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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원이 이루어지려면 낱말의 덫에 걸리지 말아야 합니다.

[소설가 양영제 특별기고] '좌우이념대립'이라는 프레임 깨야

  • 입력 2018.10.20 09:03
  • 수정 2018.10.20 09:16
  • 기자명 양영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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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장해 불것당께요."

며칠 전 순천 KBS 개국특집 ‘여순사건 70년 다시 진실을 묻다’ 프로그램을 보다가 입이 헤 벌어졌습니다. 토론자로 나온 모 여성작가의 말 때문이었습니다. 벌어진 입에서 혀가 늘어져 나왔습니다. 그리곤 나도 모르게 무의식적으로 사투리가 튀어나왔습니다.

“워마 진짜로 환장해불것구만잉.”

전직 국회의원이었다는 모 여성 작가의 주장 요지는 이러했습니다.

“나는 반란이라고 말하고 싶지만… 진실은 하나일 수 없다. 14연대 주동자 김지회는 공산주의자이며 북한에서 파견한 간첩이다. 14연대가 양민과 어린아이까지 학살하였다. 그들의 목적은 북한 정권과 합치는 것이었다. 이념대립 때문에 진압과정에서 많은 양민이 희생되었다. 좌우익 폭력의 되풀이다.”

그 여성 작가의 말은 내 사춘기 무참했던 어느 날 기억을 떠오르게 했습니다. 그 어느 날은 여수에서 서울로 전학 간 중학교 3학년 초 입니다. 공부를 잘해서 유학 간 것이 아닙니다. 여수말로 해서 부모님이 무담시 누님 형님을 보내더니 나마저 서울로 보냈습니다. 전학 간 학교 선생님에게 제출한 호적등본을 보니 거기에는 본적(本籍)이 서울로 호적 세탁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푸른 바다가 펼쳐진 아름다운 고향 여수를 숨겨야 할 이유를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배정 받은 반 아이들에게 여수에서 왔다고 당당히 인사했습니다. 큰 실수를 한 것입니다.

“여순반란 사건 일어난 곳에서 왔네?”

한 아이가 나에게 말 했습니다. 갑자기 내 얼굴에 붉은 빛이 피어나고 있음을 느껴야 했습니다. 서울 아이들에게 기죽지 않으려고 일부러 떡 버티었던 다리에 힘이 풀리고 말았습니다. 박정희 군사독재 정권이 장기집권을 강화해 나가던 시기였고 역사 교과서에는 ‘여순반란사건’이라고 명시되어 있던 시절이었습니다.

여수 ... '반란'꼬리표 달린 지명, 고향을 말하지 못한 어린 시절

그 후로는 누가 고향이 어디냐는 묻기라도 하면 여수라는 대답을 주저하게 되었습니다. 나도 모르게 빨갱이 콤플렉스에 걸려버렸던 것이었습니다. 여수에서 학교 다닐 때는 복도에 반공방첩 포스터를 매일 보고 월 마다 반공웅변대회가 열렸기 때문에 전혀 없었던 콤플렉스였습니다.

세월이 많이 흘러 ‘여순항쟁 70주년’이 되어 여러 추모행사와 더불어 각 매체에서 진실을 다루고 있습니다. 직접적 피해 당사자인 민간인 학살 유가족과 군경 유가족이 화해 상생 차원에서 부둥켜안는 사진도 매체를 통해 봤습니다.

집단무의식은 '유전'된다. 

그런데 말입니다 항쟁에 따른 ‘물리적 직접 인과관계’ 당사자인 민간인 학살 유가족과 경찰 유가족이 서로 부둥켜안는다고 해서 내 사춘기 상처가 치유되지 않고 있는 것은 왜 일까요. 더구나 나는 미군정이 해방 된 이 나라를 다시 지배하던 시대를 살아 온 것도 아니었습니다.

이런 나의 개인 무의식적 현상은 1948년 이후 여수와 순천으로 대표되는 전남 동북부지역 집단무의식collective unconscious에서 비롯되었을 것입니다.

