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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면의 깊이를 더해주는 이민하의 발성법

화가 이민하.. 독백, 끊임없는 재생,모호성의 긍정적 의미
모노톤의 색채로 복잡한 현실을 순화하여 담아내
삶을 순응하는 무욕의 마음으로 일상의 한 부분을 표현

  • 입력 2020.06.19 14:40
  • 수정 2020.06.21 10:56
  • 기자명 신병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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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가 이민하는 예술섬 장도 창작스튜디오 제1기 입주작가로 선정됐다. 

화가 이민하는 최근 예술섬 장도 창작스튜디오 제1기 입주작가로 선정돼 장도에 입주중이다. 여수출신의 중견 작가로 활동해온 그가 장도 창작스튜디오에 머물면서 어떤 작품세계를 보여줄지 궁금하다. 그는 “장도라는 새로운 공간에서의 느낌, 제 자신의 호흡 같은 걸 중시하면서 창작활동에 몰입할 예정이다”고 말하며 전입작가들의 협업도 하나의 성과가 될 것이라고 전했다.
시인 신병은이 펴낸 지역작가 작품 해설집인 '그림 내 마음대로 읽기'에 실린 이민하 편을 게재하여 독자들과 그의 작품세계를 공유하고자 한다.   - 편집자 소개글 - 

이민하, 남산동골목(2012. 4)

“하나의 빛깔로 세상을 표현하고 싶다. 마음의 틀에서 벗어나 머뭇거리거나 서성대지 않는 흐름의 안쪽에 있고 싶다“

햇살이 속마음까지 비집어드는 초겨울에 잘 어울리는 한 편의 시같은 그의 첫 마디, 긴 겨울을 건너는 화가의 겨울사랑은 이렇게 시작되고 있었다.

다소 지치고 피곤한 듯한 그의 독백. 그와의 만남은 얽히고설킨 우리 삶이 독백 속에서 어떻게 정화되어 나타나는지, 우리 삶의 처음은 무슨 빛깔인지, 구멍 뚫려 새고만 있었던 삶의 내상 이 무엇인지를 헤아리고 치유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잃어버린 일상을 회복하고 이 시대의 밑 모를 추락과 다원성을 서정으로 감싸고 포용하려는 것이 그의 예술이라면, 그가 전하고자하는 이야기의 안과 밖은 무엇일까.

지나치게 물화되어진 오늘의 삶에 기대어 그의 모습을 보면 그가 보여주는 예술의 틀은 있는 듯하면서도 없고 없는 듯 하다가도 있는 무형식의 형식 안쪽에 이미지의 겹침과 순간포착의 집적을 담고 있다.

덧씌우고 벗겨내는 수번의 반복으로 마티에르를 조작하면서 회화적 완성도를 밀어 올리는 기량과 성실성을 지켜보면 그가 추구하는 미의식은 오랜 숙성 속에서 제어되고 정화된 이미지의 순환이다.

모든 예술은 이념적 지평에서가 아니라 느낌을 전달되는 감성의 체계이며 미(美)란 우리의 감각적 지각에 의한 형식상의 여러 관계의 통일이라는 것, 미감 또한 쾌적한 여러 관계에 의한 감각이란 것이며, 나름의 체험과 미의식에 대한 주관화된 의식에 의해 풀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신월동 넘너리(2008) 70×45cm, 캔버스에 아크릴

“예술은 독백이며 상상력의 미적 창조이어야 한다. 상상력과 독백은 인간심성의 자유연상인 셈이다. 그것은 인간심성의 밑바닥에 존재하는 욕망을 실현하는 수단이며 신과 인간, 자연과 현실의 근원적 관계에서 기인된 정신의 원초적 몸짓이다.

그와 함께 자신의 무의식을 작용시키고 작품 속에 자신의 참모습을 내재시킬 수 있다. 독백과 상상력은 무의식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길러 내거나 혹은 작가 자신의 본질을 파악해 내는 힘이다”

거창한 듯한 그의 세계관은 그의 작업이 얼마만큼 자신에 대해 되묻는 과정인지를 알 게 한다. 그의 작품에 대해서는 90년대 초 세 번의 개인전을 통해 이미 검증받은 바 있다.

박영택 씨의 말을 빌면 “그의 작품에서 유추해 볼 수 있는 화면의 복합적 공간구조와 구상과 추상의 공존, 상징기호들의 부유, 조형자체에 대한 증폭된 관심, 모노크롬과 폴리그람, 짙은 서정성의 강조, 색면 분할된 화면내의 이질성과 공존성, 복합성, 절충성이 맞물리면서 작품의 질료적 효과를 극대화해서 물성의 존재감을 고양시키는 물질체험과 그에 따른 정서의 발효는 그의 주된 특징이다. 무엇보다도 작가는 철저히 그리며 만들어 나가는 평면 내의 싸움을 우선시하면서 단단하고 깊이 있는 평면의 존재감을 확고히 하고 있음이 돋보인다”고 포괄적인 해석을 한 적이 있다.

