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를 위한 통곡과 맹세가 켜켜이 스민 '장군도 벚꽃이야기'
장군도, 원래 토종이었던 신의대로 복원시켜야 한다 여수인으로서 주체성을 회복시키는 일이기 때문이다
중앙동1번지에 있는 장군도는 여수를 상징하는 섬이다. 벚꽃 이야기는 단순한 봄날의 풍경담이 아니다. 원래 이 섬은 울창한 대숲으로 가득하여 ‘죽도(竹島)’라 불렸으며, 청풍이 맑게 불어오던 곳이라 여수 10경 가운데 첫 손가락에 꼽혔다. 가까운 경도옆에 있어서 ‘참경서‘라 불리기도 했지만, 역사의 파고는 이 섬에 전혀 다른 이름을 남겼다.
왜구가 돌산 앞바다에 들끓고 돌산에 출몰하여 사람을 헤치고 양식을 겁탈해 가는 돌산사변을 일으켰고 좌수영의 바로 코 앞인 죽도까지 나타나 노략질을 일삼는 걸 서슴치 않았다 조정은 이량 장군을 전라좌수사로 급히 내려보냈다. 장군은 먼저 바다의 흐름을 살펴, 왜선이 도주할 때 즐겨 이용하던 물길을 차단하였다.
돌산과 죽도 사이 세찬 물살이 이는 곳에 수중 석성을 쌓아 올린 것이다. 국내에서 유일한 수중 축성은 ‘방왜축제(防倭築堤)’라 불렸고, 후세인들은 빗돌을 세워 비문에 써 가로되 ‘장군성’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로부터 섬은 장군도의 이름을 얻게 된 것이다
장군도는 단순한 바다의 섬이 아니었다. 나라가 흔들릴 때마다 수많은 지사와 문사들이 이곳을 찾았다. 누군가는 민족의 운명을 걱정하며 시를 지었고, 또 누군가는 결심을 다지며 장군도를 찾았다. 파도에 젖은 바위틈과 신의대나무 그늘에는, 나라를 위한 통곡과 맹세가 켜켜이 스며 있다.
이 섬에 발길을 디딘 이들은 장군도의 풍광 속에서 자신을 돌아보았고, 그들이 남긴 글과 시는 시대의 고뇌를 증언하는 기록으로 남았다. 장군도란 지명이 단순한 지명이 아니라, 역사의 무게를 짊어진 상징으로 다가오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일본에게 국권을 침탈당하자 나라의 멸망을 목도하며 절의를 지키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시인이요 순국 지사였던 매천(梅泉) 황현(黃玹, 1855~1910)은 30세 나이에 이곳에 와서 ‘장군진에 머물며‘ 라는 시를 남겼다.
장군진에 머물며 -황현-
聞說將軍渡(문왈 장군도) : “장군도 나루는 항상 험하다고 들었는데,”
風波不可行(풍파 불가행) : “바람과 파도로 건너기 어렵다 하였소.”
我來天正霽(아래 천정제) : “내가 올 때는 하늘이 마침 개어 있었으니,”
斜日滿帆明(사일 만범명) : “비낀 햇살이 배의 돛을 가득 비추어 환히 밝구나.”
衆島靑交滴(중도 청교적) : 여러 섬이 푸른 물결 속에 점점이 흩어져 있고,
微瀾汨自聲(미란 얼자성) : 잔물결이 출렁이며 스스로 소리를 내는구나.
依然神欲王(의연 신욕왕) : 문득 마음이 초월의 세계로 달려가려 하니,
揮手洗塵纓(휘수 세진영) : 손 한번 휘둘러 세속의 먼지 묻은 갓끈을 씻어 내고 싶도다.
1910년 한일 병합이 되었다. 여수로 이주해 온 일본인들은 장군도가 호국과 공동체의 안녕을 기원하는 정신적 상징물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이후로는 이름만 들어도 은근히 기가 눌렸는데 눈만 뜨면 바로 앞에 보이는 섬인지라 어떻게든 지워 버리고 싶어 안달하였다.
드디어 잔꾀를 생각해 냈다. 한민족의 정체성을 무너뜨리고 조선을 근대화한다는 명목을 빌어 유희 공간으로 탈바꿈시켜 버리는 계획이었다. 창경궁을 동•식물원으로 격하, 변용하여 조선 왕궁의 위상을 훼손했던 수법과도 같았다.