개인 무의식은 어릴 때부터 쌓아온 의식적인 경험이 억압에 의해 무의식이라는 지하로 떨어뜨려놓은 덩어리인데 이것이 그 사람의 생각, 감정, 행동에 보이지 않게 영향을 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집단을 이루어 공통의 정신적 집단현상으로 나타나는 것을 집단무의식 이라고 합니다. 집단적 무의식의 원형archetype은 경험하지 않아도 정신적으로 유전 됩니다.

예를 들면 우리네 선조는 어디가나 자기 심상과 기원을 돌 한 개에 얹혔습니다. 여러 사람이 하나씩 쌓은 돌이 돌탑입니다. 이런 집단무의식 유전현상은 그림으로도 표현 됩니다.

아래 그림은 여수 출신 박금만 작가 작품입니다.

 

만성리 굴(마래터널) 지나자마자 나타나는 만성리 학살 웅덩이에 돌을 던져 탑을 쌓는 장면입니다. 여수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던 사람들은 만성리 해수욕장을 걸어가면서 그림에서 표현한 경험을 갖고 있을 장면입니다. 이것이 여수 지역 집단무의식이 유전된 현상입니다.

집단무의식은 선대 집단이 경험했던 의식이 무엇인가의 무서운 힘에 의해 억압되고, 그래서 무의식이라는 어두운 지하로 떨어뜨려 쌓인 것입니다. 이렇게 지하에 떨어뜨려버리고 열쇠로 걸어 잠근 의식은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지만, 공통된 정신적 바탕을 이루게 됩니다. 이를 정신분석학자 칼 구스타프 융(C.G JUNG 1875-1961)은 ‘그림자’ 라고 칭 했습니다.

그림자는 개인에게도 있지만 그 지역과 사회에 공통적으로 드리워집니다. 여수 순천을 비롯해서 전남 동북부지역에는 지역 사회적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진 채 칠십 년 세월이 흘러 왔습니다. 이런 어두운 그림자를 걷어내고 싶어 하는 마음이 해원(解冤)입니다. 학살 당 한 선대와 그 유족의 간절한 기원이 바로 여수 순천의 해원입니다.

그런데 해원을 간절히 바라는데 있어 뭔가 심리적 장애가 발생합니다. 여수말로 해서 뭔가 껄쩍찌근 하고 불안하며 눈치가 보이는 것입니다. 연결고리 때문입니다. 

의식의 아래에 있는 그림자를 의식의 수면 위로 끄집어 올려놓으려면 연결할 수 있는 연결고리가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반공보수 진영에서는 ‘반란’이고 민족진보 진영에서는 ‘항쟁’입니다. 이 두 단어는 그림자와 연결된 두 진영의 고리입니다.

'사건'이란 명친 표기는 고통피하려는 '회피'에 불과

그런데 민족진보 진영에서도 반란이든 항쟁이든 입에 올리기 극구 꺼려하여 각 추모 행사 명칭을 사건으로 표기합니다. 이는 진실규명이 안 되어 있기 때문에 가치중립적 자세를 취하는 게 아닙니다. 이미 진실규명은 역사학자 사회학자들에 의해 충분히 규명되었고 사실도 나열되어 있습니다.

그런데도 사건으로 명칭을 칭하는 것은 회피에 불과합니다. 회피하는 이유는 반란이든 항쟁이든 고통이라는 은유가 떠오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화해상생을 내 세우게 되면 반공보수진영에서는 반민족 .탄압. 친일 이런 회피하고 싶은 단어와 민족 진보진영에서는 피, 죽음, 학살 등의 고통스런 심리기제에서 일시적으로 회피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런 회피성 명칭으로는 그림자를 걷어낼 수 없습니다. 십년 전 여순항쟁 60주년에도 화해 상생 해원을 내세웠으나 십년이 흐른 지금까지 똑같은 현상이 반복되고 있지 않습니까. 이렇게 되면 앞으로 또 십년이 흐른다 해도 현상은 변하지 않고 그림자도 걷어지지 않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국가나 여수시 그리고 각 매체들이 통용하고 있는 역사. 진실 회피성 명칭이 ‘여순사건’ 외 진실을 은폐하고 왜곡하는 단어들도 있습니다. 텔레비전 토론에서 모 여성작가가 쏟아내는 ‘좌우이념대립. 갈등과 반목. 양민. 공산주의. 간첩’ 이런 단어들입니다. 이런 단어들을 사용해서 당시 지배층은 낱말의 덫을 만들었고, 아직도 반민족적 사고체계를 갖고 있는 친일친미보수 층에서 역사 진실을 낱말의 덫에 묶어두려고 시도합니다.

