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죽음이 종이 한 장 차이구나!"

친구를 먼저 보내며...하늘나라로 내 삶의 최고 지지자가 세상을 떠났다

2025-07-05     오문수
▲ 내 삷의 최고 지지자가 내곁을 떠나갔다 ⓒ오문수

"선생님 카톡 좀 봐요. 이게 무슨 일이래요?"
"아니, 뭔데 그렇게 놀래요?"


지난 일요일(6.29) 오후 5시쯤 이민숙씨한테서 걸려온 전화를 받은 필자와의 대화 내용이다. 평소 조용하던 이민숙씨의 톤이 올라가 보통 일이 아니겠구나 싶어 전화를 끊고 얼른 카톡을 봤다.

카톡에는 친구가 세상 떠났다는 부고장이 와 있었다. 도저히 믿어지지가 않아 다시 한번 들여다보아도 친구가 하늘나라로 떠났다는 소식이다. 스팸메일인가? 의구심이 들어 부고장 속에 적힌 친구 딸에게 전화했더니 울먹이며 "심부전으로 갑자기 돌아가셨어요"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기실은 이민숙씨로부터 걸려온 전화를 받기 전에 친구한테 전화를 걸었었다. 몽골 여행 다녀온 후 창고 공사하느라 전화 못 하다가 친구가 서운해할까 봐 일요일 오후 4시에 전화했는데 받지 않았다. "바쁜가? 아니면 산책나갔나?" 하며 세 번이나 걸어도 대답이 없어 다른 일을 하다가 이민숙씨의 전화를 받았다.

"아니! 세상에! 이럴수가."

눈앞이 캄캄해지고 정신이 멍해졌다. 월요일 있을 글쓰기 멤버들과의 약속을 화요일로 옮기고 친구가 있다는 부천장례식장을 검색한 후 교통편을 예약했다. 잠자리에 누웠지만 잠이 안 온다. 나를 두고 떠난 친구를 생각하니 오른쪽 가슴이 아려온다.

잠자리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다가 '생사일여(生死一如)'란 불교 용어가 생각났다. 불교 용어인 '진여(眞如)'편에는 생도 사도 없어 그 사이에 조금도 차별이 없는 평등함을 일컫는다. 생이 사요, 사가 생이다. 궁극적으로 생과 사는 같은 것이라는데 왜 이리 가슴이 아릴까?

"아! 내 생명도 오늘 마감할지 아니면 내일 마감할지 모른다."

"삶과 죽음이 종이 한 장 차이구나!"라는 생각이 들자 더 이상 아내를 미워하지 않기로 했다. 기실은 이민숙씨로부터 전화를 받기 한 시간 전에 아내와 심하게 다퉈 분이 풀리지 않고 있었다.

세상에서 둘도 없는 친구와 지적 동반자 셋

고인이 된 친구는 6.25전쟁이 끝나던 해에 전라남도 곡성에서 태어나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함께 다녔다. 고등학교는 광주에서 서로 다른 학교를 다녔지만 친구는 전남대학교 의대를 필자는 영문학과를 졸업했다. 고등학교 시절 길거리에서 잠깐 마주치고 헤어진 후 그와 다시 만난 건 <오마이뉴스가> 연결 고리가 됐다. 서로가 헤어진 지 40여년이 지난 어느날 혼자서 여수 금오도 비렁길을 걷고 있는데 모르는 전화가 왔다.

"오문수씨죠?"
"예! 그렇습니다. 그런데 누구시죠?"
"나 고향친구 조oo인데 내 이름 기억나?"
"내가 자네 이름을 잊어버릴 리가 있나? 그렇잖아도 어디서 무얼하고 있을까 궁금했는데."


친구는 <오마이뉴스>에 나오는 고향 소식을 유심히 읽다가 어릴적 친구라는 걸 확신하고 편집국에 연락해 내 전화번호를 받은 후 연락했다. 부천에서 소아과를 운영하는 친구는 의사이자 휴머니스트, 철학자이다.

