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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보람찬 일, 나무 심기

'춤추는 정원' 연재(20)
거센 비바람에도 무럭무럭 크는 나무, 척박한 땅에서도 잔병치레 없이 조용히 가지를 밀어올려
특별히 관리하지 않아도 해마다 아름다운 꽃과 열매로 보답해

  • 입력 2020.04.04 10:00
  • 수정 2020.04.25 16:58
  • 기자명 환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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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추는 정원의 느티나무 아래를 필자가 지나가고 있다.

요즘 코로나로 힘들다.  난 정원에 오면 코로나 시름을 잊는다.  뭐~ 다른 것도 다 잊어버리려고 하지만...  

누군가 세상에서 가장 보람된 일이 무어냐고 물어온다면, 나는 한 치 망설임 없이 ‘나무를 심는 일’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여자로서 아내의 역할도 엄마의 역할도 썩 잘 수행하지 못하고, 사회 구성원으로써 마땅히 해야 할 사회적 실천도 부족하지만 이를 크게 부끄러워하지는 않는다. 그건 내가 나무를 심기 때문이다.

나무는 생명이다. 아름답고 유익한 생명이다. 고로 나는 아름답고 유익한 생명을 키우는 보람된 일을 하고 있다.

‘저절로’ 크는 나무

나무를 키우는 일이 왜 이렇게 보람된 일처럼 느껴질까. 가만히 생각해보니 이는 나무는 ‘저절로’ 크기 때문이었다. 나무는 심어 놓기만 하면 햇빛과 비, 바람으로 저절로 자란다. 특별히 애쓰지 않아도, 앞으로 어떻게 자라날 지 조마조마하지 않아도 나무는 스스로 크고 자란다.

생각해 보라. 세상에 이런 일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노력하지 않아도, 애쓰지 않아도 이렇게 쉽게 성취되는 일이 나무 키우기 말고 어디 있단 말인가.

과거 논과 밭이었던 우리 정원에는 전 주인이 형식적으로 심어 놓은 몇 그루 외에는 이렇다 할 나무가 없었다. 나는 빨리 그럴듯한 정원을 만들고 싶어 봄만 되면 많은 나무를 심었다.

추위가 막바지에 이르는 2월 초가 되면 원예종묘회사에서 그해 ‘신상나무’를 소개하는 두툼한 책자를 발송한다. 이때부터 사실상 우리 정원의 봄이 시작된다. 매일 매일 무슨 나무를 심을까 행복한 구상을 하면서 지루한 겨울을 견딘다. 2월 말 장날에 묘목시장이 들어서면 본격적으로 장터를 돌아다니면서 묘목을 구입한다.

15년 전 처음 정원을 가꾸기 시작할 때는 4월 초부터 나무를 심었지만 요즘은 온난화가 진행되어 2월 말에도 나무를 심을 수 있다. 허허벌판 넓은 땅에 봄가을이면 많은 나무를 심었다. 하지만 척박한 땅이라 심고 심어도 내가 상상한 푸르고 싱그러운 정원은 빨리 만들어지지 않았다.

더구나 정원까지 들어오는 길은 자동차 한 대 겨우 지나갈 정도로 좁아서 큰 나무는 아예 들여올 수도 없었지만 자가용 트렁크로 뒷좌석에 들어갈 만한 묘목을 부지런히 날라 심었다.

그렇게 오 년이 지났을까. 좀처럼 성장의 기미가 보이지 않던 나무들이 어느 순간부터 ‘폭발적’으로 자라기 시작했다. 척박한 땅에 뿌리 내리는 데 성공한 나무들은 병도 걸리지 않고 기대 이상으로 잘 자라 주었다.

춤추는 정원의 봄 벚나무 

나의 '인생 나무'

그 시기 정원에 심은 첫 나무, 지금도 마당 한가운데 떡하니 자리잡고 있는 느티나무를 나는 제일 아낀다.

처음 땅을 구입하고 정원을 만들기 시작할 때 새로운 인생에 기념비가 될 상징성 있는 나무를 하나 심고 싶었다. 시골마을 초입의 당산나무처럼 내 ‘후손’들도 기억할 수 있게 시간이 흐를수록 거대해지고 여름에는 시원한 그늘을 드리우고, 가을엔 단풍으로 곱게 물드는 그런 나무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모저모 따져본 끝에 느티나무로 결정을 내렸다. 느티나무는 빨리 자라기도 하고, 시간이 흘러 거대해지면 울창한 그늘도 만들어 주기 때문에 우리나라 방방곡곡 시골마다 흔히 있는 당산나무다.