'양민학살' ?  .... 엄밀히는 '반민족에 저항한 시민학살'이다. 
명칭 '여순사건', 여기서 '사건'도 걷어 내야한다.

한 가지 대표적인 낱말을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여순항쟁을 여순학살로 진압하여 마무리되자 이승만 정부당국은 ‘양민’이라는 단어를 살포 했습니다. 이후 여수역에서는 기차를 타려는 사람에게 경비군인이 “손바닥!!” 이라고 소리쳤답니다. 그러면 얼른 손바닥을 쳐들어보여 줘야 기차를 탈 수 있었다고 합니다. 손바닥에는 기차표 보다 더 소중한 ‘양민’이라는 도장이 찍혀 있었기 때문입니다.

양민이라는 도장은 이승만 반민족 행위와 친일잔존세력에 저항하지 않는 사람을 뜻합니다. 양민이라는 도장에는 저항하면 불량국민이라는 저의가 담겨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기표와 기의라고 하는데 여기에 함정과 덫이 있는 것입니다. 

당시 지배 권력의 단어를 사용함으로써 여순시민과 민족에게 커다란 죄악을 저지른 그들의 세계관에 끌려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여수시민단체들이 사용하는 양민학살이라는 낱말에도 함정을 가리는 커튼이 있습니다. 여순항쟁이 일어나게 된 본질과 학살이라는 비극을 만들어낸 이승만 반민족정부의 정체를 가리는 역할을 하는 커튼입니다. 커튼을 걷어내면 양민학살이 아니라 반민족에 저항한 시민학살이 드러나게 됩니다.

이렇듯 여순반란이든 여순항쟁이든 낱말을 놓고 낱말 뜻, 즉 진실을 따져보자는 공론화 대신 유아무아 여순사건으로 표시하자고 하는 것은 따져서 드러나는 역사진실은 회피하자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70년이란 세월동안 '반란'으로 묶어두면서 군사독재정권 안정화에 기여했는데, 이제는 그럴 수 없으므로 모호한 '여순사건'이라는 명칭을 통해 본질을 회피하려는 심리가 깔려 있거나, 아니면 낱말의 덫에 걸려 있는 것입니다.

진실로 여수사람들이 그림자에서 벗어나려면 이런 낱말의 덫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고통스럽더라도 의식과 무의식 사이에 있는 어두운 그림자를 끌어올려 햇볕에 말려야 합니다.

그림자는 의식화될 수 있고 지각됨으로써 거두어 낼 수 있습니다.

집단적 그림자와 무의식을 이루는 정신적 원형은 고착 불변되는 것은 아닙니다. 자꾸 무의식이라는 어두운 창고에 더 떨어뜨려 처박아 두려고 하니까 사람을 괴롭히는 것입니다. 무의식은 억압한다고 해서 영원히 통제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림자는 끄집어내어 진실이라는 햇볕에 말려야 곰팡이가 끼지 않습니다.

그 방법은 사회적 존재의식에 따라 이렇게 생각하든 저렇게 생각하든 공론화입니다. 공론화하기 위해서는 반란이든 항쟁이든 다 드러내놓고 따져야 합니다. 갈등과 반목을 피 한다는 허울 가득한 명목으로 사건으로 칭한다고 해서 화해와 상생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회피성 단어로 덮어쓰려고 하지 말고 드러내야 합니다.

화해 상생은 지역 직접적 관계인 군경 유가족과 학살 당한 시민 유가족이 부둥켜안는다고 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지역에서 비극적 충돌을 빚게 만든 직접관계를 이루게 만든 인과적 관계로 시선을 옮겨 이것을 먼저 풀면 직접적이고 물리적 감각에 의존하는 양 유가족 갈등관계도 자연스럽게 풀리게 됩니다.

