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세계 돌아다녔지만 내 고향이 최고"

[나가사키 여행기 ⑦] 코리아나호 부선장 최영석의 삶

2015-05-13     오문수
▲  포즈를 취해달라는 부탁에 뱃머리에서 멋진 자세를 취해주는 최영석(82세) 부선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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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아! 큰 개울 하나 건너는 건데 뭘" 

한국 유일의 범선 코리아나호를 타고 나가사키 범선 축제를 마친 후 여수로 돌아오던 중 부선장 최영석(82세)씨가 한 말이다. 범선을 처음 타본 일행이 심한 비바람으로 배가 흔들려 불안해하자 일행을 안심시키기 위해서 던진 말이다. 

코리아나호가 나가사키 범선축제(4.25-4.29)를 마치고 여수로 돌아오기 위해 2시간쯤 항해 후 미 해군 7함대가 주둔해 있는 사세보를 지나자 육지가 거의 보이지 않고 무인도 등대만 보였다. 이제 조금만 더 가면 망망대해다. 여수를 향해 동시에 출발했던 러시아 나제즈다호는 가물가물 멀어지는 데 갑자기 하늘이 어두워지고 시커먼 먹구름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  나가사키 범선 축제를 마치고 여수로 돌아오던 중 시커먼 먹구름이 다가오고 있다. 곧 이어 천둥번개와 함께 세찬 비바람이 몰아쳐 일행을 겁나게 했다. 일행이 겁을 먹자 현해탄은 "큰 개울에 불과하다"며 "걱정말라!"는 최영석 부선장 말에 마음이 놓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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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를 출발해 나가사키로 올 때 심한 풍랑을 경험한 일행은 떨고 있었다. 갑판과 선실에 있는 모든 물건들을 밧줄로 꽁꽁 묶고 비설거지를 마친 후 배가 시커먼 먹구름 속으로 들어가자 고막을 찢는 듯한 천둥번개가 치고 배가 심하게 흔들린다. 나가사키에 도착해 정채호 선장한테서 "범선은 복원력이 뛰어나 심한 풍랑에도 괜찮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이번에는 아니다. 

정채호 선장과 승선원들은 비바람을 뚫고 여수로 계속 항해할 것인가, 아니면 배가 피항할 수 있는 마지막 항구 히라도로 되돌아갈 것인가에 대해 회의를 하다 히라도로 회항하기로 결정했다. 육지 쪽으로 뱃머리를 돌리자 천둥번개와 비바람이 약간 주춤해졌다. 그때였다. 히라도 항구쪽으로 항해를 해봤던 일행 중 한 명이 의견을 제시했다. 

"히라도는 진도 울돌목처럼 물살이 빠르고 수심이 얕아 암초에 걸릴 위험이 있으며 코리아나호의 마스트가 육지를 가로지르는 대교에 걸릴 염려가 있어 안 됩니다. 이대로 비바람을 뚫고 여수로 갈 수밖에 없습니다"

히라도를 향하던 배가 3시간을 허비하고 다시 여수를 향하기 시작했다.  일행은 구명조끼를 입고 입을 꼭 다물고 있었다. 근심 어린 얼굴을 한 여성이 입을 열었다.      

"부선장님! 배가 이렇게 심하게 흔들리고 비바람이 몰아치는데 괜찮을까요?"  
"걱정하지 마! 이까짓거 뭘! 나가사키에서 여수 가는 건 큰 개울하나 건너는 것밖에 안돼"
 

▲  배에서 밧줄 작업을 하는 최영석 부선장. 한국판 '노인과 바다' 같은 느낌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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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가사키 범선축제에 참가한 기모노입은 아가씨와 함께 한 최영석 부선장(왼쪽)과 이효웅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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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석 부선장의 말을 들은 일행의 얼굴에 안도감이 돌았다. 60년을 바다에서 보낸 진정한 바다사나이 최씨의 경험담을 믿기 때문이다. 하얀 모자에 노란 잠바를 걸쳐 입고 짙은 선글라스를 낀 최영석씨는 얼굴과 손에 주름이 많다. 그러나 그 주름은 바다를 사랑하고 바다가 준 훈장이었다. 느릿느릿한 동작과 말투지만 친근한 말투와 다정한 미소가 사람을 끈다. 그가 살아온 이야기를 들어봤다.

