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금석위개(金石爲開), 붉은 말의 기상으로 새 여수를 열며
옛날 초나라에 웅거자(熊渠子)라는 명궁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밤, 어둠 속을 걷던 그는 저만치 웅크리고 있는 형체를 보았습니다. 호랑이였습니다. 심장이 멎는 듯했습니다. 웅거자는 활을 들어 온 정신을 모았습니다. 손끝이 떨렸지만, 호흡을 가다듬고 시위를 당겼습니다. 살아남아야 한다는 절박함, 단 한 발에 모든 것을 건다는 각오. 화살은 시위를 떠나 어둠을 가르며 날아갔고, 둔탁한 소리와 함께 과녁에 박혔습니다.
날이 밝았습니다. 웅거자는 간밤의 현장을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습니다. 호랑이는 온데간데없고, 거기에는 커다란 바위가 하나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바위에는 자신의 화살이 깊숙이 박혀 있었습니다. 돌을 호랑이로 착각했던 것입니다. 웅거자는 믿기지 않았습니다. 다시 활을 들어 그 바위를 향해 쏘았습니다. 그러나 화살은 바위에 부딪혀 튕겨 나갔습니다. 몇 번을 쏘아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무엇이 달랐을까요. 간밤에는 목숨을 건 절박함이 있었습니다. 잡념 없이 오직 한 점에만 집중하는 온전한 정성이 있었습니다. 대낮에 다시 쏠 때는 이미 바위임을 알았기에 그 절실함이 없었습니다. 한나라의 학자 유향(劉向)은 《신서(新序)》에 이 이야기를 기록하며 이렇게 적었습니다. "그의 성심을 보니 금석도 열린다는데, 하물며 사람의 마음이랴.(熊渠子見其誠心而金石為開 況人心乎)" 이것이 금석위개(金石爲開)의 유래입니다. 지극한 정성은 쇠와 돌마저 열리게 한다는 뜻입니다.
병오년(丙午年) 새해가 밝았습니다. 붉은 말의 해. 태양을 품은 불의 기운과 거침없이 내달리는 말의 생동감이 만나는, 60년 만에 돌아온 역동의 해입니다. 그러나 지금 여수 앞에 놓인 현실은 만만치 않습니다. 웅거자가 어둠 속에서 마주한 호랑이처럼, 우리 앞에도 여러 겹의 어려움이 버티고 서 있습니다.
여수 경제의 근간이었던 석유화학산업이 흔들리고 있습니다. 여수만의 문제입니다. 울산의 석유화학은 잘 버티고 있고 올해 샤힌 프로젝트가 완공되어 가동된다고 합니다. 여수시만의 잘못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만, 에너지 대전환의 파고 속에서 제 때 대처하지 못한 여수는 구조조정의 칼바람이 불어오고, 그 한파는 대기업 노동자를 넘어 더 취약한 위치의 하청업체 노동자들에게까지 엄습하고 있습니다.
관광업의 사정도 어렵습니다. 전국을 사로잡았던 '여수 밤바다'의 낭만이 빛바래고 있습니다. 펜션과 숙박업체의 부진, 1인 손님 거절 논란 같은 뜻밖의 해프닝들이 여수의 이미지에 상처를 남겼습니다. 낭만포차의 불빛도 예전 같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떠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가슴 아픈 것은 이웃 도시들과 벌어지는 격차입니다. 순천은 국가정원과 애니메이션 산업으로 젊은 인구와 전국에서 방문객을 끌어들입니다. 광양은 2차전지와 수소산업이라는 미래 먹거리를 선점하며 새 판을 짜고 있습니다. 고흥은 우주항공과 드론의 첨단 거점으로 떠오릅니다. 같은 전남 동부권인데, 여수만 뚜렷한 미래 청사진 없이 서성이는 느낌. 이것이 많은 시민들께서 느끼시는 답답함일 것입니다.
더 근본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여수에는 중장기 비전이 보이지 않습니다. 10년 후, 20년 후 여수가 어떤 도시가 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큰 그림 없이, 눈앞의 현안에만 급급한 대증적 처방이 반복되어 왔습니다. 리더십의 부재입니다. 올해 열리는 섬박람회조차 제대로 준비되고 있는지 걱정하는 목소리가 적지 않습니다. 2012년 세계박람회의 성공 경험이 있는 도시가, 14년이 지난 지금 또 하나의 국제행사를 앞두고 불안해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해주는 것일까요.
그러나 저는 바로 이런 때일수록 금석위개의 정신을 떠올립니다. 웅거자의 화살이 바위를 뚫은 것은 활의 성능이나 화살촉의 날카로움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오직 한 점에 모든 것을 건 절박한 정성, 그것이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었습니다. 지금 여수에 필요한 것이 바로 그 마음입니다. 막연한 낙관도 아니고, 무기력한 체념은 더더욱 아닙니다. 현실을 똑바로 보되, 그 현실을 뚫고 나가겠다는 처절한 각오입니다.
다행히 여수에는 금석을 열 수 있는 저력이 있습니다.
첫째, 365개 섬과 다도해의 절경, 한려해상국립공원의 청정 바다. 이 빼어난 자연환경은 돈으로 살 수 없고 하루아침에 만들 수도 없는, 여수만의 천혜의 자산입니다.
둘째, 이 땅에 새겨진 이순신 장군의 정신이 있습니다. "필사즉생 필생즉사(必死卽生 必生卽死)." 죽고자 하면 살고, 살고자 하면 죽는다. 명량의 파도 앞에서 열두 척의 배로 나라를 구한 그 불굴의 정신이 바로 여수의 바다에서 태어났습니다. 위기 앞에서 물러서지 않고 정면으로 돌파하는 것, 이것이 여수의 DNA입니다.
셋째, 묵묵히 현장을 지키는 우수한 공무원들이 있습니다.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시민을 위해 뛰는 이들이 있기에, 여수는 무너지지 않습니다. 이들의 역량을 제대로 이끌어낼 리더십만 있다면, 여수는 다시 일어설 수 있습니다.
병오년의 붉은 말은 정오의 태양처럼 가장 뜨겁고 강렬한 기운을 품고 있습니다. 말은 예로부터 전진과 도약, 끊임없는 도전의 상징이었습니다. 이 역동의 기운을 빌려 여수도 다시 달려야 합니다. 바위 앞에서 물러서지 않고 활시위를 당겼던 웅거자처럼, 명량의 파도 앞에서 배수진을 쳤던 이순신처럼, 금석도 열리게 하는 지극한 정성으로 하나하나 난관을 뚫어 나가겠습니다.
쉬운 길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함께라면 못 열 문도 없습니다. 시민 여러분과 함께 땀 흘리고, 함께 고민하며, 새 여수의 길을 열어가겠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병오년, 금석위개의 각오로 여수의 새로운 질주가 시작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