여기서 인과적 관계 대상이란 분단을 저지하고 미군정에서 벗어나 진정으로 민족자치를 이루려는 민족시민과 미국을 등에 업고 권력을 쥔 이승만과 친일잔존세력입니다.

민족과 반민족이 충돌한 여순항쟁

여순항쟁은 민족과 반민족이 충돌한 것이었지 지역 좌우익 이념 대립 때문에 발생한 사건이 아닌 것입니다. 설혹 몇몇 남로당 당원이 있다고 해도 여순항쟁 성격을 규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친일반민족 세력은 14 연대 누가 남로당원 이었다니 하면서 그것만 부각시킵니다. 낱말의 덫을 놓았던 것이죠. 이것을 프레임이라고 합니다.

<프레임 그림>

 

당시 빨치산 토벌을 하면서 남부군 총수 이현상을 사살한 것으로 알려진 차일혁 총경은 이렇게 글을 남겼다고 합니다.

“이른 아침에 들판에 나가 일하는 농부에게 물어보라. 공산주의가 무엇이며 자본주의가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 몇 명이나 있겠는지? 지리산 싸움에서 죽은 군경이나 빨치산에게 물어보라. 공산주의를 위해 죽었다, 민주주의를 위해 죽었다고 할 사람이 과연 몇 명이나 있겠는가?"

이렇듯 좌파니 우파니 이념대립이니 따위의 단어는 여순 민족시민과 이승만 반민족 정부와 친일잔존 세력과의 대립이었던 여순항쟁 성격을 교묘히 지역 내 이념갈등 사건으로 가두어 놓게 됩니다. 이것을 보고 요즘은 프레임 효과 Frame Effect라고 부릅니다. 특정한 프레임은 특정한 사고를 강요하게 됩니다.

이렇게 반민족 지배세력들이 짜놓은 프레임에 스스로 갇혀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이 프레임을 부셔버려야 여수와 순천은 당시 시대모순인 민족과 반민족의 유기적 인과관계를 바라볼 수 있으며 비로소 어두운 그림자를 걷어낼 수 있는 것입니다.

프레임효과 - 지배세력이 짜놓은 프레임에 갇힌 우리 

그런데 참 이상합니다. 아무리 역사학자들이 애를 써서 진실을 증명하는 사실 자료들을 발굴 나열해도 반공보수 사람들은 무시를 해 버린다는 것입니다. 평생 자신에게 체계적으로 형성된 가치관이 무시당하는 것에 화가 나는 것입니다. 자신의 가치관은 반민족 이승만 정권과 반민주 군사독재정권들이 체계적으로 주입하여 쌓여진 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무의식적으로 사고하기 때문입니다. 역사학자들이 진실을 증명할 새로운 사실을 나열해도 무시해 버립니다.

순천 KBS 개국 특집 방송에 출연한 보수논객이라는 모 여성작가는 자신이 그런 프레임에 갇혀 있음을 모르거나 아니면 알면서도 벗어나기 싫은 것입니다. 이런 현상을 두고 인지심리학적으로 말하면 인지적 무의식에 의한 이중개념 biconceptualism이라고 합니다. 

그 여성 작가 주장이 일관성 없이 왔다 갔다 하는 까닭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이승만과 군사독재정권이 그동안 짜놓은 반공 이데올로기라는 무의식 프레임 속에 진실이 들어오는 것이 불편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여성 작가의 주장 중 선명한 것은 김구의 말을 인용해 가면서까지 좌우익 이념대립이라는 프레임 안으로 모든 것을 우겨넣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요지는 공산주의자 14연대 군인과 역시 공산주의자 여수 순천 인민위원회 사람들이 먼저 양민학살을 했고 이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국가폭력에 의해 양민들이 희생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실은 하나일 수 없고 모두의 아픔을 치유하는 방향으로 가야한다고 말 합니다. 여순항쟁 70주년 올해 들어 여수에서도 많이 듣고 있는 주장입니다.

물론 하나의 역사에 하나의 역사관만 있을 수는 없지요. 역사 사건은 대립에 의해 일어나므로 다양한 프리즘으로 역사관이 나타나겠지요. 그러나 분명한 것은 어디에 서서 역사를 바라보느냐 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자기 서 있는 곳에 이익과 정체성에 기초하여 사고하기 때문입니다. 흔히 존재가 그 사람의 의식을 규정한다고 한다는 말이 이런 경우이겠지요.