60년간의 바다생활... 세상 많이 돌아보고 좋은 친구 만난 게 행복

경기도 일산이 고향인 최씨는 2002년 세일코리아(범선을 타고 인천, 목포, 여수, 부산, 오키나와를 항해) 행사 때부터 코리아나호 선장 정채호씨와 인연이 돼 지금껏 코리아나호가 출항하면 동행한다. 둘 사이에 대해 정채호 선장에게 묻자 "나이스 콤비"라며 "둘이 함께 백화점에라도 들르면 외국 사람인 줄 알고 일본어로 물어요"라며 웃었다.

러시아 범선 팔라다호에 승선하기도 했던 최씨는 러시아 선원들의 자문 역할을 할 뿐 아니라 문제가 생겼을 때는 해결사 역할도 한다. 나가사키에서 정채호 선장이 나제즈다호에 승선해 러시아 선장과 여수 행사 계획을 논의할 때도 항상 대동하고 다녔다. 그만큼 영어도 잘하고 해외에 친구들이 많다.
 

▲  러시아 범선 나제즈다호 선장일행과 협의 중인 코리아나호 정채호선장과 최영석 부선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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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코리아나호에서 망중한을 즐기는 최영석 부선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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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씨는 1960년대 300대 1의 경쟁률을 뚫고 부산해양대학교에 합격해 해양대학교 실습선을 탔다. 졸업 후 해양대학교 실습선 선원이 된 그는 일본어로 된 배 부위의 모든 명칭을 영어로 바꾸기 시작했다. 

"미국에서 배를 인수할 때 당시 베어링 사이즈를 몰라요. 당시 선원들 수준이 그것밖에 안됐으니까. 사이즈가 안 맞으면 버리기도 했어요. 그 후 미 해군 교본을 번역하는 곳에 근무했어요. 영어요? 당시 미국 상류사회 친구들이 많아서 영어를 배웠어요"

영어를 잘하는 그를 지켜본 해군참모총장이 테스트한 후 병무국장실에 근무하도록 했다. 해군에서 3년 근무를 마치고 제대한 후 해양대학 실습선 갑판장으로 근무했다. 한국선원들의 배 문화가 정립되어 있지 않아 불만을 느낀 최씨는 노르웨이 선박회사에 지원해 3년간 근무했다. 그가 노르웨이 선박회사에 합격한 이유는 영어를 잘할 뿐만 아니라 배에 관한 모든 자격증을 땄기 때문이다.
 

▲  코리아나호에 승선한 일행과 함께한 최영석 부선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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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웨이 선박회사에서 7년을 근무한 그는 독일  스테이트 마리나(State Marina)회사에서 4년을 보냈다. 출중한 실력을 갖춘 최씨를 본 미국과 노르웨이 선박회사에서는 회사에 꼭 필요한 사람이라고 하며 한국으로 보내주지도 않았다. 최씨의 어머니는 아들이 바다로 , 해외로만 돌아다니다 죽을까 봐 걱정돼 맨날 절에 가서 빌었다. 나도 걱정되는 게 있어 질문을 했다.

"그렇게 해외로만 돌아다녀 사모님이 싫어하지는 않았습니까?
나이 40에 결혼하면서, 패물이고 재산이고 필요 없으니 신체검사만 해가지고 오라고 그랬어요"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느낀 생각은 "세상이 좁고 모든 학문이 철학으로 귀결되듯이 내 고향이 최고이고 내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다 존경스럽다"고 말했다. 큰 배에서 물에 빠져 죽을 뻔하기도 했던 최씨가 "살면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과 후회되는 것은 무엇이냐?"는 질문에 답했다.
 

▲  일행이 나가사키 범선축제 구경과 공연을 나간 사이에 배에 남아 뒷정리를 하는 최영석 부선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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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면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은 세상을 많이 보고 느끼고 배우며 좋은 친구를 만난 겁니다. 후회되는 거요? 없죠! 하고 싶은 것 다하고 살았으니까. 죽을 때까지 아무 걱정 없을 정도의 준비를 했습니다" 

"강대국 사이에서 수많은 침략을 받으면서도 꿋꿋이 살아남은 우리 민족이 대단하다"며 운을 뗀 최씨는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이순신 장군과 김구 선생을 들었다. "젊은이들이 도전적이고 케이 팝(K-Pop)이나 한류를 해외에 많이 알려 자랑스럽다"고 말을 맺은 그는 "신사란 지식과 지혜를 올바르게 수행하는 사람"이라고 정의했다. 

다른 사람들은 구경나가고 공연할 동안 배에 남아 묵묵히 배를 손보고 정리하는 노익장. 관록과 지혜, 너그러움이 묻어나는 최영석 부선장은 큰 산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