말과 위선으로 포장되었고 정의는 외면당하거나 조롱당했다.

그러나 결국 국민은 바른 편에 마음을 모았다. 그 선택의 순간에는 냉철한 판단만이 아니라 ‘진심’이 있었다.

무너진 상식에 대한 회복, 아이들의 미래에 대한 책임감, 그리고 다시는 어두운 과거로 돌아갈 수 없다는 공감이 있었다. 정의는 이처럼 ‘관심’과 ‘사랑’이 결합될 때 살아난다.

▲하늘은 인자하지 않다. 다만 공평할 뿐이다. ⓒ김광호

그러나 우리는 안다. 정의가 승리했다고 해서 불의가 사라진 것은 아니라는 것을 오히려 불의는 늘 다른 얼굴로 다시 찾아온다.  정의가 느리고 때로는 고통스러울지라도, 우리가 그것에 사랑을 거두는 순간, 불의는 곧장 빈자리를 채운다.

정의와 불의 중 누가 이기는가? 그 답은 고정되어 있지 않다. 그것은 매 순간 우리가 더 사랑하는 쪽이 이긴다.

이 말은 단지 감상적인 결론이 아니다. 인간이 ‘어떻게 살 것인가’를 결정짓는 질문이기 때문이다.

고대 그리스의 플라톤은 『국가』에서 이상국가의 정의를 논하며 "정의는 각자가 자기 역할을 다할 때 실현된다"고 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 시대의 역할은 무엇일까?

‘방관하지 않는 시민’이 되는 일이다. 자신에게 이득이 되지 않더라도 잘못된 것을 바로잡으려는 용기  그것이 정의의 또 다른 이름이다.

정의는 승리하는 것이 아니라 지속되는 것이다. 우리가 오늘도 바른 길에 더 많은 관심과 사랑을 보낸다면, 정의는 내일도 살아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