이는 그의 그림에 지금까지 이어져오는 면면이며 바탕이다. 사물의 본질 그 자체는 인간의 인식을 초월한 것이므로 무엇을 구체적으로 그려야 할지 의도되지 않은 상태에서 무목적의 과정에서 추구해낸 그 무엇이 진정한 가치가 아닐까. 그래서 그에게는 현실을 통해 예술을 볼 것인가 아니면 예술을 통해 현실을 볼 것인가 하는 것은 크게 문제 되지 않는다.

그의 작품 하나하나가 예외 없이 삶의 다중적인 복합구조를 긁어내고 덧칠하는 숱한 반복 속에서 평면화된 서정이기 때문이다. 삶의 일상과 다중성을 화면 밑바탕에 두고 오랜 시간을 갈무리하여 편안하고 여유로운 분위기를 연출한다. 얼핏 보아 단순하고 건조한 것 같지만 세계를 새롭게 인식하고 해석해 내려는 그만의 화법에 따르고 있음을 볼 때 그의 조형은 운명과의 만남인지도 모른다.

 

덧씌움과 벗김, 그 미완의 아름다움

그에게서 독백은 자신에 대한 끝없는 탐색이며 무한한 상상력을 갖게 해주는 힘이다. 그래서 그의 그림에는 삶에 대한 숱한 영상과 언어가 숨겨져 있다. 그 속에는 우리 삶의 아픔과 즐거움, 어둠과 밝음, 희망과 절망이 통합된 변증법이 보이고, 높고 낮은 산이 있고 그 사이로 흐르는 강이 있고 우리가 필요로 하는 삶의 에네르기가 있다.

투박하고 거친 밑작업으로부터 시작하여 순간순간 느끼는 삶의 영상을 담기까지 덧씌움과 벗김이 계속된다. 그렇기에 그의 그림은 어떻게 보아 그의 품안에 있는 한 미완이다. 그 미완 속 에 오히려 그가 표현해 내려는 삶의 복합적인 영상이 있다. 미완의 완성, 이것이 그가 처절하게 보듬어 내려는 미의 본질이다.

생텍쥐베리는 사막이 아름다운 이유는 사막 어딘가에 오아시스가 숨어 있기 때문이라 했다. 그의 작업은 이 삭막한 현실 속에 숨겨져 있는 삶의 아름다움과 여유를 찾기 위한 즐거움이며, 미니멀리즘의 형식 속에 명상과 서정을 담아내려는 반복행위이다.

언제 한번 제대로 잡아낼 수 있겠지, 하는 미완 속에서 오히려 그는 편한 여유마저 보인다. 편한만큼 하잘 것 없는 작은 이야기에도 믿음과 관심을 부어 화면 속에 담아두려 한다.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안과 밖의 모두가 바로 아름다움이고 행복임을 이야기한다.

이러한 그의 이야기는 세상에서 들려오는 모든 소리에 마음과 귀를 열어 놓고 속된 삶의 허물을 벗고 때묻은 눈물도 털어내고 더렵혀진 영혼까지도 헹궈낼 수 있는 여백 안에 머무르게 된다. 속도감은 떨어지지만 세련되고 깊이 있는 풍경들을 애틋하게 되살려 내면서, 시간이 지날수록 상상력을 통해 무진장한 삶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를 만날 적마다 산다는 것은 어쩌면 채우고 다시 비우는 과정의 연속인 것 같기도 하며, 맺혔다가 다시 풀리는 과정인 것도 같다. 그의 작품은 어찌보면 한쪽을 비워 다른 한쪽을 채우는 아름다운 과정 속에서 탄생하는 계절의 연속과도 같다. 시간의 흐름 속에서도 변하지 않는 곰삭은 고집이 있다.

그냥 변화에 둔감한 쭉정이 같은 아집이 아니라 늘 새로운 창조를 향해 출발하는 자기 응시다. 걱정이 있다면 이러한 깊이와 넓이를 독자는 어떤 관점에서 만날 것인지에 대한 궁금과 화가의 자기 안쪽에서 자신을 감동시킬 신선한 충격에 대한 갈증이다.

삶의 현재는 감동이어야 한다면 그는 무모한 실험에 의해서가 아니라 끊임없이 자신을 이끌어 줄 정신의 관조 속에서 감동이 가능해진다고 믿는다. 그래서 현대회화의 가장 중요한 요소는 질감임을 강조하며 긁어내고 칠하는 숱한 반복 과정에서 어느 순간에 이미지화된 것이 작품이다, 그것은 그의 마음속에 숨겨져 있던 메시지가 구체성을 획득하게 된 것이다.

화려한 원색은 가급적 배제하면서 모노톤의 색채로 번거롭고 복잡한 현실을 순화시키면서 회화의 깊이를 더해가는 화법을 즐기는 이유도 자신에게 길들여지지 않고 주위의 현상을 마음으로 보면서 삶의 일회성에서 벗어나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그의 작품을 고민스럽게 접근할 것이 아니라 그의 작품은 있는 그대로 보면 그만이다. 그러면 작품 안에서 또 다른 작품도 함께 만날 수 있는 행운도 갖게 된다.

