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초원 위에서 '길'을 잃고 '별'을 얻다
12일간의 몽골 여행기
따르릉! 새벽 4시, 아직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몽골의 아침을 알람이 깨웠다. 분주한 준비 끝에 5시 정각, 우리의 여정을 처음부터 끝까지 함께한 가이드 '저리거'가 공항으로 향하기 위해 우리를 찾아왔다. 12일간의 대장정이 막을 내리는 순간이었다.
어젯밤은 여행의 마지막 밤이자, 우리에게 잠시나마 현대 문명의 안락함을 선물한 밤이었다. 저리거 사촌의 집에서 머물렀는데, 따뜻한 물이 쏟아지는 샤워 시설과 깨끗한 화장실은 그간의 불편을 단번에 씻어주는 고마운 휴식처였다.
돌이켜보면, 여행 대부분을 함께했던 전통 가옥 '게르'에서의 생활은 열악함 그 자체였다. 마음을 비워야만 사용할 수 있는 재래식 화장실과 제한된 세면 시설은 도시 생활에 익숙한 우리에게 매일 매일 도전과도 같았다.
우리 일행은 말로만 듣던 몽골 유목민의 삶 한가운데로 뛰어들었다. 상상했던 것보다 더 날것 그대로의 현실과 마주하며 하루하루 수많은 에피소드를 쌓아갔다.
처음에는 다들 "이럴 줄 알았다면 오지 않았을 텐데!"라며 옅은 후회를 내비치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나이가 가장 많은 나는 "돈 주고도 못 할 귀한 체험을 하는 것"이라며 너스레를 떨었지만 불편함 속에서도 서로를 배려하고 묵묵히 상황을 받아들이는 동료들의 모습에서 진한 동지애를 느낄 수 있었다.
몽골의 현재는 우리의 60년대를 떠올리게 했다. 국민소득 5천 불. 모든 것이 부족하고 더디게 흘러가는 풍경은, 3만 6천 불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겐 낯선 모습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아련한 향수를 자극했다.
하지만 그 속에서 만난 사람들의 눈빛은 하나같이 순박하고 선했다. 가난이 결코 마음의 풍요를 앗아가지는 못한다는 사실을 그들의 미소에서 배웠다.
사건은 어느 날 오후, 지평선만 보이는 초원을 가로질러 달리던 중에 일어났다. 졸졸 흐르는 작은 냇물을 만난 것이다. 앞서가던 두 대의 차량은 가뿐히 물길을 건넜다.
하지만 우리 일행이 탄 15인승 소형 버스가 문제였다. 기사는 만약을 대비해 에어클리너를 잠시 빼두는 신중함까지 보였지만, 냇물을 건너며 과하게 엑셀을 밟은 것이 화근이었다. '푸드덕' 소리와 함께 버스는 속절없이 냇물 한가운데에 멈춰 서버렸다.
모두가 내려 차를 밀어보고 온갖 방법을 동원해도 엔진은 다시 깨어날 줄 몰랐다. 결국 앞차가 견인줄을 걸고 뒤에서 미는 사투 끝에 버스를 뭍으로 끌어올리는 데는 성공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두 명의 기사가 땀을 뻘뻘 흘리며 서너 시간 동안 엔진과 씨름했지만 결과는 실패. 해는 서서히 기울고 주최 측은 이곳 초원 한복판에서 하룻밤을 보내는 것으로 결정을 내렸다.
황당한 상황이었지만 불행 중 다행으로 주위에 마른나무가 많았고 바로 옆에는 맑은 냇물이 흘렀다. 우리는 본의 아니게 광활한 몽골 대초원에서 캠프파이어를 하게 된 것이다.
너나 할 것 없이 나무를 주워 모으자 금세 밤새 타오를 장작이 쌓였다. 타닥타닥 타오르는 불꽃 위로는 거짓말처럼 별들이 쏟아져 내렸다. 밤이 깊어지자 섭씨 5도까지 떨어진 기온에 추위가 스며들었지만, 다 함께 불을 쬐며 나누는 이야기는 그 어떤 숙소보다 따뜻했다.
한편, 우리 일행 중 여성 4명은 인근 게르에서 신세를 지게 되었다. 낮에 우리를 도와주었던, 온몸에 문신을 새겼지만 얼굴은 더없이 순했던 몽골씨름 선수들이 알선해 준 곳이었다.
사람이 머물지 않은 지 꽤 오래된 듯 게르 내부는 비위생적이었고 낯선 냄새가 났다. 하지만 밖에서 추위에 떨며 밤을 새울 남자들을 생각하니 불평은 사치였다.
판자로 겨우 가린 화장실에서 서둘러 볼일을 보고, 입은 옷 그대로 정체 모를 이불을 덮고 누웠다. 고단했던 덕에 불편함도 잊은 채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그곳에서 새로운 발견도 있었다. 다섯 채의 게르 중 문 앞에 도끼 자루를 세워둔 곳이 있었는데, 바로 안에 사람이 있다는 표시였다. 문명의 언어가 아닌, 그들만의 소박한 약속이 정겹게 느껴졌다.
새벽녘, 잠에서 깨어 동트는 들판을 산책하고 있을 때 저 멀리서 차 한 대가 흙먼지를 일으키며 다가왔다. 우리를 구하러 온 가이드의 차였다. 그 반가움이란…
저리거 차를 타고 어젯밤의 캠프파이어 장소로 돌아가니 모두들 밤새 추위와 싸우느라 핼쑥한 얼굴이었다. 바람이 가려진 게르에서 잠을 잔 것이 미안해질 정도였다.
고장 난 버스는 밤샘 수리에도 불구하고 끝내 수리가 되지 않았다. 오후 3시쯤 울란바토르에서 대체 차량 2대가 온다는 소식에, 우리는 그 자리에서 아침과 점심을 해결하며 하염없이 기다렸다.
마침내 도착한 차에 나눠 타고 다음 목적지로 향하며 차창 뒤로 멀어지는 버스와 기사의 망연자실한 얼굴이 마음에 걸렸다. 엔진 수리비가 3백만 원, 몽골에서는 상상하기 힘든 큰돈이라고 했다.
십시일반 돈을 모아주고 싶어 넌지시 말을 꺼냈지만 동조하는 이가 없어 이내 생각을 접었다. 하지만 그 안타까움은 여행 내내 마음 한구석에 무겁게 자리했다.
그렇게 우리는 예기치 못한 사건들을 겪으며 몽골에 완벽히 적응해 갔다. 불편한 잠자리와 낯선 음식에도 익숙해졌고, 전문가의 해설과 함께 몽골의 역사와 문화를 깊이 이해하는 시간을 가졌다.
고장 난 버스를 제외하고는 아무런 사고 없이 12일간의 여정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던 것은 모든 상황에 지혜롭게 대처해 준 주최 측의 노고와 보이지 않는 손길의 은혜 덕분일 것이다.
이제 비행기는 푸른 하늘을 가르며 집으로 향한다. 눈을 감으니 불편했지만 그래서 더 특별했던 몽골의 밤과 대초원의 밤하늘을 가득 채웠던 무수한 별들이 다시금 떠오른다. 길을 잃고서야 비로소 새로운 길을 만났던 잊지 못할 여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