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종열, 화가의 화실에는 오늘도 ‘동백꽃’이 핀다

한 송이 꽃을 통해 삶과 자연, 인간을 말해온 예술가의 세계

2025-12-04     조찬현
▲ 강종열 화가는 요즘 ‘하얀 동백꽃’ 연작에 몰두하고 있다. ⓒ조찬현

여수 출신 강종열 화가의 화실을 찾으면 제일 먼저 동백꽃이 반긴다.

지난 27일 찾아간 화가의 화실 캔버스에서는 하얀 동백꽃이 피어나고 있었다. 수많은 작품 중 유난히 시선을 끄는 것은 바로 ‘동백꽃’이다. 작가의 벽면을 가득 메운 크고 작은 동백 그림들은 마치 계절을 잊은 작은 정원인 듯 화실을 가득 채우고 있다.

강 화가는 요즘 ‘하얀 동백꽃’ 연작에 몰두하고 있다. 물감을 여러 차례 칠하고 말리고 덧칠하는 탓에 한 점을 완성하는 데만 20일 이상이 걸린다. 그는 “동백은 조용하지만 강한 꽃”이라고 했다. 화려하게 피어 스스로 떨어지는 순간까지 색을 잃지 않는 동백의 자태를 그는 예술적·인간적 상징으로 여긴다.

▲ 여수시 돌산도에 있는 강종열 화가의 정원이다. ⓒ조찬현

“여수엔 너무 흔해 귀한 줄 몰랐던 꽃… 동백”

강종열 화가가 동백을 그리기 시작한 시간은 2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어느 날 하얀 눈 위에 떨어진 동백을 보고 그의 삶은 모든 게 바뀌었다

“어릴 때는 동백이 흔해서 특별한 줄 몰랐어요. 여수는 길가에도, 집안 장독대에도 있을 만큼 동백이 많았죠.”

그러나 어느 겨울, 그의 정원에 선 큰 동백나무에서 눈과 함께 떨어져 쌓여 있는 꽃잎을 마주한 순간, 화가는 큰 울림을 받았다.

“왜 그날따라 그렇게 제 눈에 들어왔는지 모르겠어요. 눈 위에 붉게 떨어진 동백꽃이, 그 순간만큼은 생명력과 기품을 다 품고 있는 것 같았어요.”

그날 이후 그는 동백을 여수의 상징뿐 아니라 한국인의 정신을 담은 소재라고 생각하게 됐다.

“조용하지만 힘이 있고, 아름다울 때 스스로 떨어지는 꽃… 인간의 삶과 많이 닮아있다고 느꼈습니다.”

이때의 경험은 그의 예술 세계를 완전히 바꿔놓았다. 이전에는 여수 바다, 선창가 사람들, 배, 어부 등 지역의 생활 풍경을 주로 그리던 화가였으나, 동백을 통해 그는 '색과 존재에 대한 철학'으로 작업의 중심축을 옮겼다.

눈 덮인 동백에서 읽어낸 ‘한국인의 정신력’

▲ 강종열 화가 정원 입구에 설치된 작품이다. ‘예술적 고통이 깊을수록 삶의 고통도 깊어진다‘ ⓒ조찬현

그가 그린 눈 덮인 동백은 강종열 예술의 대표적 이미지가 됐다.

“혹독한 겨울에도 피어 있고, 눈이 내려도 품위를 지키는 꽃이죠. 강한 정신, 한국인이 가진 끈기를 담고 싶었습니다.”

관람객들은 이 작품에서 단순한 겨울 풍경 이상의 감정을 느낀다. 그는 “동백은 연약한 아름다움이 아니라, 내면 깊은 곳에서 솟는 힘을 가진 꽃”이라며 “동백을 보고 있으면 묘하게 용기가 난다”고 말했다.

중국과 일본에도 동백이 있지만, 그는 한국 동백이 갖는 ‘선명하고 강인한 기품’은 분명히 다르다고 강조했다.

“아름다울 때 스스로 떨어져 바닥에서도 여전히 붉고 아름다운 것. 그건 자연이 주는 큰 교훈입니다.”

“빛은 숲속에서 오케스트라처럼 움직인다”

모네 이후, 자신만의 빛을 찾기 위해 전국의 동백 숲을 누볐다.

뉴욕 전시를 다녀온 뒤 그는 표현 방식에 새로운 고민을 하게 됐다. 서구의 추상미술과 빛의 개념을 보며 흔들리기도 했지만, 결국 자신만의 방식으로 ‘빛과 색의 움직임’을 찾기로 했다. 그는 6개월 동안 전국의 동백 숲을 직접 누비며 빛을 연구했다.