<신수여산지>의 기록에 의하면 1916년 3월 일본인들로 구성된 제국 재향군인 여수분회원들이 벚꽃나무 1천 주와 단풍나무를 심고는 비료까지 주면서 벚꽃 공원으로 조성하였다. 섬 중앙에는 참경대라는 평평한 공간이 있었는데 일본군이 산동반도 청도전에서 승리한 전리품 포탄 2개를 가져와 기념탑을 세웠다.
바로 옆의 석비에는 장군도가 옛날 조선수군도독 이순신의 전승 유적이라 일본 재향군인의 기념탑을 세운다고 적고 있다. 그 아래 1916년 11월 30일 제국 재향군인 여수분회장 중산모라 새겨 놓았다.
교활한 사람들이다. 외적의 후예들다운 발상이다. 구국의 성지는 벚꽃이 자라날수록 훼손되어 갔다. 그 후 20여 년이 흐르니 제법 세력을 뻗은 벚나무들이 꽃을 피워 봄을 장식한다. 그들이 계획했던 것처럼 섬은 점차 유흥지로 변모해 갔다.
1930년대에 여수는 인구 10만이 넘는 소도시가 되었고 철도는 광여(광주-여수)선에 이어서 전라선까지 개통되었다. 전라선이 개통되며 여행 붐이 불어왔다. 지금의 테마관광 같은 경치 좋은 곳을 열차로 찾아다니는 탐승 관광이 유행하였다. 특히 봄철에는 벚꽃, 복숭아꽃이 유명한 곳에는 철도국에서 관광 열차, 도화 열차라는 특별열차를 편성하거나 열차 일정 기간 특별 할인하는 제도로 관광을 유도하였다. 해상으로는 일본의 시모노세키를 하루 한 번 오가는 창복환이 취항하게 되니 육상과 해상 모두 교통요지로 발전하게 된다.
그뿐 아니라 오사카신문에서 독자가 선정하는 조선 8경에 ’한려수도‘가 선정되니 여수가 알려지면서 관광지로 급부상하던 시절을 맞는다. 조선 8경에 교통 좋은 관광지니 특히 봄이 되면 장군도 벚꽃을 찾는 인파가 넘쳐나서 여수군 전체가 몸살을 앓았다. 장군도가 벚꽃으로 유명세를 타게 된 데는 전국에서 가장 먼저 벚꽃을 피우게 하는 여수의 온화한 날씨 덕분이었다. 당시의 기사를 살펴보자.
장군도 벚꽃 만개. 사람의 물결은 꽃구름 사이에 <동아일보> (1939.4.13.)
“여수항 역사적 명소 장군도 벚꽃이라 하면 전조선적으로 그 명성이 이미 높은 터이라 금년은 례년에 비하야 2~3일간 더 일찍 필 듯하므로 그동안 여수 읍 당국에서는 일반관객의 편리를 위하야 도선 편, 기타 제의 준비를 하여두고 대기하였든바(중략). 지난 9일은 마침 일요일이었으므로 물결같이 모여든 2,000명을 돌파한 관객들은 도선하는중 이 시절이 아니면 보지 못할 가지각색의 희비극을 연출하는 등 그야말로 사람의 물결은 꽃구름 사이에 흐느적거리고 있다고 한다.”
2,000명 인파가 붐볐다면 면적 0.02 km²밖에 안 되는 조그마한 섬에 어떻게 모두 들어갔을지 도무지 믿기지 않는다. 그야말로 발 디딜 틈도 없었을 터인데 충분히 희비극이 연출되었을만도 하다. 또 20여 명쯤 여객을 태우는 도선은 몇 번이나 실어 날랐을지 상상만 해도 웃음이 나온다.
벚꽃은 일본 제국주의가 즐겨 사용한 식민지 미학의 도구였다. 장군도는 단순한 섬이 아닌 호국과 방위를 상징했던 섬이다. 일제의 벚꽃 식재는 섬이 지녔던 호국의 기억을 지우고, 향락적 소비 공간으로 변질시킨 다분히 의도된 기만이었다. 벚꽃의 “아름다움”이라는 외피 속에 감춰진 문화 말살 정책의 살아있는 흔적이다.
그래서 장군도의 벚꽃을 바라볼 때면 우리는 단순한 풍광 너머로, 우리 역사의 근원이 지워지고 변형되었던 아픈 기억까지도 함께 읽어내야 한다.
100년의 세월이 지났다. 그동안 우리는 달콤한 향락에 빠져 있었고 지난날은 쉽게 잊어버렸다. 창경원을 창경궁으로 복원해 놓은 것처럼 장군도에 벚꽃나무를 대체하여 원래 토종이었던 신의대로 복원시켜야 한다. 후대에 사는 여수인으로서 주체성을 회복시키는 일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