평일에는 서로 바쁘다 보니 연락을 삼가지만 일요일 아침이면 한 시간쯤 통화하며 깔깔대기도 하고 때론 안타까워했다. 술도 담배도 안 하고 특별한 취미도 없는 친구는 병원이 직장이고 취미다. 그러나 그와 대화하면서 많은 위안을 받기도 하고 배웠다.

항상 나를 배려해 주는 친구와 대화를 마치고 나면 마음이 따뜻해졌다. 서로의 부족함을 달래기도 하고 70 넘은 삶이 주는 고단함과 관용에 공감하며 충만감을 느꼈다. 그는 <오마이뉴스>에 내 글이 업로드되면 가장 먼저 읽어주는 애독자였다. 제일 먼저 '좋아요!'를 눌러주는 친구였다.

아내는 내가 <오마이뉴스> 시민기자가 되어 글 쓰는 걸 탐탁해 하지 않았다. 어느날 새벽 3시까지 책상에 앉아 글 쓰는 걸 본 나에게 "밥이 나오냐? 돈이 나오냐? 왜 잠도 안 자고 그러고 있느냐"며 책망했었다. 하지만 친구는 내가 쓴 1500여 편의 기사 내용을 전부 다 알고 있다. 뿐만아니라 전적으로 지지한다. 내 삶의 최고 지지자다. 그런 그가 어느날 제안을 해왔다.

"한센병에 관한 소설을 한 편 쓰게."
"아니! 내 전공 분야가 아닌 기사는 자신있지만 소설은 꿈에도 생각해본적 없어. 말도 안 돼는 소리하지마."
"아니야! 자네는 할 수 있어. 지금까지 살아온 이력과 자네가 쓴 글이면 충분히 해낼 걸로 믿어. 죽기 전에 도전해봐."


영어교사였다가 <오마이뉴스> 기자가 된 것만도 생각해본 적 없었는데 소설까지 도전하라는 친구의 말에 절친인 이민숙씨한테 그 말을 전했더니 답장이 돌아왔다.

"해보세요. 선생님은 할 수 있어요. 도와드릴게요."

이민숙씨의 동의를 받아 친구의 제안을 거절하려다가 또 다른 강적(?)을 만났다. 혹 떼려다 혹 붙인 셈이다. 하여 4년 동안 소설작법을 포함 한센인들의 구술록과 관계 서적 4만 페이지를 읽고 나니 어렴풋이 해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부터는 전국의 한센인 정착촌과 관련 시설을 돌아본 후 소록도의 전신이랄 수 있는 동경 전생원까지 돌아보았다.

이제 초안을 탈고해 출판사에 보냈다. 여러 차례 교정 후 친구와 이민숙씨를 모시고 북콘서트를 열기로 했는데 먼저 가버렸다.

나는 남녀가 결혼하면 가장 가까운 사이가 부부인 줄 알았는데 친구와 교감하면서부터 생각이 달라졌다. 가장 가까운 사이는 부부가 아니라 최고의 친구가 더 가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친구는 5대양 6대주를 돌아본 나를 부러워했다. 해서 가까운 시일 내에 휴진한 후 여수 금오도 비렁길을 함께 걷자고 했다. 미국도 함께 여행하기로 했었다. 그런 그가 먼저 내 곁을 떠나갔다.

연로하신 부모님과 장인 장모님이 세상 떠날 때는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좋은데 가시라"고 빌었지만 이렇게 가슴이 텅 비지는 않았다. 나는 아직도 친구를 떠나보내지 못했다.

"친구야! 자네랑 나는 살면서 큰 죄를 짓지는 않았으니 천국문을 지키는 문지기가 꼴찌로라도 통과시켜주지 않을까? 나중에 천국에 가서 못다한 얘기하고 놀아보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