“빛은 고정돼 있는 게 아니에요. 숲속에 들어가면 바람, 새소리, 나뭇잎의 움직임에 따라 수백 가지 색이 동시에 살아 움직입니다.”

▲ 강종열 예술의 대표적 이미지가 담긴 대작 동백꽃 작품이다. ⓒ조찬현

그는 동백 숲에 누워 바람 소리, 새소리, 먼 산의 음색까지 들으며 색의 진동을 느꼈다.

“모네가 연못 위 빛을 그렸다면, 나는 숲 안에서 들리는 모든 소리를 색으로 옮기려 했습니다.”

이 시기의 작업은 그의 대표적 ‘입체 색감’의 기반이 되었고, 국내외 전시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

인간의 삶을 향한 시선 ‘탄생’, ‘비통’, 그리고 교황청 소장 작품

▲ 강종열 화가가 프란치스코 교황청이 소장 중인 ‘탄생(Birth)’ 작품에 대해 말하고 있다. ⓒ조찬현

그의 화실 한쪽에는 특별한 이야기를 담은 작품 하나가 걸려 있다.

동티모르에서 만난 한 여성이 아기를 품은 모습을 그린 ‘탄생(Birth)’이다. 이 작품의 원본은 프란치스코 교황청이 소장 중이다.

강 화가는 “가장 큰 창조 행위는 인간을 탄생시키는 일”이라며 “사회에서 소외된 이들이야말로 가장 큰 일을 하고 있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다”고 설명한다.

여순사건을 모티프로 한 작품도 있다. 비통에 잠긴 어머니를 주제로 한 그림이다. 그는 “역사의 깊은 상처를 예술로 기록하는 것도 작가의 역할”이라고 말했다.

‘생성과 소멸’, 스러지는 옥수수에서 존재의 빛을 보다

▲ 최근 작업 중인 자연의 끝자락에서 찾아낸 ‘사라짐의 아름다움’이 담긴 옥수수 그림이다. ⓒ조찬현

최근 강종열 화가는 자연의 시간성과 순환을 주제로 한 새로운 작업을 이어가고 있다.

낙과, 꺾인 가지, 스러져 가는 옥수수 등 자연의 끝자락에서 찾아낸 ‘사라짐의 아름다움’이다.

“썩어들어가는 열매를 보면 오히려 빛이 드러나기도 합니다. 끝나는 순간에도 존재의 의미는 사라지지 않죠.”

그는 이러한 과정을 ‘생성과 소멸’이란 주제로 정리하며, 자연이 가진 근원적 힘을 캔버스에 옮기고 있다.

이는 동백 연작에서 한 단계 확장된, 작가의 새로운 탐구다.

여수 10경 “여행객이 엽서처럼 가져갈 수 있는 여수를 만들고 싶었다”

강 화가의 화실에는 가벼운 터치의 새로운 작품들도 놓여 있다.

그가 직접 선정한 ‘여수 10경’을 모티프로 한 시리즈다. 무슬목의 소나무, 오동도, 백도, 장척마을의 저녁노을, 돌산대교 야경 등 여수의 풍광을 수채화 같은 감성으로 그려냈다.

“여행지에서 엽서를 사 오듯, 여수에도 그런 게 있으면 좋겠다 싶었죠. 너무 무겁고 철학적인 그림만 그리다 보니 여수의 풍경을 조금은 편하게 표현해 보고 싶었습니다.”

그는 다가오는 ‘2026여수세계섬박람회’에 맞춰 엽서 제작을 구상 중이다.

“여수 10경 엽서가 박람회의 작은 기념품이 될 수 있다면 좋겠어요.”

▲ 강종열 화가가 직접 선정한 ‘여수 10경’을 모티프로 한 시리즈 여수풍경 작품이다. ⓒ조찬현

“동백이라는 작은 꽃으로 따뜻함을 전하고 싶다”

강종열 화가는 현재 내년 초 열릴 개인전을 준비하며 작업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이번 전시에서도 동백 연작이 주요 작품군을 형성할 예정이다.

그의 화실 벽면을 가득 채운 동백꽃들은 단순한 소재 그 이상이다.

20년 동안 하나의 꽃을 통해 인간의 품위, 자연의 순환, 존재의 빛, 지역의 정체성을 탐구해온 예술 세계가 응축돼 있다.

그는 말했다.

“동백이라는 작은 꽃으로 사람들의 마음에 따뜻한 온기를 전하고 싶어요. 조용하지만 강한 꽃처럼, 제 그림도 보는 이의 마음속에 오래 머물면 좋겠습니다.”

여수의 바람과 바다, 숲과 사람을 담아온 강종열 화가의 화실에는 오늘도 동백꽃이 피어나고 있다. 그 꽃은 계절보다 오래, 그리고 깊게 피어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