정원 한 켠 느티나무가 만들어준 공간은 이제부터 제 철을 만나게 된다

느티나무는 기대 이상으로 빨리 자랐고, 예상대로 여름만 되면 마당 한 쪽을 다 덮고도 남을 만큼 커다란 그늘을 드리운다. 팔뚝만 했던 몸통은 이제 웬만한 남자 허리보다 더 굵어졌다. 정원에 놀러오는 사람들은 누구나 거대한 느티나무 수형이 아름답다고 입을 모아 칭찬한다.

비치파라솔 없이도 우리는 그 그늘 아래서 가든 티파티도 하고 때로는 바비큐 파티를 열기도 한다. 봄에는 파릇한 새싹으로 봄의 약동을 알려주고, 여름에는 싱그러운 그늘로 우리를 시원하게 해준다. 또 가을에는 알록달록 예쁜 단풍으로 정원을 운치있게 해준다. 느티나무 한 그루의 위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그럴듯한 꽃밭 하나 없이 이곳은 풍성한 정원이 되고도 남는다.

정원을 가꾸기 시작한 초기에는 '매미', '루사'처럼 큰 태풍이 유난히 많이 찾아 왔다. 그때는 대부분의 나무가 아직 땅에 뿌리를 내리지 못한 상태라 피해가 컸다. 토목공사와 관련된 피해도 컸지만 무엇보다 나무들이 뽑혀 죽는 모습이 가장 마음 아팠다. 돈이 좀 들더라도 금방 해결되는 토목공사와 달리 뽑힌 나무는 다시 살리기가 쉽지 않았다. 무엇보다 한 생명이 사라진다는 점이 가장 마음 아팠다.

태풍 피해를 제외하면 정원의 나무는 병치레 없이 잘 자라 주었다. 척박한 돌투성이 땅이라 속도가 빠르지는 않았지만 한번 자리 잡은 나무는 병 없이 잘도 컸다. 그 점만으로도 감사하다.

나무를 생각하면 어릴적 내가 살던 동네 입구에 자리잡은 연못 크기의 아담한 저수지가 떠오른다. 봄부터 가을까지 동네 사람들은 저수지에 모여서 밭에서 난 채소들을 다듬기도 하고, 해가 질 무렵이면 삼삼오오 모여 담소를 나누기도 한다. 그런데 지금 내가 사는 동네 저수지 가에 그늘을 만들어 주는 제대로 된 나무가 한 그루도 없었다.

매일 그곳을 오가면서도 그저 안타깝게 생각할 뿐 좀처럼 방법을 찾지 못하다가 몇 년 전 제법 큰 후박나무를 동네에 기증했다. 조금 부담스런 경비였지만 동네에 그럴듯한 당산나무 한 그루 없는 현실이 안타까워 큰 맘 먹고 기부를 했다.

지금 후박나무는 여름이면 동네에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 사람들의 휴식처가 되어준다. 동네 사람들은 항상 그 밑에서 갓이며 고들빼기 등을 다듬는다. 지금까지 살면서 내가 세상에 준 가장 보람 있는 선물이다.

난 아직도 심고 싶은 나무가 많다. 봄에는 눈부시게 하얀 꽃이 만발하고 가을에는 앙증맞은 빨간 열매가 열리는 애기꽃사과나무도 심고 싶고, 가을이면 탐스럽고 향기 좋은 열매가 열리는 유자나무 그리고 꽃앵두나무, 왕대추나무, 멀구슬나무, 꽃복숭아나무 등등 다 열거하기 힘들다.

세상에 별로 부러운 것이 없지만 나무만은 예외다. 다른 사람의 정원에서 특별하고 아름다운 나무를 보면 걷잡을 수 없는 부러움에 휩싸인다. 당장 그런 나무를 심고 싶어 안달이 난다.

입구에서 정원 마당으로 들어오는 길목의 개나리

하지만 나무를 키우는 것은 하루아침에 되지 않는다. 무엇보다 토양과 기후에 맞아야 하고 멋진 꽃과 열매를 보려면 자라는 시간도 필요하다. 인내심이 아주 많이 필요한 것이다. 인물 키우는 일도 그럴 것이다. 선거철에는 우리 사회의 든든한 나무 같은 인물을 그려본다. 정원 마당의 느티나무 같으면 나는 그에게 투표하겠다.

난 가끔 남편과 찻잔을 들고 정원을 산책하면서 바깥일에 지친 남편에게 위로의 말을 건넨다.

“만수 씨, 우리 통장에 돈은 별로 없지만 이 나무가 다 돈이라고 생각해봐. 우린 엄청 부자야! 가만히 있어도 나무가 해마다 자라니 계속해서 돈이 불어나는 거야. 얼마나 좋은 투자야!”

억지스러운 말에도 남편은 호탕하게 웃는다. 아직 더 나무를 심을 수 있는 땅이 있고, 나무를 심고 싶은 욕망이 들끓는 이 상태가 나는 좋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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