 

모호성, 평면의 넓이와 깊이

밤 낚시(2011) 80.36x53cm, 캔버스에 아크릴

그는 다소 금욕적인 삶을 바탕으로 평면의 깊이에 심취한다. 평면의 깊이는 아직도 베일 속에 감추어진 신비 그 자체라고 믿는다. 그동안 끊임없이 추구했던 인간에 대한 탐색과 줄곧 관심을 보여왔던 실존적 인간에 대한 탐색이 인간의 삶에 대한 변증법이었다면, 이분법적인 화면 구성은 안과 밖의 상황설정에 다름 아니다.

그가 즐겨쓰는 형상과 추상의 화면 병치는 우리 내부 속에 숨어있는 무의식을 끄집어 내 보이려는 이야기의 바깥 설정이었다. 이러한 모습은 독자에게는 다소 생경한 모습으로 보였음은 부인할 수 없다. 다만 그동안 이민하 작업의 컨셉을 이루는 중요한 핵이었으며 이번 전시회를 통해 선보이는 추상적 미니멀 작품까지 연결되는 근간이었음은 부인할 수 없다.

그에게 평면은 인간과 삶에 대한 화해와 통합의 공간이면서 삶의 속됨과 허영을 정화시켜주는 재생의 공간이다. 화면 한 곳에 외롭고 투명하게 놓아 둔 집 한 채, 나무 한 그루는 정화의 순간에 그가 만난 고요하고 잔잔한 깨달음의 정서적 등가물이다. 그가 그림을 그리는 신명은 여기에 있다.

그의 감흥은 보는 이를 선동하는 생동감 있는 추임새가 아니라 뭐라고 꼬집어서 얘기할 수 없는 낯익은 만남이다. 세상의 어떤 험난한 삶도 그의 화면에서는 물처럼 자연스럽고 공기처럼 부드럽게 정화된다. 그의 작품에서 새어나오는 빛깔 하나로 메마르고 각박한 마음도 풍요로운 시적정서를 만날 수 있다.

그의 체질은 무계획적으로 시작해서 어느 한 작품도 소홀하지 않은 오랜 과정을 통해 포착한 영상을 표현해내는 평면의 깊이를 더해주는 그만의 발성법에 있다.

여느 작가처럼 상관물을 통해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반복에서 체험하는 순간적인 감흥으로 삶의 현상을 파헤치고 표현해낸다. 현실적 아픔을 이겨내고 일상의 숲으로 가고자 하기에 평면 자체가 세계관의 구체성에 다름 아니고 자신의 심중에 있는 메시지의 프리즘이자 파노라마이다.

그래서 그의 그림 안에는 빛으로 열릴 듯한 숱한 마음의 언어가 속삭이고 있다. 평범한 가운데 그의 그림이 개성적으로 보이는 이유는 그가 계획되지 않은 가운데서도 개성적인 인식내용을 이끌어 낼 줄 알기 때문이다. 이는 삶에의 순응과 무욕에서 가능한 결과이다.

연등동 축대 위의 집들 30×30cm Acrylic on canvas, 2018

이민하가 주는 감동의 실체는 여기에 있다. 그의 그림이 갖는 또 하나의 특장은 모호성의 긍정적 의미이다. 이전의 작업이 계획된 의도에 따른 진행이었다면 근래의 작업은 무계획적인 화면 속에서 정답을 찾아가는 무목적성을 바탕하고 있다.

이러한 건드림은 많은 가능성에 대한 모색이며, 변화에 대한 긍정이다. 그가 전하는 복음은 조형의 질량감과 모호성을 긍정적으로 표현한 서정이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그의 작품 속에는 독백을 통해 제시된 많은 삶의 서정이 내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거짓 없이 삶을 바라보는 자기응시에서 시작하여 자아 아이덴티티를 찾아가는 여정의 끝은 결국 자신과의 만남이며 자아발견이다.

고요하면 맑아지고 맑아지면 밝아지고 밝아지면 보인다고 한다. 그림의 폭과 깊이마다 담겨있는 언어와의 참된 만남이 가능할 때 그의 그림이 우리의 마음을 헹궈낼 수 있는 서정으로 서게 될 것이다.

해서 알맞은 간격을 두고 그의 그림을 만나면 우리 삶이 갈등과 고통이 아니라는 것을, 단선적인 결말과 판단이 아님을, 닫혀있는 것이 아니라 늘 열려있는 과정임을 알게 된다.

언뜻언뜻 보였다가 사라지는 진리의 실체도 한결 우리 가까이 세워둘 수 있을 것 같은, 어디에서도 어떤 빛깔로도 어울리는 관계설정, 이것이 그가 우리에게 전해주는 울림이 아닐까. 그래서 그의 그림에서 가장 신뢰해도 좋을 부분은 평면의 넓이와 깊이에 저며있는 서정이다.

서정은 예술의 영원한 본질이며 어디까지나 인간의 삶에 유지되지 않으면서도 보 다 근원적인 무엇이다. 그가 화면 밖으로 드러내고 싶었던 이야기의 바깥은 수신처 불명의 메시지인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그의 독백은 계속될 것이고 독백이 계속되는 한 우리 삶의 아름다운 끝마무리를 위한 작업은 계속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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