당시 여수시민이라고 해서 모두 민족적이지는 않았잖습니까. 친일반민족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조선인 헌납 제로센 전투기 1호기를 일본 천황에게 갖다 바친 사람들이 여수 임전보국단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을 우익이라는 정의로운 이미지로 위장한 단어로 표현하면서 좌익과 우익의 이념대립이라는 프레임 효과를 톡톡히 봐왔습니다.

이승만 정권 다지기에 희생된 '여순항쟁'
'좌우 이념대립'이라는 '프레임'... 반드시 깨야 한다.

여기서 여순항쟁 당시 즉 일제로부터 해방되었으나 또다시 미군정이 또다시 지배하던 시대 이 땅에 어떤 형질의 사람들이 있었는지 살펴 봐야하겠습니다. 일제지배에서 해방 된 후 남한 땅에는 네 종류 형질의 인사들이 형성되었습니다.

하나는 이승만을 비롯한 친미기독교파.

하나는 김성수 등 청산되지 못한 친일잔존파.

하나는 김구를 비롯한 상해 임시정부파

하나는 여운형을 비롯한 국내 민족주의파

이 부류 중 친미기독교파 이승만이 미국을 등에 업고 친일잔존세력을 끌어들여 정권을 다지려 했습니다. 이에 국내 민족주의 사람들이 미군정과 이승만 그리고 친일잔존세력에 저항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터진 것이 제주 4.3 항쟁이며 여순항쟁인 것입니다.

이것을 정권 다지기 기회로 삼은 이승만은 정적인 김구까지 제거할 목적으로 여순항쟁 배후로 지목하였습니다. 이에 대해 김구는 여순항쟁을 철없는 군인들이 무모한 군사행동을 일으켰다는 말로 자신을 묶으려는 이승만의 계략을 피했던 것입니다. 

김구의 이 말 조차도 보수진영에서는 여순항쟁을 공산주의자들이 일으킨 반란으로 몰아넣는데 이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듯 진실을 알리는 사실 나열이 의미를 가지려면 반민족 세력이 만들어 놓은 좌우익이념대립이라는 프레임을 깨버려야 합니다.

지금까지 칠십 년 세월 동안 이런 좌우익 프레임은 깨지지 않고 이어져 왔습니다. 여순항쟁 70 주년 올해도 여전히 각 매체에서는 이승만과 군사독재정권이 만들어 놓은 좌익 프레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그 안에서 이야기들을 하고 있습니다. 

이럴 때 좌우익이념대립 프레임 밖에서 숨어 웃고 있는 자들이 있습니다. 이승만과 청산되지 못한 친일파 군사독재정권들과 그들에 붙어 잘 먹고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만들어놓은 좌우익 프레임을 깨버려야 합니다. 여순항쟁은 이제 와서 항쟁이라고 불러야 하는 것이 아니고 발발 그 시점인 1948년 10월 19일부터 항쟁이었습니다. 

십년 전 60주년에도 여순항쟁이라고 외쳤습니다만 명칭을 회복하지 못한 채 올해도 사건이라고 본질을 회피하고 있는 것을 지켜보면서 참 씁쓸합니다.

이렇게 해서는 여순의 어두운 그림자를 걷어 낼 수 없습니다. 근본적인 화해 상생 해원도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앞으로 십년이 더 흐른다고 해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모양 나는 추모행사를 위해 허울 좋은 가치중립적인 사건으로 칭하자고 해서 해결되는 문제가 아닌 것입니다. 그것은 여전히 '반란'이라는 오명을 은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해결되어 반민족 이승만 정부와 친일잔존세력에 저항한 항쟁 성격이 회복되지 않는 한, 진정한 화해 상생은커녕 해원도 이루어지지 않을 뿐 더러, 여전히 어두운 그림자는 여순 전남동북부 지역에서 걷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나처럼 또 어느 여수 소년이 타 지역으로 전학 가서 무참한 상처를 입지 않을 것이라는 보장도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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